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춘추오패)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상(商)은(殷)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주(周)서주(西周)
동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춘추(春秋)
전국(戰國)
기원전 221 ~ 기원전 206진(秦)
후초(後楚)
중국의 역사
서주춘추시대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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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晉. 중국주나라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 중국어 발음은 Jin(찐). 춘추오패의 하나다. 기원 전 1042 ~ 369. 37대 673년. 삼진의 분열(기원전 403년) 전까지로 따지면 35대 598년.

흔히 말하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진나라(秦)와는 다른 나라로, 비슷한 시기에 공존했던 국가지만 보다 일찍 멸망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 춘추시대에는 강국이었으나, 말기에 (趙), (魏), (韓) 삼국으로 분할된 나라다. 이는 춘추시대는 막을 내리는 사건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이후 전국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삼국이 독립한 이후로도 진나라는 명맥 자체는 남았었지만, 극도로 작아져 곧 멸망하였다.

2 상세

이건 주나라(周) 왕실과 동성인 희(姬)성 제후로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동천 이전에 분봉 초기부터 이미 노나라(魯), 송나라(宋)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원의 대제후의 하나였다.

시조는 당숙 우로 아주 어릴 적에 주성왕소꿉놀이를 하면서 동생 희우에게 흙과 풀로 작위를 내린 걸 사관이 보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장성한 후에 빼도 박도 못하고 영지를 수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희우는 진의 시조로서 당숙우라고 부른다.

서주 시대의 기록은 많이 산일했으나, 유물에 남은 명문들을 분석해 보면 서주 중후기 주나라의 힘이 점차 쇠해가고 노나라, 제나라 등 초기 주의 주요 제후들이 이탈하는 경향을 보일 적에도 진나라는 주나라 편에 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목후가 죽자 원래는 아들 구[1]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그의 숙부 상숙이 찬탈해 버렸다. 하지만 4년 후에 상숙을 몰아내고 군주에 오른 구, 즉 문후는 자리를 찾게 된다. 문후는 서주가 망하고 동주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주 평왕을 도와 왕실을 다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진나라의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문후가 죽은 후 진나라는 본격적인 내홍을 겪고 만다. 문후의 뒤를 이은 아우 소후는 문후의 동생인 숙부 성사를 곡옥에 봉해 환숙이라고 일컫는다. 이 때의 진나라는 수도를 익 땅에 두었으므로 익나라라고 하기도 하며[2] 점점 익나라보다 곡옥에 봉해진 환숙의 곡옥이 점점 강성해진다.

이렇게 익과 곡옥으로 결국 진나라는 두 개로 분열된다. 환숙과 장백은 여러 번 익나라를 쳐 군주를 죽이기도 하고 익에 입성하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반항과 주나라의 정벌로 번번히 실패한다. 그러다 환숙의 손자이자 장백의 아들인 칭, 즉 무공때까지 오게 된다. 곡옥이 훨씬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익을 접수못한 원인은 주나라의 견제[3]와 백성들의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철저히 익을 공격한다. 결국 익을 점령하고 익에 있던 진나라의 보물을 모두 당시 주나라 이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정식으로 진나라 군주로 인증받았다. 결국 방계가 직계를 몰아냄으로서 혼란은 종식된다.[4] 춘추오패 문공(文公)의 할아버지인 무공(武公) 시절 내전을 마무리짓고 춘추시대의 초강국으로 성장할 기반을 닦았다. 진 무공 이후로는 시호를 '후'에서 '공'으로 바꿨다. 작위는 계속 후국. 춘추에서 보면 진나라 영주를 생전에는 '진후'로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뀐 위나라에 대한 사마정의 《사기색은》의 논리를 - 대개는 《사기》 위강숙세가의 주석으로 찾아볼 수 있다 - 그대로 적용하면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뀌는 것은 오히려 대우가 떨어진 것에 해당한다.

무공의 아들 헌공 때 국운이 크게 흥성하여 인접 제후국인 우와 괵을 멸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5] 후계자를 둘러싸고 공실과 조정이 사분오열하는 내란이 다시 발발, 둘째 공자 중이[6]와 셋째 공자 이오[7] 두명은 지지세력을 이끌고 국외로 망명하고, 적통의 세자 신생은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가 하면, 측실 소생의 어린 아들 혜제와 탁자가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지만 두 명이 연달아 반대파 대신의 손에 암살당하는 등 그야말로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였다.

