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토부르크 전투

1 개요

로마 제국게르만족이 벌인 전투.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라고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몇 안되는 계란으로 바위부순 성공사례[1]

본 명칭은 Teutoburg, 즉 테우토부르그. 라틴어로는 Teutoburgiensis saltus(테우토부르그 숲)이라 하며, 로마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바루스의 재앙(Clades Variana)이라고 불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하면서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현대 독일어로는 'Varusschlacht'(바루스 전투)라는 의외로 중립적인 명칭을 쓴다. 물론 'Schlacht im Teutoburger Wald(테우토부르크 숲의 전투)'도 통용되고 과거에는 'Hermannsschlacht'(헤르만 전투)라는 명칭도 썼지만 다들 알다시피 현재 독일은 주변국 문제에 꽤 민감하기 때문에(...) 고대사에 대해서조차 조심스럽게 다가서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2 전투 배경

원래 로마군은 게르만족 정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게르마니아의 지나칠 정도로 울창한 숲과 게르만족의 호전성 때문에 큰 피해가 날 것을 우려해 게르마니아 침공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마저도 로마 제국의 일부로 만들려 했으며 기원전 9년 로마의 2대 황제가 될 그의 양자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를 보내 게르마니아를 정벌하라고 명령한다.

도중에 드루수스가 죽어 10년간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고 이후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활약으로 서기 5년 즈음에는 게르마니아의 대부분은 로마군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여전히 게르마니아는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가 안정되었다고 판단, 행정관료인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를 총독으로 임명하는 병크를 저지른다.[2] 이때 아르미니우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서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하면서 기사 계급까지 오를 정도로 잘 적응했고, 로마군에 오랫동안 종군한 경력 덕분에 누가 봐도 친로마 게르만 귀족이었다.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신임이 대단하였는데, 아르미니우스의 능력, 로마에 대한 충성도, 그리고 그가 바루스가 맡은 지역을 훤히 알고 있는 지역 부족의 유력 귀족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 대해 저항의지로 가득했고, 바루스 몰래 반로마 조직을 구성하려 애썼다.

일설에는 바루스 휘하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던 아르미니우스였지만 바루스는 그를 지휘관 같은 중책보다 도시 치안관 정도로 생각해 한편에서는 홀대하여 아르미니우스가 소외감을 느껴왔던 것도 부분적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아르미니우스를 확실히 신임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권을 다 주기에는 약간 경계해야 할 필요도 있지 않나 하는 식으로 약간 견제차원에서 중책을 안 맡긴 것 아닌가 했다는 말이다(현대에도 재능이 뛰어나고 확실히 검증도 되었는데 선배니 파벌이니 승진순서니 해서 제대로 대우 안해주는 부당한 인사조치가 많다는걸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바루스는 어느날 로마에 복속된 한 작은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이런 것을 가만히 둬선 안된다며 바루스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바루스는 친히 휘하의 모든 군단병력을 이끌고 출진하기로 결정한다. 작은 마을의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자기 휘하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희한한 결정을 왜 내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바루스는 이들을 데리고 출동했다. 이날밤 사촌인 투스넬다와의 결혼 문제로 아르미니우스와 사이가 나빠졌던 장인 세게스테스가 이 모든 게 함정이며, 그가 사실 반로마 게르만 연합의 수괴라는 사실까지 폭로하며 말린다. 그러나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를 크게 신뢰하고 있어서 이를 모함이라고 생각하며 듣지 않았다.

3 함정이다

주변 지리에 어두운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게 길 안내를 맡겼고,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을 게르만족이 잔뜩 매복하고 있던 토이토부르크 숲 속으로 안내한다.

