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초나라 군주 | ||||
20대 장오 웅간(熊囏) | → | 21대 초성왕(楚成王) 웅군(熊頵), 웅운(熊惲) | → | 22대 초목왕 웅상신(熊商臣) |
성 | 미(羋) | |
씨 | 웅(熊) | |
휘 | 군(頵), 운(惲) | |
아버지 | 초문왕 웅자(熊貲) | |
생몰기간 | 음력 | ? ~ 기원전 626년 |
재위기간 | 음력 |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
1 개요
초나라의 21대 왕. 초문왕 웅자와 식부인인 규씨의 아들.[1] 그는 형인 장오 웅간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북쪽으로 세력을 뻗어 초나라의 힘을 강대하게 해 송나라에 타격을 입혔으나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아들인 초목왕 웅상신에게 살해당했다.
2 즉위과정
초문왕이 기원전 675년 승하하자 그 아들인 웅간이 뒤를 이어 장오가 된다. 그는 사냥과 놀이를 즐겨 정사를 등한히했기 때문에, 그는 기원전 671년 형인 장오를 시해했다. 도화부인은 그 사실을 알았으나 웅군을 처치할 명분이 없어 묵인해버렸다. 아서스가 생각난다. 근데 아서스와는 다르게 형을 죽였다.
3 치세
그리고 초나라 왕으로 등극해 나라를 잘 다스렸고, 초나라가 왕을 칭한 뒤로는 처음으로 주나라 왕실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선정을 베푼지 십수년이 지난 뒤 주왕실에 대한 조공을 끊어버리자 초성왕 16년인 기원전 656년 당시 춘추오패였던 제환공이 관중의 조언을 받아들여 주소왕이 남정해 죽게한 죄와 공물을 끊은 죄를 물어 초나라를 공격해왔다. 결국 이것을 두려워한 초성왕은 굴완에게 병력을 거느리게 하여 소릉에서 그것을 사죄하는 회맹을 가졌다.아무리 초나라의 번영을 이끈 초성왕도 춘추오패에게는 안되는 모양이다.[2]
초성왕 18년인 기원전 654년 허나라를 치고, 초성왕 22년인 기원전 650년 황나라를 치고, 초성왕 26년인 기원전 647년 황나라가 망하였다.
이 사이에 제환공이 죽고 송나라의 송양공이 패자가 되기 위해 제나라, 초나라 등의 여러 나라와 회맹을 가졌으나 초성왕은 송나라의 국력이 초나라보다 약한 것을 알고 그를 무시하자 송양공은 자신이 공작이고 초성왕이 자작임을 상기시켰으나 그 언사가 심히 모욕적이었기 때문에 초성왕은 거기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초성왕 33년인 기원전 641년 송나라를 기습하여 송양공을 사로잡았는데, 송나라 공자 목이가 송나라의 공작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초성왕은 송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송양공을 놓아주었으나 목이는 사심없이 그 자리를 송양공에게 돌려주어 초성왕은 닭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고 있는 격이 되고 말았다.뻘쭘했겠다.
초성왕 34년인 기원전 638년 정문공을 입조하게 했으며, 송나라를 쳐서 송양공에게 부상을 입혔다.[3] 그리고 다음 해 송양공은 사망했다.
초성왕 35년인 기원전 637년 성득신에게 진을 치게하여 초 땅과 이 땅을 차지해 병력을 주둔시켰다. 성왕은 성득신의 그 공로를 인정해 영윤에 봉했다.[4] 같은 해 겨울 진문공 정나라에서 초나라로 오자 그를 환대했다. 그러자 성득신이 그를 죽일 것을 권하나 초성왕은 단칼에 거절했다.
초성왕 37년인 기원전 635년 성득신에게 진나라의 병력을 추격하게 했다.
초성왕 39년인 기원전 633년 노희공 병사를 빌려 제나라를 칠것을 청하자 곡 땅을 취했다. 제환공의 7명의 아들은 초나라로 달아나자 초성왕은 그들을 상대부에 봉했다. 그리고 기(夔)나라를 멸했다. 같은 해 여름에 송나라를 쳤는데, 송나라는 진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초성왕 42년인 기원전 630년 영윤 성득신이 진문공의 진을 칠것을 권했으나 초성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들어주었다. 그리고 진문공은 초나라에 의탁하던 시절 이런 약속을 했었다.
"제가 진나라의 군주가 된다면 90리를 물러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진나라 측에서는 약속을 이행했다.[5] 같은 해 4월 성득신은 진나라에게 성복 땅에서 크게 패하고발리고 말았다. 초성왕은 크게 노하여, 성득신에게 자결을 명했다. 그러나 초성왕은 후회하고 그 후임으로 위여신을 영윤으로 삼았다. 그 소식을 들은 진문공은 크게 기뻐했다.[6]
4 최후
초성왕 46년인 기원전 626년 웅상신을 폐세자하고 총애하는 왕자 웅직을 태자로 세웠다. 같은 해 10월 웅상신은 이에 불만을 품어 반숭과 모의하여, 초성왕을 살해하러 갔다. 그러자 초성왕은 웅상신이 반란을 일으킨지 얼마 안되어 준비가 안되어 있음을 간파해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곰발바닥 요리가 먹고 싶다."
그러나 웅상신의 대답은 이러했다.
"곰발바닥은 익히기 어렵잖소!"
그리고 초성왕을 핍박해 목 졸라 죽여버렸다.이게 진정한 아서스!!!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7]
5 평가
그는 일단 국외 관계에서는 주나라를 무시하는 행보를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내치적으로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외부에 힘을 떨쳐, 그 아들인 초목왕이 그것을 이어 나라를 잘 다스리고, 그 손자인 초장왕이 그 뒤를 이어 나라를 크게 번성시켜 춘추오패가 된다.- ↑ 식규라 불린다.
- ↑ 마냥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게, 위의 사례도 그렇고 진문공에게도 호되게 당했기 때문이다.
- ↑ 그런데 이건 송양공의 자업자득인게, 전쟁터에서 인의를 따지면서 기습할 기회가 몇번 있었음에도 그것을 시행하지 않다가 험한 꼴을 당했다. 이것을 두고 송양지인이라 한다.
- ↑ 영윤은 초나라 최고의 벼슬이다. 진나라 이후의 승상과 같다.
- ↑ 단 이것이 초군을 유인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 ↑ 훗날 이 고사는 장완이 마속을 죽이는 것을 말릴 때 쓰여진다. 물론 제갈량은 초성왕처럼 마속을 용서없이 사형에 처했지만.
- ↑ 단 마냥 욕할 수는 없는게, 진나라의 헌공이 여희의 말을 믿고 신생을 자살하게 하고 진문공을 방랑하게 한 사례가 있었기에, 그 사례처럼 되지 않으려는 발로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