진문공

역대 진나라 군주
23대 진회공(晉懷公) 희어(姬圉)
24대
진문공(晉文公) 희중이(姬重耳)
25대 진양공(晉襄公) 희환(姬歡, 姬驩)
(姬)
진(晉)
중이(重耳)
아버지진헌공 희궤제(姬詭諸)
생몰기간음력기원전 697년 ~ 기원전 628년(사기)
기원전 671 ~ 기원전 628년(춘추좌씨전)
재위기간음력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

진문공은 춘추시대 (晉)나라의 군주이다. 춘추오패 중의 한 명이며, 성(姓)은 (姬)[1], 씨(氏)는 진(晋), 이름은 중이 (重耳)이다. 생몰년은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기원전 671~628,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697~628이다. 어찌되었건 재위 기간은 기원전 636~628년(8년)이다.

춘추시대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로 군주 자리 계승 다툼으로 인한 내란으로 각지를 방랑하다가 늘그막에 고국에 돌아와 즉위하여 패자의 자리에 오른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그렇기에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등 주변의 역사에서도 방랑 신세인 주군을 격려하는 부하들이 항상 예로 드는 인물이다.

1 가계

진헌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헌공의 아버지인 진무공은 제환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나이차가 매우 났다. 그래서 무공이 죽자, 헌공은 계모[2]를 자신의 비로 삼고 신생(申生)을 낳았다. 이후 제강이 죽자, 진헌공은 다시 포로로 잡은 적(狄) 여인으로부터 딸 한 명과 아들 두 명, 즉 중이와 이오(夷吾)를 낳았다. 딸은 진목공에 시집보냈다.

또한 진헌공은 여융을 공격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두 공주를 취해 언니 여희에게서 혜제(奚齊)를, 동생 소희에게서 탁자(卓子)[3]를 낳았다. 그러니까 진헌공은 신생, 중이, 이오, 혜제, 탁자라는 아들을 각각 두게 된다. 여희는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진헌공에 한을 품고 진헌공과 태자 신생의 이간질을 했는데, 여기에 말린 헌공은 태자에게 자살을 명한다.

태자는 자살했고 불똥은 중이와 이오에게 튀어서 이 둘은 나라를 떠나 방황하게 된다. 여기에 이들을 따르는 진나라의 신하들이 동참하여 중이는 적(翟)나라로, 이오는 양(梁)나라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중이는 19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방랑을 하게 된다.

2 이오의 즉위

한편 진나라에서는 진헌공이 여희의 아들인 해제를 태자로 책봉한 뒤 곧 사망했다. 그러나 어린 해제는 곧 암살되었고, 이어 중이는 진(晉)나라 유신들에게 보위에 오르라는 청을 받지만,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라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상중임을 빌미로 군위에 오르는 것은 거절했다. 그리하여 동복동생인 이오에게 차례가 돌아와 이오는 누님의 남편인 진(秦)목공의 도움을 받아 곧 행동을 취해 진(晉)나라로 되돌아와 군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진혜공이다.

그런데 진혜공은 군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면 5성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배신하여 진(秦)나라는 이걸 괘씸하게 여겼지만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이후 진(晋)나라에는 흉년이 들어 진(秦)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진목공은 이를 수락해 엄청난 원조를 해줬는데, 공교롭게도 다음해에 처지가 반대가 되었다. 목공은 혜공에게 식량원조를 요청하였으나, 혜공은 이를 기회로 진(秦)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다가 한원대전에서 진목공에게 대패를 하여 역관광당해 포로가 된다.

진목공은 배은망덕한 혜공을 죽이려고 했으나, 혜공의 누님인 비의 간곡한 청으로 원래 약조한 5성을 할양받고 세자 어를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3 중이의 방랑

그동안 중이는 진혜공이 보낸 자객들을 피하며 계속 방랑하고 있었는데, 이때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이 남겼다.

중이는 망명한 적나라에서 환대를 받으며 계외(季隗)라는 미녀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얻었다. 그러나 혜공이 자객이 보내 목숨을 노리자 결국 적나라를 떠났는데 이때 계외에게 '뜻하지 않게 먼 길을 떠나야하는데 25년만 기다려주고 그때가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재가를 하라'고 했다. 그러자 계외는 '내 나이가 25살이라 25년 뒤면 할망구가 될 텐데 어딜 가겠는가. 평생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답했다.[4]

이후 가신들과 상의 끝에 제나라로 가던 도중 위나라의 오록 지역을 지나다 너무나도 허기진 끝에 농부에게 밥을 구걸했다. 그러자 농부는 허우대 멀쩡한 녀석이 구걸이나 한다고 밥그릇에 흙을 담아줬다. 빡친 중이가 농부를 때리려는데 조쇠가 '그 또한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받으시라'고 했고 중이도 마음을 고쳐먹고 흙을 받았다.[5]

