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일본 제국 창덕궁 이왕
초대 이왕 이척2대 이왕 이은일본제국 패망
사시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
(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
작위영친왕(英親王) / 영왕(英王)
이은(李垠)[1]
본관전주(全州)
출생대한제국 한성 경운궁[2]
사망장소대한민국 서울 창덕궁 낙선재
장례식1970년 5월 9일
배우자자행황태자비 이씨 [3]
아버지고종태황제
어머니순헌황귀비 엄씨
생몰기간음력광무(光武)원년 정유년 9월 25일 ~ 경술년 3월 26일
양력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만 72세)
재위기간[4]음력병인년 3월 13일 ~ 정해년 9월 5일
양력1926년 4월 27일[5] ~ 1947년 10월 18일 (21년 180일)


대한제국의 역대 황태자
순종 이척의민태자 이은대한제국 멸망
식민지 조선의 이왕세자
신규 책봉이은이구


1 소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즉 순종 다음으로, 만약 경술국치가 없었거나 해방 이후 왕정복고가 되었다면, 대한제국 제 3대 황제가 될 뻔한 인물이자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이왕. 고종황제의 7남으로, 순종황제의친왕의 이복동생. 종묘에 모셔진 마지막 조선왕족.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적인 시호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6]. 가톨릭 세례명요셉.


2 호칭 관련

대한민국에서 그의 통칭은 고종이 황제가 된 후에 받은 왕호인 '영친왕'으로 굳어져 있는데, 간혹 '친왕'이 일본식 칭호이기 때문에 '친왕'에서 '친'을 뺀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부인인 이방자 여사도 생전에 '영친왕'은 잘못된 호칭이니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는 말이 있다. [7]

하지만 사실 친왕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 때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황제국의 제도이고, 대한제국도 이에 준하여 제도를 정했으므로 '~친왕'을 가리켜 틀린 호칭이라고 주장이 잘못된 셈이다. 실제로 기록상 '영왕'이라는 칭호로 부른 사례는 '영친왕'이란 칭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고 단순히 '영친왕'을 줄여 부른 것일 뿐이다. 중국 쪽 이야기를 예로 들면, 청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아들인 예친왕(睿親王)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을 줄여서 예왕(睿王)이라고 부르곤 한다. 고종실록에서도 간단히 '영왕'이라고 기록하지만[8], 대한제국 시절 왕부에서 사용하던 도장에서도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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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인장은 예서체로 '영친왕부', 오른쪽 인장은 전서체로 '영친왕부지인'(英親王府之印)이라고 새겼다. 왼쪽은 의친왕부의 인장.

또한 영친왕 본인도 스스로 '영친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영친왕이 9살 때 쓴 글에도 스스로 '영친왕'이라고 서명하였으며, 여기 찍은 도장에도 역시 '영친왕인'(英親王印)이라고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참고로 황태자로 책봉되면 그 전에 받은 왕호는 없어지므로, 굳이 따지자면 사시이긴 하지만 '의민황태자'가 영친왕보다는 좀 더 공식명칭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백과사전 등에선 일반적으로 '영친왕'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위키백과는 이 점을 신경쓴 건지 의민태자로 등재했다.

3 생애

3.1 태자 책봉과 결혼

늦둥이인 것도 있지만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 엄씨가 궁궐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이 덕분인지 문제가 있었던 이복형인 의친왕을 제치고 1907년 황태자에 택봉된다.[9][10][11] 당시 순종황제가 즉위한 상태였으니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더 정확했지만, 굳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위에선 물러났어도 실질적인 황제는 고종 자신이라는 의지의 표시 이기도 했다.[12] 당시 유학자들은 황태제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고종은 조선에서도 태종정종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할 때에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 자격으로 받았다는 전례(...)를 인용하며 황태자로 하길 고집했다. 어째 왕조의 시작과 끝이 유사하다 순종이 독차사건 등의 후유증 등으로 인해 사실상 자신의 핏줄로 후사를 잇지 못하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순종보다는 고종의 영향력이 더 컸다. 순종 행장에는 이와 관련하여 "(순종) 황제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정종(定宗)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정종(定宗)이 아우인 태종(太宗)을 세자로 책봉(冊封)한 것이 우리의 왕가의 옛 법이라고 여겨서 드디어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백성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고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을 두텁게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행장 특유의 고인을 존중하는 서술인 것으로 보이며, 영친왕이 황태제가 아닌 황태자로 책봉된 일은 사실상 고종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 결과라고 보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사실 이 황태자 책봉은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면서 일본 뜻대로만은 되지 않겠다고 세운 수였으나 국력이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으니 그해 일본인들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13] 강제로 일본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했다.[14] 보통 정략결혼인 경우 당사자들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15]

