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틸리오 호세 데마리아 (Atilio José Demaria) |
생년월일 | 1909년 3월 19일 |
사망년월일 | 1990년 11월 11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부에노스 아이레스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76cm / 76kg |
등번호 | -[1] |
소속팀 |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1926-1931) 클루브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1931) 암브로시아나 인테르(1931-1936) CA 인데펜디엔테(1936)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1937) 암브로시아나 인테르(1938-1943) 노바라(1944) AC 레냐노(1945-1946) 코센사 칼초(1946-1948) |
국가대표 | 3경기 / 0골(아르헨티나 / 1930-1931) 13경기 / 3골(이탈리아 / 1932-1940) |
감독 | AC 레냐노(1945-1946) 코센사 칼초(1946-1948) 클루브 데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1951) 알미란테 브라운(1973)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주장 | |||||||||||
주세페 메아차 (1931~1940) | → | 아틸리오 데마리아 (1940~1943) | → | 알도 캄파텔리 (1943~1950) |
1 생애
1.1 클럽
데마리아의 데뷔는 1926년에 이루어졌다. 데뷔전에서 그는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출전하였고 첫 시즌에는 3경기에 출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1927년에서야 그는 데뷔 골을 신고하였고 27경기에 출전, 총 8골을 넣었다.
1928년 이후에는 스트라이커로도 활동하면서 팀 내 최다인 35경기에 출전하는 등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하였고 1929년에는 팀 내 최다 득점자로도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면서 기량을 계속 꾸준히 발전시켜나갔고 힘나시아 라 플라타 클럽의 투어에 참가하여 그들의 이목 역시 끌기에 이른다. 결국 1931년 시즌에는 힘나시아 클럽에서 새로운 시작을 노렸지만 여기에서 그는 단 한 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였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는 우루과이의 전설적인 공격수 엑토르 스카로네와 같이 암브로시아나 인테르에 합류하였고 성공적으로 팀에 녹아들어갔다. 첫 시즌은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두 번째 시즌에는 13골을 넣으며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꾸준히 활약을 하던 데마리아는 1935-36 시즌을 끝내고 이탈리아를 떠나 아르헨티나로 돌아갔고 CA 인데펜디엔테와 데뷔팀 포르테뇨에서 1년을 보냈다.
1년의 외도 이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데마리아. 그리고 1939-40년 시즌에서야 처음으로 스쿠데토를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시즌에 부상으로 활약이 정체된 주세페 메아차와 조반니 페라리를 대체하며 12골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 1940-41 시즌부터는 암브로시아나 인테르의 주장 자리를 맡았고 1943년까지 활약하였다. 그 이후에는 노바라 등 군소클럽에서 활약하였고 1948년에 은퇴하였다.
1.2 국가대표
데마리아는 두 번의 월드컵에서 국가를 바꿔 출전했다. 하지만 월드컵에는 단 한 경기밖에 출전하지는 못했는데 똑같이 국가를 바꾸면서 두 번 다 주전으로 활동한 몬티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다.
주로 친선경기에서 활약했으며 가끔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암브로시아나 인테르에서는 주로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활약했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웃사이드 라이트나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기도 했다.
기술적으로 완성된 선수라는 평이 있었다. 그의 다리는 짧고 굽었지만 정밀한 패스를 뿌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좋은 드리블 기술과 빠른 반사 신경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한 슈팅 역시 가지고 있어서 당시 주요 공격수였던 주세페 메아차와 좋은 콤비 플레이를 이루었다고 한다.
3 뒷이야기
- 그의 동생인 펠릭스 역시 암브로시아나 인테르 등에서 활약한 축구선수였다.
- 우승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선수였는데 아르헨티나에서 포르테뇨는 데마리아가 힘나시아로 나가자마자 바로 역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데마리아가 아르헨티나에 가 있는 1년 동안 스쿠데토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1939-40시즌의 우승이 아니었으면 데마리아는 콩만 깔 뻔했다.
4 수상
4.1 클럽
- 세리에 A 우승 1회: 1939-40(암브로시아나 인테르)
- 세리에 A 준우승 4회: 1932-33, 1933-34, 1934-35, 1940-41(이상 암브로시아나 인테르)
4.2 국가대표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