이 혼란상은 결국 이웃한 진(秦, 2번 항목의 진나라)의 두 차례에 걸친 개입으로 간신히 수습되고, 훗날의 패자가 되는 문공, 공자 중이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후작위에 오른다. 두 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진의 공실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으나, 문공은 자신의 즉위에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봉토와 군권을 나눠주어 그 공백을 메꾸었다. 이에 내정이 안정된 진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중원의 제후국을 위협하던 초나라를 물리치고, 제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문공 이후로도 진은 중원의 최강국으로서 사실상의 패권을 행사했으나, 그 위세는 문공 시절만 못했다. 서쪽의 이웃 진(秦)나라의 진출을 경계하느라 중원의 정세에 소홀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로 봉토와 군권을 나눠받은 공신 일족들이 자기들끼리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자가 많은 권력투쟁이 늘상 그렇듯이 유력 씨족들은 자기들 중에서 제일 센놈을 조지고 보는 식으로 무력항쟁을 거듭했고,[8] 이 와중에서 공신 출신인 호씨[9] , 선씨[10], 극씨[11], 난씨[12], 순씨[13], 서씨[14], 범씨[15]등의 유력한 일족들이 몰살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특히 이 권력투쟁 초기에 망한 씨족 중 많은 수, 예를 들면 호씨, 속씨, 극씨, 난씨 등은 진 공실과 혈연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집안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왕실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좌전에 보면 숙향이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들이 대부분 다 끝장났다고 말한다. 양설씨[16] 역시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이고, 마지막에는 진나라 공실들이 다 망해가는데 양설씨만 살아남을 도리는 없고 결국은 양설씨마저도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양설씨는 지씨의 모함으로 멸족됐다.

결국 춘추시대 말 즈음엔 지씨[17], 조씨[18], 위씨[19], 한씨[20]의 네 집안이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 중에 No.2였던 조씨가 위씨와 한씨를 끌어들여 No.1인 지씨를 무너트리면서 이 기나긴 권력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21] 셋만 남은 이들 삼가(三家)는, 결국 진나라를 셋이 사이좋게 나눠갖기로 합의하고, 각자 조(趙), 위(魏), 한(韓) 삼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진나라의 삼분을 역사가들은 춘추시대전국시대의 경계가 되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왜냐면 원래는 명목상으로나마 종주국인 주의 천자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진의 편을 들어주면서, 다른 제후국을 동원해 세 가문을 깨갱시키고 진나라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질서유지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나라의 천자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원전 403년 패도로써 이루어진 진의 삼분을 승인해 버리면서 이 사건은 주의 권위가 이미 땅으로 추락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분도 필요없고 패도가 짱이다'. 이것이 바로 전국시대인 것이다.

진의 삼분 이후로도 사실 진나라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영토가 익과 곡옥의 두 도시를 다스리는게 고작인 성읍국가가 되어버렸다. 후대 사람들이 없어진거나 다름없다고 취급해버릴 정도로 망했어요. 진나라의 공은 한때는 신하였던 조, 위, 한나라의 군주들에게 문안인사나 올리고, 성 밖으로 계집질을 하러 다니다 강도에게 순삭당하는 등 끝없는 굴욕의 연속. 그렇게 100년을 더 버티다 나중에는 그 두 마을조차도 빼앗기고 멸망.

3 역대군주

3.1[22]

  • 당숙 우(唐叔 虞) - 기원전 1042년, 무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동생
  • 진후 섭(晉侯 燮) - 당숙의 아들
  • 무후 영족(武侯 寧族) - 진후의 아들
  • 성후 복인(成侯 服人) - 무후의 아들
  • 여후 복(厲侯 福) - 기원전 859년, 성후의 아들
  • 정후 의구(靖侯 宜臼) - 원전 858년 ~ 기원전 841년, 여후의 아들
  • 희후 사도(釐侯, 僖侯 司徒)[23] - 기원전 840년 ~ 기원전 823년, 정후의 아들
  • 헌후 소(獻侯 蘇[24]=穌[25])[26] - 기원전 822년 ~ 기원전 812년, 희후의 아들
  • 목후 비왕(穆侯 費王) - 기원전 811년 ~ 기원전 785년, 헌후의 아들
  • 상숙(殤叔) - 기원전 784년 ~ 기원전 781년, 목후의 동생. 찬탈 했음.
  • 문후 구(文侯 仇) -기원전 780년 ~ 기원전 746년, 목후의 아들. 상으로 몰아냄. [27]

3.2[28]