일본에 인질로 붙들려 있었을 때, 의외로 메이지 덴노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아들이 여러 가지로 모자란 면이 많은 데 반해 꽤 총명한 아이였던 영친왕을 자기 친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했다는 주장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 그래봤자 인질. 하지만 나중에 군 장성이 되는... 일단 왕공족, 그것도 조선 이왕가의 수장으로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기에 생활은 유복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 황족들은 매월 궁내성에서 주는 일정한 생활비 외에는 돈줄이 없었지만 영친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족들의 관리기관이던 이왕직에서 돈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다. 덕분에 영친왕을 부러워 하는 일본 황족도 있었다고(...). 그러나 태평양 전쟁 이후엔 그런거 없다(...).


3.2 고통 어린 망국의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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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사진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16][17]

그가 황태자로 책봉된 건 전혀 행운이 아니었다. 그저 이름뿐인 황태자이고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볼모격으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야 겨우 고국에 돌아오는 고통뿐인 인생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친왕의 일본 생활은 앞서 말했듯이 이왕직을 승계한데다[18], 현역 일본 육군 중장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실제로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닌 향수와 지독한 고독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이방자 여사가 공기에나 쓸 하얀 조약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 큰 어른 방에 있을 듯한 물건이 아니라서 물어보니 그가 머뭇거리다 답하길 "어릴 적 고향이 너무 그리워 조선으로 창덕궁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 고종은 물론 어머니 엄귀비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19] 그나마 순종 사후에 이왕을 승계하고 나서야 종묘에 들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도 짧은 기간 내에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제사는 지낼 수가 없었고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세워 종묘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제약이 심한 생활 속에서 몇십 년을 일본에서 살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겠단 희망과 의지는 놓지 않았는지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억양, 문법 모두 틀리지 않고 말이다.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 동기생들과 함께 영친왕을 찾아갔다고 한다. 앞선 주석에 설명됐듯 영친왕은 허울 뿐이긴 하지만 명목상으론 조선총독보다 높은, 조선의 대표자였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심정적으로 기댈 만한 어르신이었던 셈. 영친왕은 조선인 생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실내에 조선인밖에 없는데도 일본어로 격려를 해주어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황의 항복 선언 다음 날, 다시금 영친왕을 찾아갔을 때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를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주변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면, 혼잣말을 하며 한국어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는 평도 있다.


3.3 이왕 승계,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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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에게 경례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제2대 조선총독)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 붕어 후 하루 뒤, 순종이 일제강점기 때 갖게 된 이왕(李王) 직위를 계승한다. 이왕가는 일본 왕공족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호도 갖고 있었는데, 순종이 갖고 있던 쇼토쿠노미야(昌德宮)의 호칭도 이때 받는다.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년 중에 종묘의 제사가 있던 며칠 간 뿐이었고 거의 대부분을 도쿄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동경(東京) 이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미군에게 배포된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은 팜플렛에 영어로 번역된 아리랑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추적 결과 이 아리랑 영어 번역자가 바로 영친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국은 광복이 되고서도, 정치적인 입장과 분단으로 그를 받아주지 못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졸업[20]하고 일본군연대장사단장을 역임한 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육군 중장으로 제1항공군사령관을 지냈다.[21]

그러나 1947년 GHQ의 조치로 이왕직이 폐지되고 결국 평민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는 일제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는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다. 이 때문인지 무난히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했고, 1935년까지 대령으로 무난히 진급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단지 정치적인 이용물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또 사귄 이들도 진심으로 사귄 자들은 없었는지 일제가 패망하고 생활이 어려워지고 그가 점점 고독해질 무렵 찾아오는 이는 커녕 큰 사기를 당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손실을 보고 물질적으로 궁핍해진다. 사실 귀족제가 폐지되고 대부분이 전범 등으로 권력을 잃은 판에 누가 그를 도울 수 있었겠는가.

