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미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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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게르만의 영웅으로, 독일에서는 게르만의 해방자라고 하며 그를 존경한다.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로마식으로 표기된 이름이며, 언어에 따라 아르민(Armin)또는 헤르만(Hermann)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체루스키족의 족장인 세기메루스의 아들로 어렸을 때 로마군에 입대하여 로마 시민권을 얻어 하급귀족으로 기사계급인 에퀴타스에 올랐으며 그 때에 들어서 로마군의 전술을 터득하고 또한 로마군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했으며 이후 게르마니아로 돌아오게 된다.

그 자신은 게르만족의 왕국을 세워 왕이 될 야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가 게르만족의 왕이 될것을 두려워한 친척들과 대립하였다.

로마는 게르마니아에 지배권을 행사하여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 연안까지 속주화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 아우구스투스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를 총독으로 파견하게 된다. 문제는 게르마니아의 사정에 어둡던 바루스가 금이 부족하였던 게르만족들의 형편을 무시하고 예전에 자신이 먼저 부임했던 속주들에서 하던대로 세금을 금으로만 거두어 들이거나 로마의 민족우월주의 등을 내세워 게르만족의 정서와 문화를 무시하는 등, 게르마니아를 무리하고 성급하게 속주화하려고 시도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 밑에 있을 당시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모든 능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신임받기까지 했으나 바루스는 그에게 치안관 이상의 직책이나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자신이 홀대 받음과 동시에 소외되었다고 생각한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와 협력하는 대가로 힘을 빌려 게르만족의 왕이 되려했던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수정하여 자신을 따르는 여러 게르만족 부족들을 연합하여 기원후 9년에 봉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봉기를 주도한 사실을 숨기고 바루스를 전장으로 꾀어내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로마의 3개 군단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낸다.

그로부터 5년 뒤인 기원후 14년에는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그의 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지만,[1] 16년에는 로마군을 세차례나 상대하여 모두 큰 손실을 입히는데 성공하여 결국 로마는 게르마니아 속주화를 포기하고 군을 철수시키게 된다.

로마군이 철수한 이후 마르코마니족의 왕인 마로코두스와 전쟁을 벌여 그의 군대를 퇴각시키지만 보헤미아를 탈취하는 데에는 실패였고, 아르미니우스가 게르만족의 왕이 될것을 두려워한 자신의 친척들에 의해 결국 21년에 살해 당하게 된다. 살해한 방법에 대해서는 독살이라는 설과 자객의 칼에 찔려죽었다는 설이 있다.

아내 투스넬다는 이후 로마에 포로로 잡혀 로마로 끌려갔고, 거기서 아들 투멜리쿠스를 낳았다.
  1. 이 전투는 개활지에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