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이자 항목 2의 고조부가 되는 이구(李球)에 대해서는 남연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李球

(? ~ 263)

삼국시대 촉의 장수.

이회의 조카로 우림우부독이 되어 263년에 제갈첨을 수행해 등애가 이끄는 위군을 막았는데, 전쟁터에서 명령을 받고 싸우다가 면죽에서 사망했다.

촉이 멸망하기 이전에는 우림우부독이라 황궁을 경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첨과 제갈상이 죽고 등애가 제갈첨, 제갈상 부자의 충성을 갸륵하게 여겨 둘을 합장한 뒤에 빈 틈을 노리고 면죽을 공격하자 장준, 황숭과 함께 각기 한 무리씩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지만 촉군은 적고 위군은 많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1.1 미디어 믹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촉군이 적은 것 뿐만 아니라 세력이 외로워 모두 전사했다고 서술된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에서는 장준, 황숭과 함께 일군을 이끌고 나와서 전사했다고 하면서 촉의 병사는 수도 적고 용맹도 등애를 당할 수 없어 전사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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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일러스트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9에 등장하며, 출생 년도는 227년로 설정되어 247년부터 재야 장수로 건녕에 등장한다. 아버지에 비하면 무력은 높지만 나머지 능력치와 병법은 참 우울하게 등장한다. 66/71/53/58. 분전, 제사, 배반을 가지고 있다.

2 李玖

식민지 조선의 이왕세자
이은이구일본제국 패망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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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의 인물이 이구. 그 외 왼쪽부터 영친왕,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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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에서 황제면류관곤복 차림인 이구.

영친왕이방자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대한제국황족이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올린 사시(私諡)는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세손(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世孫)이며 줄여서 회은황세손이라고도 한다.

아버지 영친왕은 고종이 살아 있을 때 '황태자'로 봉해졌지만 이구는 순종 사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황태손이 된 적이 없기에 그래서 대중들에게 '황세손'이라고 거의 불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황태손도 왕세손도 아닌 '황세손'이란 호칭부터가 엉터리.

그의 형 이진은 아직 아기였을 때 사망했고[1],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로 성장했다.[2] 태어날 때부터 그는 이왕(李王) 영친왕의 후계자로서 이왕세자(李王世子)라 불렸다.

그는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멀록(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한국명은 이주아)과 1959년 결혼한다. 유학하려고 했을 당시 이방자가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이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고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1963년 귀국해 한동안 성공을 했으나 1973년 사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고, 아내와 별거하다가 1982년에 이혼했다.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일단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구의 바람끼와, 종친들이 이구더러 멀록과 이혼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오랫동안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3] 그 후 1990년대에 일본인 무당 아리타 키누코와 혼인신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는 주로 미국 아니면 일본에서 지냈다.[4] 한국에 거주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종친들과 갈등을 겪은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 일이 있을 때 아니면 거의 한국에 오질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마지막 황태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조선 황족의 적손으로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명예총재 직책을 갖고 있었다.

2005년 7월, 과거 자신이 살던 저택을 개조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묵고 있을 때 사망했다. [5] 그런데 일본 황가에 이구의 친손이라며 대한제국 황실가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구씨는 일본 왕실로부터 약간의 연금과 생활보조비를 지급받긴 했다. 이방자를 통해서 모계로 아키히토6촌관계[6]이기도 하고.) 이들은 이구의 시신 유품 일부를 몰래 일본에 가져가기도 해 조선황실복원 관계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2008년 월간 중앙 참조)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 자식은 없다. 다만 양녀가 있다는 기록은 있다고 한다. 어쨌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사후, 회사원 이원[7]씨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이를 정식으로 인정해야 할지는 논란이 있는데, 현행 민법상 사후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동종약원에서는 생전 이구 씨가 이상협 씨를 양자로 지명하는데 동의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라 하더라도 법적 절차는 이구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니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이석씨는 황실인사들과 상의없이 종약원회장과 이구 씨가 일방적으로 이상협 씨를 양자로 지명했다는 것, 종약원 자체가 황실과 혈통상 거리가 멀다는 것 등으로 인해 이 양자 지명을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원은 이구의 후손으로서 현재 조선왕릉이나 종묘에 대한 제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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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절 예법에 따라 창덕궁에서 장례를 치르고, 홍유릉 권역으로 운구된 후에 아버지 영친왕의 묘역인 영원 인근에 마련된 조선 왕조 최후의 왕실 묘역[8] 회인원(懷仁園)에 안장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조선왕조 왕실 예법으로 거행된 마지막 '진짜 장례식'으로, 사실상 그가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직계손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무형문화재 전승 차원에서 흉내(?)를 내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 장례식으로 거행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관련기사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소설이 이구의 삶을 다룬 바 있다.[9]

덕혜옹주가 죽기전 사실상 유언장이나 다름없는 자필원고에서 조카인 이구를 보고 싶다고 언급했다.그만큼 우애가 각별했던듯 하다.
  1. 1921.8 출생~1922.5 사망.
  2. 이방자 여사 회고록에 의하면 그 사이 유산을 두번 했다고 한다.
  3. 참고로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마침 줄리아 멀록은 그녀의 삶을 소재로 다룬 영화 제작 때문에 한국에 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장례식 때 찾아왔다고 한다.
  4. 참고로 그는 줄리아 멀록 여사와 결혼하여 취득한 미국 시민권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즉, 이중국적자. 사망 당시에도 그의 품에서 미국 여권이 나왔다고 한다.
  5. 정확히 말하면 옛 이왕가저는 구관. 그가 머물다 사망한 곳은 신관.
  6. 아키히토의 어머니인 고준황후가 이방자와 사촌관계이며. 부계로는 이방자와 아키히토는 7촌이다.
  7. 의친왕의 9번째 아들 이갑(이충길)씨의 장남, 본명은 이상협.
  8. 조선의 예법상 왕과 왕비의 묘역은 능(陵), 왕의 사친(왕의 생모인 후궁)과 왕세자·왕세자빈의 묘역은 원(園)으로 칭하는데 황실이 부활하지 않는 한 '원'으로 칭할 묘역을 가질 황족은 황세손(이왕세자)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9. 최근 재건축을 위해 허문 서울 새문안교회가 이구 황태손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