이 때 기록에 따르면 이방자 여사를 만나러 온 한 여인이 집에서 누군가가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영친왕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누가 왔는지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었으며 그녀가 나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친왕에게서 지독한 쓸쓸함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으로도 괴로워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망한 나라 왕족 취급을 했고 조선에서는 친일 황족이라며 증오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 심지어 어떤 국회의원은 '민족반역자인데 왜 광복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같은 전주 이씨이승만은 그를 증오하다 못해 아예 귀국 자체를 못하게 막아 버렸다.[22]

한국전쟁 시기에 노획한 북한군 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병준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북한군에서는 육군대학 출신의 영친왕이 남한으로 귀국하여 남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직접 군을 지휘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고려를 했다고도 한다.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던 이승만의 성격상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만일 이루어졌다면 흠좀무. 한국전 전후의 역대 육군참모총장들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일제 연간에 위관급 하급 장교출신들이었다. 그런데 영친왕이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한 군사대학이었던 일본육군대학 졸업자이긴 했다.

물론 일본군에서는 대개 어지간한 황족이면 모두 장성 계급에 있었으며, 이것은 실제 야전군 사령관이 된 두어 명을 제외하면 실제 지휘능력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왕공족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당시 왕이나 공이란 칭호를 받은 조선의 왕족들은 일본의 방계 황족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다만 영친왕은 제 1항공군 사령관 등 대규모 제대의 지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당시 남북한 군부 인사를 통틀어도 사단급의 지휘 경험조차 한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는[23] 걸 고려하면 최소한 다른 장교들보다는 나았을 지도 모른다.

이승만은 해방 후 이왕가의 재정정리를 맡은 황손 이청 정도만 미관말직을 내줬을 뿐, 나머지 황족들에 대해선 아무 배려가 없었다. 이왕가 재산은 모조리 국고로 귀속시켜 한국전쟁 이후 구 황실의 사유재산이라곤 사동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라며 아내에게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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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프랑스(사진은 프랑스 내 모나코 공국의 궁전) 여행에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3.4 환국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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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영친왕

1960년대의 영친왕 관련 자료[24]를 보면 1958~1961년 사이에 미국(하와이 등)에서 잠깐 잠깐 체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진이라고 한다.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 내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공식적으로 국적이 없는 재일한국인이 되었다. 영친왕 측은 광복 직후와 1948년에 조선으로 가겠다는 요청을 했지만 전자 땐 미군정이, 후자 땐 이승만 이 결사적으로 반대[25]했다.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이나 순정효황후 윤씨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이우에 대해 조금 호의적으로 반응했는데, 이에 대해선 2가지 추측이 있다. 자신의 혈통과 그에 따른 영향력이 그들에 비해 밀리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대했다는 말과, 어쨌든 독립운동가였으니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을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직계 왕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런 거라는 말이 있다. 이승만 본인은 그 이유에 대해 죽을 때까지 설명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선 영친왕이 일본 황족으로 살아간 것은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여 '영친왕은 일본인이 되었다'고 법률을 해석하여 그의 귀국을 거부하였다. 물론 일본 정부에서는 호적을 기준으로 영친왕 부부를 한국인으로 보았으므로 부부가 모두 무국적 신분이 되었다. 그러다 1957년, 유학 가 있는 아들 이구를 보러 미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발생한 여권 문제 때문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국민들 사이에선 그에 대한 반감이 더 강해졌다고 한다. 영친왕은 나중에 김을한[26]을 통해 밝히기를, "국적 같은 것은 나중에 다시 쉽게 회복할 수 있을 줄로 알았다"고 술회하며 일본 국적 취득이 자신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왕공족으로 있으면서 법제 등에 대해 무지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55년에는 여동생인 덕혜옹주를 이혼시켰는데, 정신질환자인 덕혜옹주의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기에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 합의를 그와 아내인 이방자가 대신 진행했다고 한다.