이후 제나라로 가서 당시 패자였던 제환공의 환대를 받고 제나라의 공녀[6]와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도 여간내기가 아닌 것이, 하루는 중이가 편안한 삶에 젖어 큰 뜻을 잃을까 걱정한 가신들이 모여 중이를 빼돌릴 논의를 하고 있는데 이를 한 계집종이 엿듣고는 제강에게 고자질했다. 그러자 오히려 계집종을 죽여 입막음을 하고는 중이의 부하들과 짜고선 중이에게 술을 진탕 먹여 강제로 제나라 밖으로 데려가게 했다. 흠좀무

제나라를 떠난 중이는 조(曹)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조나라 군주 공공(恭公)은 중이를 업신여겨 후히 대접하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중이는 중동(重瞳)에 변협(駢脇) 즉 눈동자가 둘이고 갈비뼈가 통짜로 되어 있는 특이한 상으로 유명했다. 공공은 이것이 정말인지 궁금해서 목욕하는 중이를 훔쳐보는 무례를 저지른다. 이때 조나라 대부 가운데 희부기(僖負羈)란 자가 있었는데, 그 부인이 희부기에게 충고한다. '내가 볼 때 중이는 임금의 기상을 지닌 인물이고 그를 수행하는 인물들도 당대의 영걸이다. 만약 중이가 진나라로 돌아가 패업을 이루면 반드시 지난날 무례했던 제후들에게 복수할 것인데, 조나라가 가장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희부기는 이 충고를 옳게 여겨 사람을 시켜 음식 속에 보물을 숨겨 보냈다. 중이는 음식은 고맙게 받았으나 보물은 사양했다. 그리고 훗날 중이가 진문공이 되어 조나라를 침공했을 때, 병사들이 희부기가 사는 구역에는 접근하거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했고 희부기네 마을에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여기서 병사들이 진입한 곳에는 매우 좋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는걸 유추할 수 있으며, 열녀전에도 실린 유명한 이야기다. 근데 문공이 거지로 19년을 방랑할 시절부터 함께했던 신하중 하나인 전힐이라는 이가 희부기네 집에 불을 질러 희부기는 타죽고 말았다고 한다. 전힐도 자기가 지른 불에 휩쓸려 죽었다, 혹은 희부기네 집에 불을 지른 죄로 전후 처형되었다고 한다.

중이는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들어와 군사를 빌려 군위를 되찾으려 했으나, 송양공은 이미 초나라와 싸우다 나라를 거지반 말아먹었고 게다가 중병이라서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중이 일행은 다시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를 거쳐 남방의 초강대국이었던 초나라에 도착했다. 초나라 왕인 성왕은 중이를 매우 환대했고, 제후로 대접하였다. 초성왕은 중이에게 "나중에 귀공이 보위에 오르면 어떤 보답을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중이는 "전하께서는 세상의 모든 보물을 가지고 있으신즉, 보물보다는 다른 것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초나라와 우리 진나라가 전쟁터에서 맞붙는다면, 저희는 90리를 물러나겠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저를 물러나지 못하게 하신다면 활을 잡고 전하와 겨뤄보도록 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초나라의 신하 자옥이 초성왕에게 중이를 죽이자고 청했으나 초성왕은 오히려 중이의 대담함을 높이 사면서 "중이는 뜻이 원대하고 겸허하며 언사가 올곧고 예모가 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태도가 중후하면서도 관후하고 사람됨이 충성스러우면서도 능력이 있다. 지금 진혜공은 인심을 잃어 나라 안팎에서 이미 미움을 사고 있다. 내가 듣기로는 희씨성을 가진 나라 중 당숙의 후손만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니, 이는 곧 중이를 말하는 것이다. 진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하늘의 뜻이 중이에게 있거늘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을 어기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중이를 살려주고 나아가 그 일행을 진(秦)나라까지 호송하도록 해주었다.

여전히 많은 초나라 신하들은특히 성득신 중이가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린다며 비웃었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 즉위

한편 진혜공은 즉위 14년째 병들어 사망하고,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세자 어가 돌아와 군위를 잇는다. 그가 바로 진회공이다. 한편 진(秦)목공은 어가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귀국한 것에 분노했고, 초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이를 끌어들였다.

중이는 초성왕의 환송을 받으며 진나라로 떠났고,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 회공을 쳤다. 중이의 조카였던 회공은 도망갔고, 중이가 군위에 오르니 바로 진문공이다.

진문공은 논공행상을 하여 자기를 따르던 가신들에게 푸짐한 보상을 하는가 하면, 대사면령을 발표하여 혜공이나 회공을 따르던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적극 등용하였다. 게다가 19년간 방황하면서 얻어진 연륜을 가지고 국내정치를 적극 정비하여 진(晉)나라는 일약 강대국으로 발돋음했다.

