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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라틴어: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영어: Saint Augustine of Hippo
프랑스어: Saint Augustin d’Hippone (생 오귀스탱 디폰)
이탈리아어: Sant'Agostino d'Ippona (산타고스티노 디포나)
에스파냐어: Agustín de Hipona (아구스틴 데 이포나)
포르투갈어: Agostinho de Hipona (아고스티뉴 드 이포나)
서방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 | |||
생몰년도 : 354~430년 | |||
암브로시오 | 예로니모 | 아우구스티노 | 대 그레고리오 |
근원을 사유하는 철학자[1]
진리의 연인[2]
1.1 개요
354년 11월 13일 누미디아(현재의 알제리 지역) 타가스테(Thagaste)에서 출생, 430년 8월 28일 히포 레기우스에서 선종. 4세기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초대 교회 교부(敎父) 중 하나이며 교회학자.
그리스도교 교파를 막론하고 두루두루 존경받는 성인이다. 가톨릭에 부정적인 개신교에서도 이 사람은 기독교의 교부로 취급해준다. 축일은 가톨릭 및 서방 교회에서는 8월 28일, 정교회 및 동방 교회에서는 6월 15일. 상징물은 주교관과 지팡이, 학자를 상징하는 책과 깃펜, 조개, 비둘기 등이 있으며, 양조업자, 인쇄공, 신학자의 수호성인이다. 그의 신학적인 사상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가톨릭 관련 인물들은 물론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의 개신교 신학자와 르네 데카르트,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두루두루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업적과 성덕(聖德)은 대체로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고, 젊었을 때는 양아치가 따로 없는 생활을 했다(...).그래서 악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카더라 그런 쓰디쓴 청년시절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와 그 후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신의 마음을 써낸 것이 바로 『고백록(Confessiones)』. 사실 회심 이전에는 동거녀와 사생아도 낳는 등 현대인이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교 윤리가 확고히 정착하기 이전인 고대 후기 로마 사회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크게 양아치스럽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사람이 고백한 자신의 죄 중에는 다른 종교를 믿은 것도 포함되기 때문에, 후대인들이 보기에도 '아니 뭐 이런 걸로...'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고(...)
1.2 이름
본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혹은 아오스딩으로 알려져 있다. 정교회에서는 복자 성 아우구스티노라고도 하며, 철학계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한국 개신교에서는 영어식 발음으로 "어거스틴"이라고 한다. 교회학자로서의 칭호는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이다.
참고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은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 당연히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가톨릭 및 정교회 내부에서는 이 인물을 원칙적으로 "아우구스티노"라고 호칭한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정식으로 주교회의를 통해 외국 성인명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안에 대해 발표한 바 있다. ( PDF 자료) (쉽게 풀어 설명한 기사.) 다만 어감이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가톨릭 내부의 자료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부이고 주교이고 신학자이고 간에 거의 신경을 안 쓴다고 보면 된다. 궁금하면 바오로딸 같은 가톨릭 계열 인터넷 서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라고 검색해보자. 외래어 표기법이 다 그렇지 뭐
1.3 생애
1.3.1 청년시절에서 회심하기까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관리인 아버지 파트리치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어머니 모니카(Monica, 축일 8월 27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성사는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서 양육되면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 370년에는 아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카르타고 대학에 입학해 수사학을 전공했다. 아버지 파트리치오는 371년 사망했는데, 점점 방탕해져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기가 막혀서 죽기 직전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철학에 심취하게 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비상한 머리에 스스로 도취하여 어머니의 바람과는 점점 멀어져 갔고, 372년에는 때부터 어떤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아데오다투스'[3]라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왜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생활만 했는지는 불명이나, 훗날 아우구스티노 본인이 고백록에서 "떳떳하게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지각 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이었다"고 했다. 아데오다투스는 372년에 태어나 388년에 일찍 죽었고, 그녀와의 동거는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모자 간의 연을 끊고 만다.
