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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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항목은 에스파냐의 가톨릭 신학자 호세 모랄레스(나바라 신학대학 교수)의 저서, <창조론>을 토대로 1차 문서가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1 개요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전지전능전선한 유일신을 주장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전지전능하고 사랑을 배푸는 유일신이 있다면, 왜 세상에는 악이 가득한가?'라는 물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 항목은 가톨릭의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설명하는 항목이다.

2 대전제

이 항목은 호교론 항목이 아니다. 즉 이러이러하니 종교를 가져야 한다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항목이 아니다. 다만 '일신교'와 '악의 문제'라는 모순되게 해석될 수 있는 상황을 가톨릭 교회는 어떻게 모순 없이 이해하는지, 언뜻보면 신앙 그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서 당장 가톨릭 교회가 해체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서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신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항목이다. 즉 이 항목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는 가톨릭은,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악의 문제를 이해한다'라고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항목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항목은 전지전능전선한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가톨릭 신학의 대전제를 먼저 깔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호교론 항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악이란?

3.1 악의 분류

가톨릭 신학에서는 악을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으로 구분한다. 물리적 악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자연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악이며, 윤리적 악은 자유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악이다.
물리적 악은 그 악을 겪는 존재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기질(氣質)의 결핍을 뜻한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시력을 잃었다면, 그것은 본성상 시각이 주어진 인간의 물리적 악이다.[1] 또한 노화, 질병, 죽음 같은 생물학적 과정이나 자연재해 등도 물리적 악에 포함된다.
반면 윤리적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일어나는 악이다. 그렇기에 이 악은 죄를 수반한다.

3.2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악

가톨릭에서 악은 '천주의 피조물'이 아닌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당장 들었을때, 당연히 일반인의 상식과 차이를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 삶에 있어서 악한 현상들은 분명하게 실재(實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철학은 그 기원에서부터 악의 본성에 대해 그리스도교에게 묻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초기 교회의 호교론자인 오리게네스는 그리스 철학적인 개념으로 악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인 악 또는 실체(hypostasis)라고 할 수 있는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악은 선의 부분적인 결핍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더 발전시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악은 선의 부재이다. 존재자(ens)는 선과 동일시되므로,[2] 악은 순수 비존재로 간주해야 한다. 덕에 반대되는 사악함과 시각에 반대되는 소경됨은 본성상 고유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던 특징들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듯 악의 비존재성은 존재 안에서의 비존재성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악의 존재에 있어 원인도 아니며, 악이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타락은 마치 살아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마치 참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눈앞에 그 실체가 제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악은 선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 성 바실리오-

아우구스티노 역시도 악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절대적으로 말해 어떠한 자연도 악하지 않다. 악은 선의 결핍에만 주어지는 이름이다."
"악은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실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악은 다름 아닌 선의 결핍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존재자는 천주의 선함을 반영하므로 존재론적으로 선하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통해 악에 대한 교리를 종합했다.

ㄱ. 모든 존재자들은 선에서 유래하고 선에 참여하므로, 절대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존재자들을 산출할 수도 없다.
ㄴ. 상대적인 악은(총체적이 아닌) 존재의 부분적인 결핍이다.
ㄷ. 물질적인 존재들과 천사들에게 악은 없다.
ㄹ. 악마들에게는 선이 부재한다.
ㅁ. 자연과 물질에는 악이 없다.

그리고 교부들은 악을 결핍으로서 정의함으로써, 사람이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논리에 의하면, 악은 선과 대등한 입장에 선 경쟁자가 아니라 선에 기생하고 선을 왜곡시키는 '잡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악을 "부리지 않고, 씨앗도 없으며, 뿌리도 없는 잡초"라고 표현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 앞에서 교부들이 제시한 악 개념을 수용하고 발전시킨다. 토마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선과 악은 소유와 결핍으로서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악은 악인 한에서 사물들에게 있어 어떤 실재가 아니라, 특수한 선의 결핍이다. 그것은 특정한 구체적인 선에 고유하다."
누군가가 선과 윤리적인 악은 서로 반대된다고 말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는, 윤리적인 악이 부분적인 선으로서, 그런 선이 악을 가장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의 악은 참된 선에서부터 일탈한 외견상의 선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기에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
"무절제한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은 이성의 선(善)을 잃어버리는 데 있지 않고, 무질서한 감각의 즐거움을 찾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악이 아니라 야기되는 선에 근거해서 윤리에 있어 악은 구성적인 차이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토마스는 악은 선의 부정적인 부재가 아니라, 단지 결핍적인 부재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만일 악이 선의 부정적인 부재일 경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악이라고 하거나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이 소유하는 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조류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날개를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악하다고 설명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

"악은 누군가가 소유하기에 적절하고 소유해야 하는 것에 대한 결핍이다.. 이것이 바로 모두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핍은 본질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결핍은 실체에 대한 부정이다. 그것은 사물에 있어서 본질이 아니다."