  • 소후 백(昭侯 伯) - 기원전 745년 ~ 기원전 740년, 문후의 아들, 환숙이 침공해오자 대신 반부에게 시해됨, 반부는 환숙을 군주로 삼으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백성들은 그의 아들 평을 군주로 세움
  • 효후 평(孝侯 平) - 기원전 739년 ~ 기원전 724년, 소후의 아들, 역적 반부를 죽였지만 나중에 다시 침공해온 장백에게 죽음을 당함, 그러나 이번에도 익나라 백성들은 저항했고 그의 아들을 세웠다.
  • 악후 극(鄂侯 卻) - 기원전 723년 ~ 기원전 718년, 효후의 아들
  • 애후 광(哀侯 光) - 기원전 717년 ~ 기원전 709년, 악후의 아들, 장백이 다시 공격했지만 주나라 평왕의 정벌로 실패로 끝남, 그러나 다음에 또 쳐들어온 무공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이번에도(또!) 백성들의 저항으로 실패함, 나중에 아들 소자후가 즉위하자 곡옥에서 죽음을 당함
  • 소자후(小子侯)[29] - 기원전 708년 ~ 기원전 705년, 애후의 아들, 평화협상을 하자는 무공의 말에 속아 곡옥에 갔다가 죽음을 당함, 이 때 주나라 환왕은 곡옥을 쳤지만 실패함
  • 진후 민(晉侯 緡)[30] - 기원전 704년 ~ 기원전 678년, 애후의 동생으로 소자후의 숙부, 무공에 의해 익이 점령되고 살해됨.

진악후 빼곤 다 남의손에 죽음 안습

3.3 곡옥[31]

  • 환숙 성사(桓叔 成師) - 기원전 744년 ~ 기원전 731년, 문후의 동생으로 소후의 숙부
  • 장백 선(荘伯 鱓) - 기원전 730년 ~ 기원전 716년, 환숙의 아들
  • 무공 칭(武公 稱)[32] - 기원전 715년 ~ 기원전 677년, 장백의 아들, 익을 멸하고 익으로 천도, 주나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고 공작으로 승진함

3.4 통일 이후[33]