카르타고에서의 공부를 끝낸 아우구스티노는 수사학 교수 자격증을 따 고향으로 돌아와 수사학교를 세웠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카르타고로 가 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노는 철학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진리와 악 등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답을 마니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373년에는 열렬한 마니교도가 되었는데,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읽은 뒤로는 회의감이 더 커졌다. 382년, 그는 마니교를 떠나 신 플라톤주의[4]에 빠졌는데 그것도 잠시, 383년에는 아예 카르타고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로마로 가 수사학 교수 일을 했고, 학생이 도무지 학비를 안 내자 질려서 이듬해 밀라노로 옮겨간다. 역마살 돋네. 본래 로마는 어머니 모니카가 모르게 갔던 것인데, 이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려와 아들을 찾아 밀라노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인생의 턴포인트가 되는 인물인 성 암브로시오(축일 12월 7일) 주교를 만난다. 그는 대단한 말빨(…)을 지닌 암브로시오 주교의 첫 인상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의 강론을 틈 나는 대로 경청하곤 했는데, 딱히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를 얻고자 함이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잘 하나를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계기야 어쨌든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강론 내용에 점점 이끌리고 있었는데, 그 때는 마침 자신의 여러 내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때였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 살던 고향 친구가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극도로 절제된 수도생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때는 쾌락에 빠진 노예인 자신을 한심스럽게 생각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심란한 아우구스티노는 자택 정원을 거닐며 고민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라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뭐라도 집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들어와 눈에 있는 책을 집어서 펼쳐봤는데, 그건 바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14절 (공동번역성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을 받아 개종을 결심한 아우구스티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암브로시오 주교 밑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는다. 또한 이듬해인 387년 4월 13일에는 친구 알리피오(Alypius, 축일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32세. 한편 15년 동안 동거했던 여인은 그의 회심을 알고 곁을 떠났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녀 역시 회심하여 수녀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1.3.2 사제로서의 활동
387년, 그리스도인이 된 아우구스티노는 아들 및 친구와 더불어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도중에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고, 388년에 아프리카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수도 공동체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머지 않아 아들도 죽고 말았다. 후에 수도회원들은 점점 늘어났고 공동체는 단순한 수도생활을 넘어 일종의 성서 연구소로 탈바꿈한다. 아우구스티노가 꾸려놓은 수도 공동체는 한참 후인 13세기에 그가 정립한 회칙을 바탕으로 탁발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로 정식 발족한다.
391년, 사제가 되지 않고 수도생활을 더 하고 싶었던 36세의 아우구스티노는 동료를 더 모을 생각으로 히포로 출장을 가 미사에 참례했다. 아우구스티노의 명석함과 타의 모범이 되는 보속의 생활은 이미 그곳까지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가 강론 중 히포에 새로운 사제가 필요하다고 한 순간, 사람들이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졸지에 발레리오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게 아닌데 싶은 아우구스티노는 울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엉뚱하게 그가 주교가 되지 못해 서운한가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395년에는 보좌주교가, 발레리오 주교가 세상을 떠난 396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수사학 지식까지 총동원하여 히포의 백성들을 위해 사목 활동에 집중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직접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으며, 삼위일체, 은총론 등의 영성신학을 연구하고, 방대한 양의 각종 저술활동을 통해 교회를 공격하는 영지주의(그노시스), 도나투스, 펠라기우스, 아리우스파 등 각종 이단들을 향해 쉬지 않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 중에는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마니교도 있었다.