4 어째서 전지전능한 천주는 악을 모두 없애지 않는가?

존재론적 관점에서 악에 대한 가톨릭의 설명은, '천주는 왜 악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악은 피조물이 아니다'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게 하였다. 또한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근본적인 물음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천주는 당장 이 세상에서 윤리적 악과 물리적 악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도 가능한데, 사람들이 목격하는 세상에는 여전히 이러한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가톨릭의 대답은 간단하다. 바로 "우리도 바로 그걸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유의미하고 명쾌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순수 논리적 관점에서, 가톨릭의 이 대답은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네가 하느님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아우구스티노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가톨릭이 주장하는 천주는 동화속의 요술쟁이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 더 나아가 세상의 논리 등을 모두 초월하였고, 오히려 그것들을 창조한 '초월자'이기 때문이다.[3] 따라서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이 문제를 해석하면 전지전능전선한 유일신과 '악의 존재'가 모순은 아니게 되며, 오히려 가톨릭 신자가 무한한 천주를 이해할 수 없는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되도록 한다. 애초에 인간의 논리와 이성을 모조리 초월한 유일신이 존재함을 전제로 깔고 논리를 전개하는 가톨릭에게 있어서, 악의 존재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모순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굳이 악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 어떠한 논리로도 가톨릭 신앙에는, 비록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심히 당황스러울 수 있을지언정 모순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가톨릭 교회 밖의 사람은, 가톨릭 교회가 '전지전능하고 선한 초월자'을 먼저 전제로 깔고 신앙을 전개하는 '종교'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천주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천주는 전지전능하고 선한 초월자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천주'라는 말 안에 이미 전지전능하고 선한 초월자라는 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근거하였으나 선하지는 않은 초월자'를 주장한다면, 이미 가톨릭 교회의 천주가 아닌 새로운 신이 될 것이다. 또한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 초월자라고 말을 해도, 그 초월자는 가톨릭의 천주가 아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들이 있는데, 왜 너는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지?"라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것을 듣는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는 분명하게 모순 없는 이유들이 존재하며, 그가 종교를 버리지 않는 것이 그의 지성이 가진 열등함을 의미하는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톨릭 교회 밖의 사람이 보았을때 이 대답은 '회피성 대답'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어떤 전지전능한 외계인이 원리를 알 수 없는, 물체를 금으로 바꾸는 기계를 던져주었다고 하자. 어떤 물체에 대해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기계는 어떠한 물체건 금으로 바꾼다는 전제는 적어도 의심받을만하다. 문제는 전지전능한 외계인인데 전지전능하다면 우리가 비록 어리석더라도 외계인이 완벽하게 설명을 해낼 것이기 때문에 외계인이 설명한 전제가 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점에 대해서 그래야 전지전능한 외계인이 준 원리를 알 수 없는 기계답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모순이 없는 말이지만 앞 선 모순을 해결시켜주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아래와 같이 고통과 악의 의의에 대하여 깊이있는 고찰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당하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분명하게 억울하다고 느낄 요소가 존재하며 실제로 많은 이들은 여기에서 출발하여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가 된다. 스타워즈에서 아무리 많은 모순점이나 문제점이 있다고해서 그 영화의 팬이 된다는게 열등함을 의미하지 않고 팬을 그만두어야한다는 뜻이 되진 않는다. 그 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이다.다만 그 모순점에 대해서 스타워즈 내부의 논리로의 해결은 타당하겠지만 스타워즈가 논리적이라는 말에는 다소 비판의 여지가 남게된다.

끝으로 '왜 천주는 악의 존재를 허용하는가'는 질문의 경우 가톨릭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비록 이것들이 완전한 답은 될 수 없겠으나, 가톨릭이 생각하는 고통과 악의 의의에 대한 약간의 설명은 될 것이다.

4.1 성경에 나타나는 악과 고통

성경은 종종 의인의 고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불경한 사람들의 번영에 대해 놀라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시편 73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는 하마터면 발이 미끄러지고 걸음을 헛디딜 뻔하였으니 내가 어리석은 자들을 시새우고 악인들의 평안함을 보았기 때문이네. 그들에게 아픔이라고는 없으며 그들의 몸은 건강하고 기름졌네. 인간의 괴로움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고통을 당하지도 않네."