1947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일본의 황가는 다이쇼 덴노의 직계 외에는 모두 평민으로 격하되었다(신적강하). 이에 따라, 1945년 이후에도 일본에서 왕공족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던 영친왕과 이건 모두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경제적 이유로 이왕가저(邸)를 일본 사업가에게 매각했다. 그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주일 한국 영사관 부지로 이왕가저를 사려고 했기 때문에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그의 한국에서의 평판은 더 나빠졌다. 이 시기에 따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그는 이방자 여사의 친가와 몇몇 재일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간간히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였던 애신각라 부걸과 사가 히로가 종전 이후 중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 했던 것과 달리,[27] 종전 당시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전범으로 취급받지 않고 일본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만주국에서 실권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일에 관여했던 부걸과 달리 영친왕은 이미 망해버린 대한제국의 황족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일본 밖에 있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1961년이구 부부가 있는 하와이를 들렀다 일본으로 귀환하던 중 뇌일혈이 재발, 이후 의사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 회고에 따르면 처음으로 쓰러진 것은 1958년이라고) 그러다 박정희의 지원으로 1963년이 되어서야 혼수상태인 채로 56년만에 겨우 한국에 오게 된다. 당시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하와이의 이승만 귀국은 불허한 대신 (이건 제2공화국도 마찬가지)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배풀었는데 그런 사례 중 하나다.

1년의 병상생활 끝에 퇴원한 후 이방자 여사와 함께 한남동 일반주택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국가에서 지급되는 보조금을 받아 생활한다. 하지만 자신과 덕혜옹주의 병원비가 3백만 원 가까이 밀리는 등 가난한 생활[28]을 하다가 7년 후인 1970년 5월 1일 사망하였다. 향년 74세. 만약 순종의 뒤를 이어 제위를 그대로 계승했다면 재위 44년째였을 것이다.

생전에 영친왕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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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다. 5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영친왕의 유해를 모신 재궁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아버지와 형이 안장된 홍릉·유릉 능역으로 운구되어 영원(英園)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왕릉 최후의 능원에 묻혔고 신위는 종묘에 모셔졌다. 이후 전주 이씨 종약원에 의해 의민황태자로 추존되었다.

참고로 장례식 때 일본 황족들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문을 왔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부인 세츠코 비,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부부 등.

4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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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과 가족들. 왼쪽부터 순종황제순정효황후 윤씨. 중앙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리고 아들 이구. 오른쪽은 고종황제엄귀비.

이방자와의 사이에서 아들 2명을 두었지만, 장남[29]은 일찍 죽었고 차남인 이구는 결혼은 했지만 자식은 두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실제로는 대가 끊겼으나,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양자로 지명된 회사원 이원[30] 씨가 대를 이었다. 다만, 1990년 민법 개정으로 사후 양자입적은 인정되지 않고 있으므로 명목상 대통을 이었되, 호적상 실제 양자 입적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 부 : 26대 고종 이희
  • 모 : 순헌황귀비 엄씨
  • 의민태자 영친왕
  • 배우자 : 의민태자빈 이방자
    • 장남 : 원손 이진(1921~1922)
    • 차남 : 회은태손 이구