  • 무공 칭(武公 稱) - 위와 동일
  • 헌공 궤제(獻公 詭諸) - 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1년, 무공의 아들
  • 해제(奚薺)[34] - 기원전 651, 헌공과 여희의 아들, 이극에게 암살
  • 도자(悼子) - 위와 동일, 헌공과 여희의 동생의 아들, 이극에게 암살
  • 혜공 이오(恵公 夷吾) - 기원전 650년 ~ 기원전 637년, 헌공의 아들이자 해제와 도자의 이복형
  • 회공 어(懷公 圉) - 기원전 637년, 혜공의 아들[35]
  • 문공 중이(文公 重耳) -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 헌공의 아들로 혜공의 동복형이자 회공의 백부, 춘추오패 중 한 명.
  • 양공 환(襄公 歡) - 기원전 627년 ~ 기원전 621년, 문공의 아들. 진헌공 때 이미 태어나 있었다. 진문공이 망명을 할 때 그의 재산을 빼돌려 달아났던 이두수가 아버지를 잃은 진양공과 그의 여동생 백희를 키웠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 영공 이고(靈公 夷皋) -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7년, 양공의 아들, 10살도 안되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다가 20살이 넘자 포악한 정치를 하다가 재상 조순의 사촌동생 조천에게 암살 당함[36]
  • 성공 흑둔 (成公 黑臀) - 기원전 606년 ~ 기원전 600년, 양공의 아우이자 영공의 숙부
  • 경공 거(景公 據) - 기원전 599년 ~ 기원전 581년, 성공의 아들. 변소에 빠져 죽었다[37]
  • 여공 수만(厲公 壽曼) - 기원전 580년 ~ 기원전 573년, 경공의 아들, 난서와 순언에게 피살.
  • 도공 주(悼公 周) - 기원전 572년 ~ 기원전 558년, 양공의 손자[38]로 여공의 당숙, 여전히 강국이었으나 이 때부터 군주보다 육경의 세력이 강해짐. 그래도 진도공은 총명하였기 때문에 나름 군주로써의 세력을 휘두름.
  • 평공 표(平公 彪) - 기원전 557년 ~ 기원전 532년, 도공의 아들,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으나, 점점 유흥에 빠져 누각과 연못을 만드는 때 예산을 낭비하다 귀신을 부르는 짓까지 하다가 귀신이 보인다며 앓다가 죽음.
  • 소공 이(昭公 夷) - 기원전 531년 ~ 기원전 526년, 평공의 아들. 실질적으로 실권을 가진 마지막 군주.
  • 경공 기질(頃公 棄疾) - 기원전 525년 ~ 기원전 512년, 소공의 아들. 진평공이 죽을 때 나이가 40살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아들 진소공이 재위 6년만에 죽었으므로 진경공의 재위 당시 나이는 10살 미만으로 추정. 실제로 이 군주 때부터 진나라 군주의 실권이 왼전히 소멸되었다.
  • 정공 오(定公 午) - 기원전 511년 ~ 기원전 475년, 경공의 아들, 기원전 497년이 되자 지씨의 당주인 지백 요의 주도로 (韓), (魏), (趙)의 당주들과 함께 범씨와 중항(순)씨의 영토를 분할해 차지해 버리고 육경 중에 네 가문이 남음
  • 출공 착(出公 鑿) - 기원전 474년 ~ 기원전 452년, 정공의 아들, 기원전 457년 지백 요는 한(韓), 위(魏), 조(趙)의 당주에게 영토를 나누어 달라는 제의를 했는데 조의 당주였던 조양자가 거절함, 결국 지백은 그를 치기 위해 한의 당주 한강자(한호)와 위의 당주 위환자(위구)와 함께 조양자(조무휼)를 쳤으나, 한과 위의 배반으로 사로잡혀 죽음을 당함, 이렇게 육경은 조, 위, 한 세 가문만 남고 지백의 영토를 삼분화 함, 출공은 이들 세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나라 권신들이었던 삼환 가문의 당주들과 나라 권신 전씨 가문 당주에게 밀서를 보냈지만 오히려 그것을 육경에게 알리는 바람에 쫒겨남. [39][40] 생각해보면 군주(공)를 위협하는 유력가문들을 잡기 위해 다른 나라의 군주를 위협하는 유력가문들을 끌어들인 자체가 병크.
  • 애공 교(哀公 驕)[41] - 기원전 451년 ~ 기원전 434년, 소공의 증손[42]으로 출공의 먼 친척 동생, 출공을 몰아낸 육경이 옹립함.
  • 유공 유(幽公 柳) - 기원전 433년 ~ 기원전 416년, 애공의 아들, 세 가문에게 수도 강[43]과 곡옥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당하고 세 가문은 영토를 삼분화 함, 밤마다 부녀자들과 놀아나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함[44], 이미 사실상 진은 멸망한 상태였음
  • 열공 지(烈公 止) - 기원전 415년 ~ 기원전 389년, 유공의 아들, 기원전 403년에 조, 위, 한 세 가문이 주나라 위열왕에 의해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음, 군주인 열공이 한 때 신하였던 이들에게 문안을 드릴 정도였음
  • 효공 기(孝公 頎)[45] - 기원전 388년 ~ 기원전 357년, 열공의 아들, 곡옥을 잃음으로서 거의 진나라의 멸망이 기정사실화 됨
  • 정공 구주(靜公 俱酒) -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49년, 남은 강 땅마저 회수당하고 조, 위, 한의 의해 평민으로 강등당함, 진나라 멸망
  1.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목후가 크게 될 이름을 둘째에게 주고, 평범한 이름을 큰아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둘째가 첫째를 몰아내려 할 것이라고 예언할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후에 구의 후손인 민후는 성사의 후손인 무공에게 죽음을 당하고 왕위도 뺏긴다.