이러한 성찰은 욥기에서 광범위하고 극적으로 발전되었다. 욥기는 무죄한 이의 고통이라는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룬 성경이다. 욥은 천주의 허락 하에 가능한 모든 형태의 고통, 즉 물리적 악, 정신적 고통, 생명의 쇠약해짐에 따른 번민,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 친척과 친구들의 멸시와 몰이해, 천주와의 관계에 드리운 어두움을 겪은 의인이다.
욥의 탄식은 처음에 변덕스럽고 불합리한 적수처럼 드러나는 천주에 대한 고발로 종종 드러난다. 추측과 헛된 지혜에 근거해서, 욥을 위로하려는 친구들은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하는 익히 알려진 견해를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욥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잘못에 대해 뉘우쳐야 한다.

"자, 이제 그분과 화해하여 평화를 되찾게. 그러면 자네에게 행복이 찾아올 것일세."

욥은 천주 안에서 고통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천주는 욥에게 응답하는 가운데 어찌해서 선하신 천주가 고통 받고 있는 의인을 위해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점과 관련해서 정형화된 일반적인 물음들을 한편에 놓아둔 상태에서 어떤 이론적인 개념이나 원리를 갖고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천주는 고통당하는 그의 종에게 우주의 경이로움에 대해 보여 준다. 그 안에서 천주의 권능과 지혜가 조화롭게 드러나 있었다. 욥은 창조의 평범한 신비 속에서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한계, 자신의 무지, 행복한 존재의 지평도 찾아낸다.

욥은 고통의 의미가 하느님의 신비와 같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래서 고통의 의미는 추상적인 이론적 해결이나 감정적으로 위로하는 해답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악-고통'은 문제가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갖는 신비이다. 따라서 '악-고통'은 엄밀히 말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리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사안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도 않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A. Bonora, Mal / Dolor, Nuevo diccionario de Teologia biblica, Madrid 1990 / 1095~1096쪽

욥기는 독자에게 악과 고통에 대한 어떤 정의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와 유사한 질문을 할 권리를 묻는 것 자체를 부인하는 듯 하다. 그러나 욥기에서 악의 문제는 '인간을 거스르는'(contra hominem) 주제가 될 정도로 지극히 근본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을 향한'(ad hominem) 주제를 통해 해결된다. 악을 허용한 것에 대한 천주를 향한 암묵적인 비난은 인간을 향한 명시적인 비난으로 바뀐다. 이렇듯 이목을 끄는 변화 또는 상황의 전복은 천주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를 사라지게 하며, 그 대신 죄인인 인간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를 드러나게 한다.
결국 욥은 예상하지 못했던 천주와의 개인적인 만남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천주의 논리와 언어를 초월한 대답을 자신의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당신에 대해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 5)"

모든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거나 모든 것은 천주의 신비 안에서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양자택일의 상황 앞에서 욥은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찼으며, 그래서 반드시 선하신 천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사야 42,1-9, 49,1-6, 50,4-11, 52,13-15에 담겨 있는 야훼의 종의 노래들은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고통 받는 종의 모습은 집단 전체의 죄를 위해 자신의 고통으로 대신 보상하는 신비스런 인물을 소개한다. 이 종은 훗날의 그리스도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 11)"
"그는 많은 이들의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해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 12)"

야훼의 종은 폭력과 인간적인 승리가 아닌 종으로서 속죄 고통을 통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중재를 완성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통으로 점철된 이 사람의 수난은 무익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 특히 죄인들과 수많은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의 원천이 된다.
대리 고통이란 개념은 마카베오 시대에 다시금 등장한다(BC 2세기). 당시 형성된 순교 신학은 천주에 대해 충실한 가운데 견딘 역경을 속죄 희생(다니 3, 40 참조)이자 죄로 인해 야기된 천주의 분노를 멈추기 위한 청원으로 소개한다.
구약은 순전히 수덕적인 의미에서의 고통이란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윤리적인 완전함에 이르고 천주에 대한 신심으로 보여 주기 위해 고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의미 없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자가 겪는 모든 고통은 천주에 의해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그 고통은 천주의 구원 계획에 통합되며 인간을 위한 것으로 신비스럽게 평가받는다.
성경은 악과 고통에 대한 통일되고 체계적인 신학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고 천주의 도움으로 악에 대항해서 승리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을 제시할 뿐이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모든 위인들(아브라함, 요셉, 모세, 엘리아, 아모스, 예레미아, 에스델, 다윗 등)이 고통과 환멸 그리고 실패를 알았다는 사실은 천주의 계획에서 고통이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설명해 준다.