5 친일 논란

생전에는 구 황실에 대한 일말의 예우심과 맞물려 동정적인 시각으로 보여졌으나, 한국 왕공족과 일본 황족을 상징적으로 묶어놓은 이방자 여사와의 결혼 이후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영친왕을 매국노로 여겼으며, 이는 공화정에 반대하던 복벽파의 몰락을 야기한 큰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독립신문은 국권을 빼앗고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 나라에 장가를 들었다고 하여 정면으로 금수라는 멸칭을 붙였으며, 독립운동가 서상한은 영친왕 부처를 폭사시키고자 사제폭탄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다. 영친왕 부처의 장손인 원손 이진의 독살설을 뜬 소문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생후에도 일본군 중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매달 돈을 받고 지냈다는 것, 나아가서 중일전쟁 시기에는 화북 등 주요 전선에서 선전활동을 주임무로 복무한 것[31]이나 일본 본토 후방 방위를 담당하던 제 1항공군 등의 지휘를 맡았다는 점,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제의 선전활동에 이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친일파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고, 영친왕만이 아니라 여러 왕공족이 비슷한 활동을 했고 군인으로서의 계급도 높았기 때문에 왕공족을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왕공족에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왕공족은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는지 유무로 친일파인지를 판단했는데, 영친왕과 이우는 사실상 일본의 볼모로 끌려간 처지를 감안해 제외되었다. 실제로 영친왕은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볼모였으니...

위에도 어느 정도 적혀있지만, 그가 일본 군인이 된 건 사실상 강제나 다름없었다. 그는 일본에 온 뒤 일본 귀족급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선 귀족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인 교육을 받았다. 이에 따라 육군유년학교 예과에 진학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으니 사실상 다른 학교로 가는 거 자체가 어려웠다.


6 관련 작품

1970년에 정진우가 감독하고 당시 아역배우인 김정훈이 영친왕을 연기하고 고인이 된 최무룡, 허장강, 장동휘가 주연한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개봉된 바 있다.

1990년 KBS에서 광복절 특집으로 영친왕 일대기를 다룬 2부작 역사 드라마 <왕조의 세월>이 방영되었고 서인석이휘향이 각각 영친왕과 이방자 역을 맡았다.[32]

일본에서 후지 테레비를 통해 관련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제목은 <무지개를 건넌 왕비(虹を架ける王妃)>. 의외로 고증에 충실하다고 한다.[#] 제목부터가 이방자 여사의 수기에 나오는 문장의 인용. 오카다 준이치가 영친왕 역을, 칸노 미호가 이방자 여사 역을 맡았다. 주연 배우들이 미남미녀인 것을 문제 삼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일본 사극에서도 한국 사극에서도 당연시 되는 캐스팅 관행이고, 역대 조선 왕의 영정과 사극에 캐스팅된 배우의 외모를 비교해보자 일본에서 액션 배우로도 이름난 V6의 오카다 준이치는 외모가 일본인답지 않게 굉장히 이국적일 뿐 아니라, 영친왕이 체구는 작지만 군인답게 다부졌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고려하여 체격 면에서 닮은 점이 있다. 애당초 못생긴 얼굴의 배우가 나왔으면 더 욕먹지 않았을까?

동북아판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한 비극의 연인으로 해석했지만 어디까지나 등장인물만을 미화했을 뿐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적인 부분은 일체 긍정적인 묘사가 없으며 오히려 한국에 우호적인 시각에서 본 드라마이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잠시나마 언급되는가 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해 영친왕이 격노해서 뛰쳐나가려 하고 이방자는 학살에 대해 너무 심하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직접 촬영하였는데[33] 창덕궁 후원과 화성 행궁, 홍류원 등에서 회상신 및 결혼식을 촬영했으며 전익령[34] 등 한국 배우도 조/단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지 촬영과 현지 배우 캐스팅에도 공을 들였다는 사실 역시 드라마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

Heart of iron 4 에서 한국을 독립시키면 4가지 정당이 나오는데 거기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파시스트)의 수장이다(...)