아르미니우스는 토이토부르크 숲에 로마군을 안내한 후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지원을 오겠다며 로마군을 이탈했고 잠시 후 자신의 부하들로 로마군을 공격했다. 20km에 달하는 긴 행군대열을 이루고 있던 로마군은 갑작스러운 게르만족의 기습에 노출되었다. 게르만족은 우선 투창을 계속 던져 로마군에 피해를 주고 충분히 약해졌다고 생각하자 곧 내려와 로마군과 전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로마군은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도 게르만족의 공격을 물리친다. 그 뒤 숙영지를 짓고 그날 밤을 보낸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미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온 상태였고 앞으로 틀림없이 게르만족이 숨어 우글거리고 있을 빽빽한 숲을 계속해서 뚫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일 로마군의 지휘관이 뛰어난 장군이거나 혹은 지역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런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바루스는 쭉 행정관료로만 일했고, 지리에도 밝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로마군이 주둔지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자 또다시 게르만족이 공격을 시작했다. 로마군은 다시 이 공격을 물리쳤으나 울창한 숲이 로마군이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없게 만들어 오직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전투를 거듭할 때마다 로마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갔다. 이 전투에서도 로마군이 입은 피해가 꽤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오직 주둔지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 조급해 했다. 이러한 조급함에 로마군은 아르미니우스가 예상한 길로만 행군했고, 덕분에 아르미니우스는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힐 수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탁 트인 언덕으로 오른 로마군이 다시 다른 숲으로 진입할 때를 즈음하여 비가 내렸다. 습기에 취약한 활과 화살이 무력화되었고, 갑옷도 무거워져 병사들의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다시 밤이 찾아왔지만 바루스는 이번에는 숙영지를 마련하는 대신 야간행군을 강행해 빠르게 숲을 돌파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가 이미 숲에서 빠져나갈 언덕 사이의 외길을 커다란 담벼락을 쌓아 봉쇄하고 양쪽 언덕에 병력을 숨겨두고 있었다. 조급함에 사로잡힌 바루스는 그대로 아르미니우스의 함정에 병력을 밀어넣었고, 그 순간 후방에서 나타난 게르만족 병력이 로마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언덕 사이에 갇힌 로마군을 향해 돌무더기를 쏟아부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피로에 절은 로마군은 처절하게 저항하며 담벼락을 뚫어보려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혼란에 빠진 로마군 장교들은 혼란을 수습하긴 커녕 자신들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부사령관인 기병대장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다 붙잡혀 살해당했고, 바루스의 부관들도 땅바닥에 칼을 꽂고 그 위에 엎어지며 자결한다. 지휘부가 붕괴되자 남은 로마군도 모조리 죽거나 생포당했다. 이 전투 끝에 17, 18, 19 세개 군단 병력이 전멸해 버린다.

로마군 주력이 모조리 사라지자 게르만족은 무주공산이 된 로마군 주둔지를 급습하기 시작했다. 주둔지에 남은 로마군은 급히 집결해 2개 군단 정도의 병력을 편성해 몇주에 걸쳐 방어전을 벌였으나 결국 주둔지를 버리고 라인강 근처로 달아나 간신히 한숨을 돌리게 된다.

4 참패의 결말

이 토이토부르크 전투는 로마군 최악의 패전이라 부를 만했다. 총사령관 바루스가 전사(자살)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3개 군단, 2만의 로마군이 말 그대로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병력공백으로 인해 20년에 걸쳐서 점령하고 다스리던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 영토를 모두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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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부분이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상실한 영역

게르마니아 원정의 최종목표지였던 엘베강까지 1/2 정도 이른 영토가 한순간에 다 날아간 것이었다. 게르만 영토를 상실하며 갈리아 지방은 물론 로마까지도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아우구스투스는 급히 티베리우스를 보내 게르만족을 막게 했다.

그리고 6년 후,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오른 해에 게르마니쿠스의 로마군이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로마군은 수많은 전공을 세우나 이미 로마와 게르만족이 공존했던 과거로 돌아가긴 힘들었다. 로마는 게르만족이 3개 군단을 비참하게 전멸시킨 것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고 게르만족은 그들대로 게르마니쿠스가 마르시족이 축제를 하며 잠이 든 틈을 타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수많은 게르만족의 마을을 파괴한 것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게르마니쿠스는 그 뒤 이다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군대를 격파해 어느정도 설욕하였다.[3]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영토확장은 이미 불가능하여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군을 라인강 서쪽으로 모두 철수시킨 뒤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함으로써 군사활동을 완전히 중지한다. 이렇게 티베리우스 이후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로마와 게르만의 북방 국경은 라인 강이 되었다.

