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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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us Quinctilius Varus (기원전 46년 ~ 기원후 9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인이자 군인. 그리고 역사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로 바루스 본인은 물론이고 무려 3개 군단을 대차게 말아먹은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바루스의 아버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반대하는 정치인이었으며,카이사르의 암살에도 어느 정도 관여를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아들인 바루스는 시저의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였다. 특히 아그리파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 옥타비아누스 세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역시 어느 세상이건 연줄이 킹왕짱
바루스는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총독을 역임하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특히 시리아 총독 시절에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며, 반란군 2000명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학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와 바루스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 몇 년을 지내다가 게르마니아의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이는 아우구스투스 최악의 인사로 기록되었다.
사실 당시 게르마니아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1]가 여러차례 정복사업을 펼쳐서 대다수의 게르만족 일파들이 복속을 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평정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가 평정됐다고 간주하고 당시 게르마니아에서 활약하던(군사 작전을 출중하게 수행하던) 티베리우스를 발칸 반도의 반란진압에 파견하고, 그 후임으로 바루스를 밀어넣었던 것. 문제는 바루스가 군인관료라기보다는 행정관료라는 점이었다. 유대인 반란토벌에서 나름 활약은 하였지만, 사실 바루스는 군사적인 재능이 없었다.

유능한 행정관료답게(?) 바루스는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대화와 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입장에서 게르만족의 로마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때문에 로마가 기존 게르만족 족장들을 모두 내쫓고 직접 다스리려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그 때문에 족장들은 점점 바루스의 통치방식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가 바루스는 시리아 총독을 역임하던 시절처럼 게르만족에게 금과 귀금속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하였다.[2]문제는 게르마니아 지역은 금과 귀금속이 나올만한 건덕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세금에 큰 부담을 느낀 게르만족의 불만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3]. 결국 이러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게르마니아에서 반란이 터지게 되고, 바루스는 총독이자 게르마니아 지방의 로마군 총사령관으로써 17, 18, 19군단을 이끌고 반란진압에 나선다.

철썩같이 믿었던 게르만족 출신 아르미니우스에게 발등을 찍히면서 토이토부르크 숲으로 유인당하였다.[4] 그리고 그 유명한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벌어졌고 로마군은 참패했다. 애초에 로마군은 개활지 전투와 참호구축을 통한 방어전에 능하였으나 빽빽한 숲과 늪지대로 유인당한데다가 적군에게 완벽하게 기습당한 상태인데 그런게 될리가 있나.

결국 로마 군단 3개, 2만명의 병력을 깔끔하게 말아먹고 본인과 가족들은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로마군단을 몰살시킨 게르만족은 한술 더 떠서 로마군과 함께 게르만 땅에 발을 들였던 로마인들의 처자식들도 잡아 죽였다. 이때 살해당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에서 내장을 꺼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장을 나무에 주렁주렁 걸어 놓았고 시체는 나무 밑에 버려두었다고도 한다. 사로잡힌 로마 군인들 역시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며 무수히 많은 머리가 잘려나가 숲 속 이곳 저곳에 메달렸다. 복수를 위해 뒤늦게 달려온 로마 군대도 이 처참한 광경을 보고 나서 모조리 전의를 상실해버렸다고 하니 심히 흠좀무하다.

여담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이 참패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옷을 찢고 머리도 깎지 않으며 이후 몇 달간 이따금씩 기둥에 머리를 박으면서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Quintili Vare, legiones redde!)라고 울부짖었다는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5]이 남아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 자리를 이어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국경을 엘베 강으로 확장시키지 않고 라인 강 전선에 고정시킴으로서 향후 300년간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1. 참고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재혼녀였던 아내 리비아와 그 전남편의 아들들.
  2. 얼마나 병크냐 하면 시리아는 페니키아때부터 셀레우코스조를 거치며 번성해온 유서깊은 로마 동방 중심이자 돈줄(제정 세기말에 도달하면 군단병들이 시리아로 가면 황금이 산더미인줄 안다)이었지만 게르만은 로마와 교류는 있었지만 말 그대로 야만족. 비유하자면 백제가 곡창인 전라도 수준의 조세를 제주도에 똑같이 요구하는 격
  3. 조세량 자체의 부담보다도, 장기간에 걸쳐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던 시리아에서는 금속 화폐가 흔하게 유통되었던 것과는 달리 부족 중심의 사회인 게르마니아 지방의 경제는 귀금속 화폐가 아닌 현물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바루스가 요구하는 대로 금 등의 귀금속으로 세금을 내려면 내부의 생산물을 외부에 내다 팔아서 귀금속 화폐를 구해올 수 밖에 없는데... 1) 이 경우, 현물을 내다 팔아 귀금속을 마련하고, 그것을 다시 세금으로 내야 하니 단순히 계산해도 조세 부담이 두배쯤 폭증하게 될 것이고 2) 공업과 상업이 덜 발달했던 게르만족의 입장에서 외부에 내다 팔아 귀금속과 바꿀 수 있는 생산물이 대체 뭐가 있겠는가? 식량이나 미가공 상태의 천연자원 정도밖에 없는데... 이런 품목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큰 이익을 내기 힘든 교역품이지만 운송/교역기술의 부족으로 원거리 교역의 주축을 주로 사치품이 차지하던 시대에는 더욱 교역하기 어려운 품목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부족 구성원을 노예로 파는 정도 뿐이다. 결국, 귀금속으로 세금을 내라는 바루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게르만족 입장에서는 가족들을 노예로 내다 파는 수 밖에 없었다는 것.
  4. 아르미니우스의 친척들은 등 뒤에서 칼을 꽂을 색히니 믿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으나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를 철썩같이 믿고 그 말을 무시해버렸다.
  5. 당시 로마는 28개 군단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 3개가 한번에 공중분해됐다. 그리고 이것을 복구하는데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200년 가량 걸렸다고 한다. 물론 이는 로마의 국력을 고려해 봤을 때 실없는 주장이다. 수십 년 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로마의 권좌를 두고 싸웠을 때에는 무려 50개 이상의 군단이 존재했었다. 단지 정치력이 뛰어났던 아우구스투스가 쓸데없이 군단을 늘려 국방비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3개 군단의 복원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분노한 것은 이 전투 이후 게르만족은 로마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