  1. 고종의 아들들 중 이름을 하사받은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는 모두 휘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 대개 같은 왕의 아들들은 이름자에 같은 부수를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고종의 사가(私家) 일원인 흥선대원군과 그 형제들의 손자 이름도 항렬자를 제외한 이름 글자에 흙 토(土)변이나 흙 토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그리고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鎔)과 이문용(李𪣢鎔).
  2. 이은이 태어날 당시에는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이었다.
  3.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라는 사시(私諡)가 있다. 보통은 시호를 줄여 끝의 두글자로 부르는 관행을 감안할 때 자행황태자비로 부르는 것이 맞다.
  4. 식민지 조선의 이왕
  5. 전 이왕의 승하 일자는 4월 26일이지만 이은의 이왕위 계승은 4월 27일이다.
  6. 대한제국 황족들을 다룬 책인 '제국의 후예들'에 의하면 '의민(懿愍)'의 뜻은 '평생 동안 고난의 길을 걷다'라고 한다. 시호가 원래 고인의 생전 행적을 평가하는 것이긴 하지만 영친왕의 경우에는 그의 인생 자체가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그의 황태자 책봉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의 의지로 진행되었기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의민태자 영왕'이란 이름으로 종묘에 배향했다.
  7.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를 재출간한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지식공작소, 2014)의 '일러두기'에는 이방자 여사의 유지에 따라 "영친왕"을 "영왕"으로 호칭한다는 말이 있다.
  8. '이강(李堈)은 의왕(義王)으로 삼고 이은(李垠)은 영왕(英王)으로 삼았다.' 고종실록 40권, 37년(1900 경자 / 대한 광무(光武) 4년) 8월 17일(양력) 1번째 기사 [중화전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
  9. 의친왕이 문제가 많아서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막후에서 힘을 써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귀비는 당시 내명부에서 가장 직책이 높았지만,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는 직첩도 보잘 것 없었는데다 오래 전에 사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영친왕이 겪을 고통을 보면 채택되지 않는게 엄귀비나 영친왕에게 행복이었다.
  10. 조선왕조실록 순종 1권, 즉위년(1907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 8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영왕 은을 황태자로 책봉하다]
  11. 조선왕조실록 순종 1권, 즉위년(1907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 9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황태자를 책봉하고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다]
  12. 조선 태종 이방원의 예도 비슷한 경우. 그는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였는데 역시 자기에게 왕위를 주는 존재는 형인 정종이 아니라 아버지 태조라는 의미였다. 그래서인지 정종은 한동안 공정왕으로 묘호를 받지 못하다 숙종 대에 받았다.
  13. 영친왕은 처음엔 일본 황태자에 준하는 예우로 교육을 받았으나, 한일병합 이후엔 일본 귀족에 준하는 예우로 교육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1911년에 육군유년학교 예과에 편입되었고, 1917년엔 일본육군사관학교 29기로 입교했다.
  14. 당시 결혼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매결혼으로 이뤄졌지만, 이 시기 조선 왕족들이 일본인과 결혼한 건 조선 왕실의 뜻이라기보다 일본의 강제로 인한 것이었다. 특히 영친왕에겐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이미 있었지만 강제로 파혼당하고 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시대에 어느 나라의 왕족들에게 자유결혼이 있겠나만은...
  15. 이게 좀 논란이 있는 게, 현재 영친왕의 생애에 대해선 전적으로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과 외부인들이 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이방자 여사가 쓴 자서전엔 영친왕의 고통스러운 생이 잘 담겨 있어 그녀가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실제론 그렇게 헌신적인 아내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외부인이 영친왕의 집에 찾아가 적은 기록에 따르면, 식사가 일반 가정보다 맛있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이방자 여사는 외부활동에 열중하느라 영친왕을 잘 돌보지 않는다고도 기술했다. 최근 조선일보의 취재에 의하면, 영친욍은 황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고국으로 귀국도 금지당한 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게이샤의 누드를 그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시기 부부 사이에 다소 냉전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16. 옛 영상에는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박수를 치며 뛰어 놀거나 그네를 타는 영친왕이 나온다.(...) 아직 어린아이였다고 해도 망해 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암군의 모습이라고 평하기도... 5~6학년 나이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닐까? 사실 해당 사진도 조선왕조 전체의 입장에선 치욕적인 사진이다.