5 뒷이야기

당시 이미 노년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이 전투로 큰 충격을 받아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절규하면서 벽에 스스로의 머리를 찧으며 자해를 할 정도로 자책했고 죽을 때도 그거 내 잘못 아니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는 후에 게르만족간 권력다툼으로 암살당했다(…).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아르미니우스가 숲길을 가다 숨어있던 반대파 자객의 단검에 찔려 죽는푹찍 장면이 나온다.

게르마니쿠스는 군사활동 중 토이토부르크 숲에 가서 로마군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이때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도 그들과 동행하였는데, 타키투스는 로마군의 해골이 나무에 수도없이 박혀있었는데 이는 사로잡은 로마군을 산채로 나무에 꽂아 죽인 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수많은 제단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게르만족이 로마군들을 제물로 제사의식을 치르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여기서 제물로 쓰인 로마군은 로마군에서도 특히 지위가 높은 장교나 혹은 1대대 출신 병사들뿐이었는데, 이는 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 병사들이 누군지까지 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이 토이토부르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이들은 게르만족이 몸값을 받고 풀어준 아주 극소수의 행운아들이었다) 이들은 이 지역을 안내하면서 어디서 바루스와 장교들이 자살했는지, 어디서 그들의 군단기가 쓰러졌는지, 아르미니우스가 어떻게 군단기를 모욕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장교들을 짐승처럼 제물로 바쳤는지를 상세히 묘사했다고 하였다.

이후 로마 17,18,19군단은 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다시는 편성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이 패배를 얼마나 수치스럽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6 의의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인하여 로마제국은 게르마니아 지역의 경략을 포기하게 되고 게르만족들은 로마의 직접 통치에게서 벗어나 게르만 고유의 특색을 보존하게 된다. 게르만의 반격을 막아내어 만약에 로마의 게르만 통치가 지속되었더라면 히스파니아(스페인,포르투갈),갈리아(프랑스)게르만족 역시 로마화되었을 것이고 게르마니아(독일) 역시 라틴어, 그리고 로마 이후 로망스어권이 되는 등 라틴권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게르만족이 로마를 멸망시켜 중세시대의 중추세력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본다보면 서구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던 역사적 전투 중의 하나

7 기타

이 전투를 모티브로 박카스 스타리그 2008에서 악령의 숲이라는 맵[4]을 공식맵으로 하였으나 러시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가 유닛이 끼이는 사태가 벌어져 중간에 퇴출했다.

토탈 워: 로마2에서 역사적 전투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제작진이 바루스 까인지, 바루스가 군대를 버리고 도주하다가 아르마니우스에게 붙잡혀 애걸하다가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는 자살했는데 안습.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 잘 구현되어 있지만, 목적이 도주인 전투로 역사적 전투중에선 쉬운 편이다.
  1. 당시 로마군은 지중해를 자기 호수로 만들고 북아프리카와 남,서유럽의 지배자이고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성공적인 군제 개혁과 함께 수 많은 실전을 치러온 군대인데다 로마라는 나라 자체가 하나의 중앙집권국가이다. 반면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진 데다 훈련량과 실전투입량또한 많이 떨어지고(이들은 기껏해야 자신과 비슷한 세를 가진 부족과 전쟁을 벌이거나 로마 제국의 영토를 약탈하는 정도인 반면 로마군은 지중해에서 한 가닥한다는 나라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어서 승리하여 통치하던 나라다.) 이런 열세를 감안할 때 비록 아군의 지형과 지휘관 버프가 크고 적군의 무능을 감안해도 계란(게르만 부족)으로 바위(로마 17,18,19 군단)을 쳐서 부순데다 이후 로마 영토와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준 걸 감안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표현을 쓰고도 남는다.
  2.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갈리아를 완전히 로마의 영토로 만드는 데 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게다가 로마군의 영향에 들어간건 티베리우스가 정복한 하천의 교역 루트지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숲이 아니었다.
  3. 이 전투는 개활지에서 이루어졌다.
  4. 원래 이름은 토이토부르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