  2. 원래 당숙이 봉해진 곳은 임금의 후손을 봉한 당나라를 멸한 곳이므로 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3. 천하의 질서를 위해서 천자가 존재하니..
  4. 나중에 무공의 아들 헌공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다시 내전을 일으키게 된 것은 업보라고 한다.
  5. 순망치한의 고사가 우와 괵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6. 후일 진문공
  7. 후일 진혜공
  8. 공교롭게도 700여 년 뒤 같은 한자를 쓰는 나라비슷한 형태로 내전을 벌이는 국가 막장 테크를 시전했다. 여기는 골육상쟁이었다는 게 더 충공깽.
  9. 적족 혼혈인 호언, 호모의 자손. 호언의 아들 호역고와 속국거가 조쇠의 아들 조순과 권력투쟁을 하다 살인을 저지른 속국거의 사형으로 나머지 일족들은 모두 적족으로 망명하였다.
  10. 선진의 후손. 선진의 손자 선곡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나라를 팔려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하여 몰락하였다.
  11. 극곡의 후손. 진여공 때 극주, 극기, 극지가 3극이라 불리며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관료들에 의하여 3극은 사형당하고 나머지는 세력을 잃음. 이때 극씨 멸족을 주도한 서동은 또다른 공신의 후손이었다.
  12. 난지의 후손. 난염이 포악하여 가문을 멸문 직전까지 보냈다. 그 아들 난영은 덕이 높아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귀족들 사이의 민심은 그들을 떠나서 제나라로 망명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난씨를 유일하게 도와주던 위씨가 조씨의 협박에 의하여 그들 반대편에 서서 패하고 송니라로 망명한 난방을 제외하고 모두 사형.
  13. 순임보의 후손. 순임보가 중항대부를 지내서 중항씨와 순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당주 순인이 욕심부리다 다른 귀족가문의 반발을 사서 제나라로 망명
  14. 서신의 후손. 마지막 당주 서동은 아버지가 극씨 일가에 의하여 재상에서 쫓겨나자 진여공에게 아첨하는 간신이 되어 3극을 모두 죽임으로써 극씨에게 복수하였으나, 난씨와 순씨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가문도 몰락하였다.
  15. 사회의 후손. 사회가 범 땅을 받아서 범씨와 사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당주 범길사가 순인과 같이 귀족들의 투쟁에 밀려 제나라로 망명
  16. 숙향의 씨가 양설씨
  17. 순임보의 동생 순수의 후손. 순수가 지 땅을 받아 지씨와 순씨를 병용했다.
  18. 조쇠의 후손
  19. 위주의 후손
  20. 한간의 후손.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한간의 손자 한궐의 후손으로 더 유명하다.
  21. 여기서 예양의 이야기가 나왔다.
  22. 당나라, 즉 진나라 초기. 기원전 1042 ~ 기원전 746 (11대 296년)
  23. 시호로 釐는 僖와 같은 글자로 쓰이기 때문에 보통의 음인 '리'가 아니라 僖와 마찬가지로 '희'로 읽는다.
  24. 세본.
  25. 북조 진후묘 유적.
  26. 사기 본문에 남아 널리 알려진 적(籍)은 蘇와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27. 목후는 뒤를 이을 태자였던 문후의 이름보다 그의 동생인 환숙의 더 후하게 지었다. 신하 중에서 이를 보고 한탄하기도 했는데 구는 원수를 뜻하고 성사는 일이 잘될 것을 뜻하니 성사의 후손이 장차 구의 후손을 대신해 진나라를 다스릴 거라고 예언했다. 결과는 적중했다.
  28. 내전기. 문후의 아들 소후를 시조로 하는 진나라 직계 자손. 기원전 745 ~ 기원전 678 (6대 67년)
  29. 이름은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30. 시호가 없다.
  31. 내전기. 문후의 동생 환숙을 시조로 하는 진나라 방계 자손. 기원전 744~기원전 678. (3대 66년)
  32. 아래의 무공과 동일 인물
  33. 기원전 677~ 기원전 349. 20대 328년. 삼진이 제후로 인정받은 기원전 403년까지로 치면 18대 274년. 출공이 죽은 452년으로 치면 225년.
  34. 해제, 도자 모두 시호가 없다.
  35. 회공의 이름 어는 마굿간지기라는 뜻인데 원래 혜공이 망명 시절에 양나라에서 회공을 낳았다. 이때 그의 장인인 양나라 군주 양백이 외손자의 운명이 남의 신하가 될 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36. 사실 조순은 이것을 걱정하여 진양공의 동생을 왕으로 모시려 했으나 진양공의 부인 목영의 1인시위로 인하여 민심이 진영공에게 몰려 어쩔수 없이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37. 진짜다! 심지어 고사성어 병입고황의 유래가 되었다. 안습
  38. 정확히는 양공의 아들인 혜백 담의 아들
  39. 애초에 제나라 전씨는 제나라를 찬탈하려고 했기에 명분을 위해서 육경에게 말한 것 같다. 전씨는 후에 결국 찬탈한다.
  40. 살해당했다는 말도 있다.
  41. 또는 의공(懿公), 경공(敬公)
  42. 할아버지는 소공의 아들 대자 옹, 아버지는 공손 기
  43. 과거의 익
  44. 당시 위씨 가문 당주 위문후가 고용한 암살자라고 함
  45. 또는 환공(桓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