  17. 그러나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 앞에서는 좋은 할아버지인 척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을 초대하여 같이 뛰어놀게 하면서, 영친왕이 일제에 대한 적개심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물론 영친왕 옹호는 아니지만, 어린 아이에게 호의를 베풀면 잘 넘어가는 건 사실이다. 유괴범이 아이를 꼬실 때와 같은 이치.
  18. 이 때문에 명목상이나마 일제 치하 조선의 교과서 등에 천황 바로 뒤, 총독보다 앞 자리를 차지해서 나와있다.
  19. 다만 엄귀비의 경우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애당초 임종을 지켜보기 힘들었으며, 어렵게 환국하긴 하였으나 역시 생모의 시신을 보여주진 않았다.
  20. 이때 어御학우로 함께 재학한 사람이 유명한 홍사익 중장이다.
  21. 2.26 사건 당시 영친왕은 일본군 연대장으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하 연대병력을 이끌고 동경에 진주했다. 그러나 도착한 당일 사건이 정리되어 교전은 없었다.
  22. 정확히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한일 양국에 미군정이 들어서고 이승만이 재일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가 영친왕을 우연히 만난다. 영친왕이 넌지시 자신의 영구귀국을 논의해보려 했으나 이승만은 "오던 가던 마음대로 하시오."라며 냉대했다고. 영친왕은 나중에 이 일화를 기록하며, 대단히 실망스러운 날이었다고 표현했다.
  23. 그나마 꼽을 수 있는게 소련군 사단 참모 출신인 북한군남일과, 중국군 군단 참모장 출신인 김홍일 정도.
  24. 김을한의 <인간 이은>, 이방자 여사의 <세월이여 왕조여> 등
  25.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5남의 15세손으로, 이를 근거로 미국 유학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프린스 리로 소개했다. 미국 내 활동 편의를 위해 미국인들에게 자신을 망국의 왕자 비슷하게 소개한 거라고 한다. 탄생부터 공화국이었던 나라여서 그런지 왕실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유럽에서 왕족이 방미하면 대접 잘해주는 특성이 있었다고. 그 버릇을 개주지 못했는지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종종 자신을 과인이라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26. 당시 동아일보 기자. 덕혜옹주의 원래 약혼자였던 김장한의 형이다. 광복 직후 일본에 특파되어 취재하던 중 영친왕과 교류했고, 잦은 인터뷰를 통해 얻은 이야기들을 70년대에 《인간 이은》이란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27. 애신각라 부걸은 선통제의 동생으로, 일본 여성인 사가 히로와 결혼했다. 부걸은 만주국을 탈출해 일본으로 향하려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혀 형인 부의와 함께 전범 취급을 받았고,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겨져 무순 전범관리소에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28. 그런데 병원비가 저렇게까지 밀린 건 이 두 사람의 병원비로 국가가 지원해준 돈을 이구가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9. 이진(李晉). 대통을 이을 종손이었으므로 영친왕 내외가 한국으로 함께 데려가 얼굴을 비췄는데, 한국 땅에서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토악질을 하고 죽었다. 생후 1년도 안 되었을 때의 일. 훗날 이방자 여사는 "궁에 (영친왕) 전하와 나의 사이를 시기하는 자가 있어 사주를 받고 했을 일."이라며 두고두고 원통해했다. 다만 독살로 밝혀진 바는 없다.
  30. 의친왕의 9남 이갑(이충길) 씨의 장남으로, 본명은 이상협.
  31. 일제는 영친왕을 비롯해 이우 등 황족 출신들을 전선에 배치시켰는데, 이는 전투에 참전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황족 군인들은 위험한 전투가 일어나는 최전선 지역에는 배치하지 않았다. 주로 일제가 점령한 지역에서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 점령지역에 가서 주로 황족 군인으로서 그쪽 지역을 순찰, 순시하고 거기에 주둔하는 일본군 부대를 방문해 격려하는 전쟁수행에 있어서 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그런역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일본 황족들도 마찬가지였고, 영친왕 이은 역시 일본 황족의 일원 중 하나로서 그런 역할에 수행한 것이다.
  32. 이 둘은 주말 드라마 달빛 가족에서도 부부였다.
  33. 후지 테레베의 제휴사인 MBC에서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34. 작 중 이름은 '이천희'. 영친왕이 어렸을 때 잘 따르던 궁녀 역으로 등장한다. 나중에 엄귀비가 설립한 숙명여학교의 학생들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와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는데, 그 여학생들 중에 이천희의 딸이 있었다. 꼭 조선으로 돌아오시라는 여학생들의 말에, 영친왕은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