다만 진문공은 망명생활 중 전심을 다해 자신을 보좌한 개자추라는 신하를 논공행상에서 잊었다. 원래 진문공은 논공행사를 하면서 혹시라도 누락된 사람이 있을까봐 '포상을 못받은 사람이 있거든 신고하라'고 꼼꼼하게 포고까지 내렸다. 그런데 개자추는 망명 생활중 진문공이 굶주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여 바쳤다는 할고봉군(割股奉君)의 일화를 남긴 인물인데도, 이런 조치를 대단히 비루하게 여겼다. 선군이 남긴 자식들 가운데 가장 명민한 중이가 군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정작 그 신하란 작자들이 내 공이 크네 작네 따지는 것은 하늘의 공을 탐하는 짓이라며 도적질보다 못하다고 비루하게 여겼다. 여기서 나온 고사가 바로 탐천지공(貪天之功)이다. 결국 개자추는 노모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은거한다. 훗날 진문공이 개자추를 잊은 것을 알고 그를 찾았으나 개자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산에 불을 지르면 산에서 나올꺼라 생각하여, 결국 산에 불을 질렀지만 끝내 나오지 않고 노모를 감싸안은 채 산불에 타 죽어버렸다(포목소사). 진문공은 산불을 낸 것을 후회하고 개자추가 죽은 날에는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날이 마침 청명이었고 이것이 바로 한식(寒食)[7]의 기원이 된다.

5 패업

한편 진문공이 즉위하자마자 모든 제후국들이 종주국으로 모시던 주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주양왕의 동생인 대[8]가 주양왕을 몰아냈고, 주양왕은 정나라로 피신했다. 여기에 진문공이 개입하여 대를 토벌하고 주양왕을 복위시켜주었다. 진문공은 천자를 보위하여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또한 진문공 3년에는 초성왕이 다스리는 초나라가 진, 채, 정, 허와 같은 소국을 아울러 송나라를 침략했다. 진나라는 이에 초나라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진문공은 초나라 망명시절 3번을 후퇴하겠다는 초성왕과 한 약속을 유리한 상황에서 지킨 후에 이어진 회전에서 초나라를 박살냈다.

결국 진문공은 즉위한지 4년만에 패업을 이루고 패자가 되어 오랑캐에 맞서 천자를 지키는 "존왕양이"의 패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6 죽음 그리고 후일담

진문공은 패업을 이룬지 4년, 재위 8년만에 훙하였다. 문공 이후로도 진(晉)나라는 강국으로서 서쪽의 진(秦), 동쪽의 제나라, 남쪽의 초나라와 함께 약 100여년간 춘추시대의 초강대국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진나라는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셋으로 쪼개졌지만, 그 세 나라가 모두 전국칠웅의 하나로 성장할만큼 진문공이 다져놓은 진나라는 강국이었다.

한편 진문공은 태자 신생의 죽음으로 헌공에게 의심받아 도망가기 전에 핍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으며, 핍길의 아들이 진문공의 사후 장남이자 태자로서 진양공으로 즉위하게 된다. 계외에게서는 아들 둘이 있었으나 다들 어려서 죽은 것 같고 그 외의 후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제나라 공녀에게서 아들 하나, 진목공의 딸 회영에게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제나라 공녀의 아들은 진(秦)나라로 보내서 벼슬하게 했으며 회영의 아들이자 진목공의 외손자는 진(陳)나라로 보내서 벼슬하게 하여 일찌감치 권력 투쟁에서 떼어놓았다.

참고로 삼국지에서 유표의 아들 유기제갈량을 불러 '사다리 치우기'를 통해 향후의 일을 묻자 제갈량이 유기에게 해 준 조언이 바로 이 진문공의 예를 들어 조언한 것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이 다른 사람의 꾀에 낚이는 흔치 않은 장면인데, 이 이야기는 연의 뿐 아니라 정사 제갈량전에도 기록된 이야기.
  1. 춘추시대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던 주나라 왕실의 성이다.
  2. 제강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제강이란 그냥 제나라의 군주의 딸 또는 공녀라는 뜻이다. 계모라지만 나이는 헌공보다 훨씬 젊었다고 한다
  3. 달리 도자(悼子)라고도 한다.
  4. 계외가 진문공과 혼인한 나이는 13살때라고 하며, 진문공이 즉위하면서 진나라로 가서 7년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5.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측근 하나가 중이에게 '흙은 나라의 상징이니 이는 길조'라는 꿈보다 해몽식 해석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중이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어한다. 그런데... 후일 진문공은 재위 5년차에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오록을 점령하는데, 고우영 십팔사략를 보면 지역을 죄다 개발살내줬다고 나온다 (...)
  6. 위에도 말했지만 이 여자의 이름이 제강이라고 쓰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제나라의 공녀라는 뜻이다.
  7. 동지날로부터 105째 되는 날이다. 양력으로 4월 4~5일 즈음이 된다.
  8. 아우를 뜻하는 '숙'이 붙어서 태숙 대라고도 하며, '감' 땅을 봉읍으로 받았고 시호가 '소'라 감소공이라고도 한다. 부모에게서 형보다 더 사랑을 받았기에 제환공 시절에도 한번 군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을 당했으나 어머니가 형에게 사정해서 목숨을 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