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비젠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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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유태인 학살자 추모무덤에 네오 나치가 비웃듯이 하켄크로이츠 문장을 낙서한 것에 분노한 사진.

Simon Wiesenthal
שִׁמְעוֹן וִיזנְטל

1908년12월31일~2005년 9월 20일

이스라엘의 유명한 나치 헌터. 남미로 도주한 수많은 나치 잔당 전범들을 체포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본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생으로 건축공학 기술자를 하다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후 나치 전범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시작 전에는 건축가를 꿈꾸었으나 홀로코스트에 끌려간 후, 자신의 친척 89 명이 홀로코스트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만이 살아남아 1945년 5월에 미군에 의해 마우토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겨우 해방되었다.

전 후 나치 전범들은 반공국가인 브라질, 칠레 등 남미 국가와 이집트, 시리아 등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도망쳤었다. 이들 나치 전범들을 잡기 위해 비엔나에 본사를 둔 유대인 박해 기록 센터에 들어간 비젠탈은 적극적인 행동력과 첩보망을 활용하여 도주한 나치 전범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 안네 프랑크를 강제 수용소로 보냈었던 게슈타포 - 카를 요제프 질버바워(Karl Josef Silberbauer)
  • 소비보르 강제 수용소의 간수 - 구스타프 바그너(Gustav Wagner)[1]
  • 아돌프 아이히만 (이스라엘 첩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1962년 체포)
  • 마르틴 보어만 (종전시 음독자살한 걸로 알려졌지만 음모론 때문에 계속 추적)
  • 요제프 멩겔레 (아이히만을 잡을 당시 똑같이 아르헨티나에 있었지만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국외로 납치하는데에만도 힘에 겨웠기 때문에 놔둘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 멩겔레는 아이히만 체포 뉴스를 듣고 달아나 버렸다. 이후 브라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1979년, DNA 확인함)

그의 영항 아래 1977년 미국 LA에 시몬 비젠탈 센터가 발족되었고, 이 시설의 모토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풍화시키지 않는 시설'이다. 이 박물관은 현재의 센터로 개명하였고, 시몬 비젠탈이 타계한 2005년 이후로도 건재하다. 다만 이 조직의 운영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2003년 4월 시몬 비젠탈은 은퇴를 발표했다. "살아있는 모든 전범들을 찾아냈다. 설령 아직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어 재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일은 끝났다" 이 당시엔 알로이스 브루너 만이 그의 추적 대상이었다. [2]

은퇴 후 2004년 대영제국 훈장 명예 2등급(honorary KBE)을 받았고, 2005년에는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후 같은 해 자택에서 향년 96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때까지 그는 1100여명의 나치 전범을 사로잡았다.

타국의 나치옹호 발언에도 관심을 놓치지 않는 듯 하며 과거 일본 극우 잡지인 마르코 폴로홀로코스트 날조론 기사를 게재하자 미국 내 유태인 단체에게 알리며 같이 압력을 가해 데꿀멍시켜 해당 잡지를 퇴갤시킨 적이 있다.

아소 다로의 나치 드립에도 항의를 했지만... 일본이 씹었다(...).과연 노답 아소

다만 모사드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엄연한 주권국가들에서 사법체계고 뭐고 깡그리 개무시하고 납치 및 사법행위를 벌이는 게 옳냐는 비판도 있다.
  1. 1987년 TV영화 소비보 탈출(Escape From Sobibor)에서는 유태인 재소자에게 칼에 맞아 죽는 것으로 각색되었지만 실제로는 달아나서 브라질에서 숨어살다가 시몬 비젠탈의 추적으로 정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유서로 네놈이 나를 재판에 세워두고 싶었겠지만 내 목숨은 내 것이다. 그리고 네놈도 결국 많은 나치 동료들을 다 잡지못하고 죽을테니 기다리겠다고 비웃는 글과 같이 1980년 음독 자살했다. 실제로 비젠탈은 이런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고 한다.
  2. 이 당시 브루너는 시리아 정부의 비호를 받아서 첩보 교육을 했다고 하며, 이스라엘 모사드에서 그를 암살하기 위해 1961,1980년에 걸쳐 폭탄 편지를 두번 보내 한 눈과 손가락 1개를 잃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었다. 1985년에 사진을 찍으면서 유태인이 죽이려고 해도 못 이뤄서 야훼에게 징징거린다라고 비웃듯이 글을 써서 해외로 퍼뜨리는 배짱을 과시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그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시리아 정부에서 듣는 척도 안하고 그게 누구냐? 라고 무시하면서 국빈으로 우대했고 결국 2014년 12월 1일 외신 보도로 그는 2010년 시리아에서 천수를 누리고 88세로 사망했다고 보도됐다.연합뉴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