특히 예수는 이사야서에 나온 '야훼의 종'에서 예시된 고통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고통을 야기한 것은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고통 받는 인간을 동반하기를 원하는 성부에 대한 사랑 때문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 26)"

4.2 천주의 존재와 악의 의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악이나 고통의 체험을 통해 시련에 놓일 수도 있다. 때떄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막을 수 없으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항

고대로부터 인류는 악과 고통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보다 광범위한 용어로 규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스케마를 제시해주는 다양한 해답들을 추구해 왔다. 이에 대한 거의 모든 설명은 개인을 초월하는 목표로서의 사회적, 우주적 질서에 대한 개인적인 복종의 필요성에 바탕을 둔 근본적인 태도로부터 출발했다.
통상 보다 해설적인 스케마들은 인간의 고통이 언제나 지상적 또는 종말적 보상의 주체라는 관념에 바탕을 둔다. 이를테면 힌두교의 카르마 법칙은 인간의 악, 고통, 죄에 대해 갚거나 그것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일종의 최종적인 균형에 대해 말한다. 이원론적 개념들은 악의 객관적 원리 안에서 고통의 의미를 살피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이 악의 원리는 선한 신에 대항해 싸우며 어떤 면에서 인간 존재가 처한 비극적인 상황을 설명해 준다. 여러 사상가들은 신적 본성의 내면에서 고통에 합체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노선에는 칼 융(C.G. Jung)을 비롯한 과정 신학자(process theologist)들이 있다.
앞서 제시한 세 가지 노선(지상적 보상, 미래적 보상, 카르마의 법칙)의 공통된 특징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실재에 대한 조화로운 전망 안에 통합하도록 허용하는 신빙성 있는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지극히 힘든 과정을 통해 사회적, 개인적으로 설득력 있는 의미를 갖게 된다. 첫 번째 용어, 즉 지상적 보상을 통해서는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것은 지독한 고통의 상황에서, 적어도 평안을 바라는 소망으로, 겪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발견해야 할 필요성에서부터 출발했다. 극심한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또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 앞에서 무능력하게 당하는 사람들은 분명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왜 자신들에게 그런 악이 엄습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설명으로, 어떤 면에서 의미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주는 이러한 설명은, 비록 고통 받는 사람에게 긍정적이고 즉각적인 해결에 대한 약속이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유용하며 위로가 된다.
고통과 그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전망은 이러한 성찰 몇 가지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을 천주의 정신과 권능에 의해 질서 지워진 우주로 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보다 광범위하고 심오하게 제기되며 지극히 실용적이거나 순수 합리적인 태도로 정화된다.

하느님께서는 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신학대전 I, 25, 6 참조). 그러나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의 세상을 자유로이 창조하기로 하셨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이러한 변환는 어떤 존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소멸을, 더 완전한 것과 더불어 덜 완전한 것을,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그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리적 선은 물리적 악과 공존한다.(신학대전 3, 7) ... 이리하여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섭리로 당신의 피조물에서 야기된 악의 결과에서, 물론 윤리적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10항, 312항

교회 전승은, 인간의 자유와 물질세계의 불완전함과 우연성에서 유래한 악이 섭리적인 목적들과 더불어 천주에 의해 허용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악은 선을 야기하지 않으며 순수 지성적인 절서에 대한 해석적 스케마들을 통해 사색적으로 취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천주는 악을 의도하지 않는다. 다만 악은 천주의 섭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천주는 악을 알고 그 악을 지배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인 악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천주가 악으로부터도 선을 이끌어낸다고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45,8, 50,20)"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에 앞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 4)"
"이제까지 저지른 가장 큰 윤리 악은 모든 인간의 죄로 인해 일어난, 하느님 아들의 배척과 살해였다. 하느님께서는 이 악으로부터 당신의 충만한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을 이끌어 내셨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12항
예수의 생애에 대한 신비들은 고통이란 주제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태도와 행동은 가톨릭 신학에서, 사랑과 고통이 인간의 삶에 있어 함께 가도록 불림 받았다는 점을 신자에게 보여준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랑은 이기적으로 변할 것이고 고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1. 주의할 점은, 결코 그 장님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시력의 상실이 그 장님에게 고통을 겪게 하므로 물리적 악이 될 뿐.
  2. 그리스도교는 존재하는 것은 본래 선하다고 설명한다. 이는 창세기 1장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구절에 근거한다.
  3. 다만 여기서의 초월은 부정적인 의미의 초월이 아니라, 기존의 세상의 논리나 지성을 포함하는, 마치 2차원을 포함하는 3차원 같은 초월이다. 이 점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견해가 갈라진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에 대해서 논한 바 있다. 항목을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