グランドプリンスホテル赤坂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목차
1 연원
원래 영친왕의 개인 저택으로, 이름은 아카사카 별궁이었다고 한다. 영친왕은 본래 메이지 덴노가 영친왕에게 직접 하사한 도리사카 저택에서 살았으나, 1929년에 이 저택을 반환하고 그 대신 궁내성으로부터 아카사카 소재 토지를 증여받아 저택을 지었다. 도쿄 시내를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장소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영친왕이 1954년 세이부 그룹 측에 매각했고, 세이부 그룹은 이 저택을 호텔로 개조해서 1955년에 영업을 시작했다.
옛 영친왕 저택인 구관 이외에 1983년에는 40층 짜리 신관이 추가되었고, 객실은 이쪽에만 설치되었으며 구관은 레스토랑과 결혼식장으로만 사용되었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 씨가 2005년에 이 신관 객실에서 사망해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매각
대한민국 정부는 이곳을 한국대사관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덕수궁, 창덕궁처럼 조선 왕실의 재산이니 국고에 속한다며 영친왕 측에게 거저 내놓으라고 했지만어디서 날로 쳐먹으려고 1950년 주일공사로 부임한 김용주 공사는 이 저택이 개인 재산임을 잘 알고 있었다. 김용주가 제안한 타협책은 재일교포들에게 성금을 걷어 영친왕에게 새 저택을 마련해 주고 건물을 양도받는 것. 다만 영친왕과 이방자 모두 자기 집을 내놓기를 꺼려했고, 궁내성과도 협의해야 할 사항이라 망설이다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1952년에 연합군 군정에서 벗어난 일본 정부가 그동안 징발해서 공짜로 쓰던 각국 대표부 건물을 회수하자 김용주의 후임으로 온 다른 공사가 다시 영친왕에게 한국 대표부로 써야겠으니 저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영친왕은 기가 막혔지만 딱 잘라 거절하지는 못하고 싯가보다 싸게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국 측에서는 들은 척도 않고 억지만 부리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과장급 회사원 월급(10만엔)도 안 되는 200달러(7만2천엔)를 주겠으니 집을 비우라고 요구했다.
당시 이 저택은 1947년부터 참의원 의장 공관으로 월 30만엔[1]에 세를 주고 있었고, 영친왕 부부는 본래 하녀가 쓰던 방에 살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아예 매입하려는 의사도 보였으나 한국 정부 때문에 팔지 않았다. 결국 협상 끝에 영친왕이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헐값인 40만 달러, 그중 선수금 20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협상이 끝났으나 한국정부는 주기로 한 돈을 한 푼도 주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계속 집을 비울 것만 종용했다. 한국 정부에게 넘기려고 참의원 공관도 내보낸 영친왕 일가는 수입이 아예 끊긴 상태에서 버티다 못해 일본인에게 4천만엔(11만 1천 달러)에 저택을 매각하게 된다.
당시 일본 정부가 메이지 덴노가 하사한 땅을 한국 정부에 넘기는 것은 곤란하다며 나섰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으나, 거래 자체를 방해한 흔적은 없을뿐더러 이 땅은 상술했듯 궁내성이 증여한 땅이지 메이지가 직접 준 땅도 아니다. 따라서 굳이 한국 정부에 양도하려던 것은 영친왕의 호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꾸준히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고 결국 일본인에게 땅이 넘어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제시한 금액이 액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던 거에 대해선, 당시 한국이 6.25 전쟁 중이던 거지 나라였던 점,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필두로 한국 정부 자체가 조선 왕족에 대해 어떠한 예우를 해줄 의사 자체가 아예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보다 조선 왕족에 대한 대우가 구린 나라
3 현재
1980년대까지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의 결혼식장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새 초특급 호텔들의 등장으로 인기를 잃었다. 2011년에 결국 문을 닫았으며, 구관은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되었지만 신관은 2012년 가을부터 2013년 6월에 걸쳐 철거되었다.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는 신공법으로 철거한다고 해서 매스컴에 보도되기도 했다.[2]
해체 당시 모습을 타임랩스로 기록한 동영상.
도호쿠 대지진 때는 피난민 수용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