427년에는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반달족이 로마 제국을 약탈하며 북아프리카를 반달쳐들어왔고, 그들을 피해 타 지역에서 사람들이 히포로 몰려들어왔을 때 아우구스티노는 거처를 제공하는 등 그들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430년에는 히포까지 포위되었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공들여 이룩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병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8일, 아우구스티노는 시편 7장을 읊으며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4 대표적인 업적들
젊은 시절의 흑역사들 때문에 악의 문제와 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원죄 교리가 정립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그리스인들의 영향으로 사람이 짓는 죄를 외부적 요인에서 찾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의 원인을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찾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먼 옛날에는 죄를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 개념으로 보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관점을 돌려버린 것. 다만 원죄가 남자의 정액으로 인하여 유전된다고 보았는데, 당연히 현대에는 "아무리 위대한 교부라고 하지만, 이건 좀 뻘소리"라고 취급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조금 변호하자면, 과거에는 인간의 본질이 남자의 정액에 있다고 보았기에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에 대한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그 자신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흑역사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임은 분명하지만, 또한 당시 서방 제국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동방 제국은 그리스를 중심으로 성공적인 체제 개편에 성공하였고, 이러한 안정성 속에서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집중하여야 했다. 즉 자신들은 어떤 분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얻은 것인지, 곧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시고 그리스도는 누구신지에 대해서 합의하여야 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등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반면 서방은 동방과 같은 안정성을 누리지 못했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기는 서방 제국이 붕괴하고 있던 시기이다. 영원할것만 같았던 대제국이 붕괴하여가고 있었고, 야만족이 쳐들어와서 약탈이 일어나고 로마의 온갖 위엄이 박살나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이 세상은 왜 이리 막장일까?', '로마도 망했는데, 결국 영원한 대제국은 없다는 말인가?'하는 생각들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시대적 부름에 응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이 막장인 이유를 '죄' 개념을 통해 논증하였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악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인간이 세운 국가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바빌로니아나 로마처럼 아무리 잘나가는 제국이라도 이 법칙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직 '하느님의 나라', 곧 신국(神國)만이[5] 영원하며,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국가라 하였다. 그리고 이 인국(人國)을 순례하는 신국(神國)의 백성들을 이끄는 조직을 교회라 설명하였는데, 아우구스티누는 이러한 사상들을 그의 역작 <신국론>에서 체계적으로 논증해버렸다. 그리고 이 책은 서유럽인의[6] 역사관을 돌려놓았다.[7]
구원론에 있어서는 행위구원론[8]을 펼치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맞서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주장했으며, 당연히 후대 그리스도교 신학[9]에 큰 영향을 주었다.
前 주교황청 한국대사인 성염 교수가 번역한 <신국론>의 해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무수히 많으나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굳이 꼽는다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칸트라고 했다. 문화사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철학과 문학에서 최후의 대가다.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플라톤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위대한 라틴 사상가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중략)
사람들이 이 교부 철학자에게 크게 매료되는 까닭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 속에 숨겨진 진리에 대한 사랑이리라.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진리를 향한 구원의 불꽃" 또는 진리에 대한 열애(熱愛)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10] 규정하고, "아, 진리, 진리! 당신을 그들이 하고한 책들에 한목소리로 자주, 또 가지가지로 내게 속삭여 줄 때,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사무치게 당신을 그려 애타하더이까?"라고[11] 외친다. 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는 음식이었으며, 그는 온 생애로 철학을 살았고, 삶 전부를 바쳐 진리를 사랑했다!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이었다!
그 진리를 일컬어 "임"이라 부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임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라면서 저 유명한 <고백록>을 시작한다.[12] 사상적 방랑을 하면서도 그는 이 진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누구인지를 예감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13]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라고[14] 헌신을 선언했고 그리고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여생을 살았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경건한 여가를 찾는 것"이기에[15] 그는 종교적 본질인 사랑을 정의하여 "우리가 진리를 고수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참사랑"이라고[16] 한다. "사랑이 진리를 깨닫는다"라는[17]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유래한다. 진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을 보여주는 구절로는,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저 탄식, 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하는 고백이 있다: "오, 진리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18]
1.5 어록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말라."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하느님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Quimirum si non comprehendias? 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을 때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막상 묻는 자에게 설명하려면 대답을 알지 못한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In the absence of justice, what is sovereignty but organized robbery?)"
"신념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그(신념)에 대한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혹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된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불합리하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먼저 수학을 철저히 공부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과 인간의 일들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학생: 뭐?
위의 정액 드립보다 이게 더 뻘소리 같은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는데, 그대도 자신의 죄를 질책한다면 그대는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죄인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죄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구원하시도록 그대가 만든 것을 부수십시오.……그대가 만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기에, 그대의 선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시작입니다. 그대는 진리를 행하고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일찌기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실제 우주 모델이 다르다면서, 창세기가 비유인 걸 인정해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헛소리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정말로 창조과학 주장자를 위한 개념찬 발언이다. 그래서 고생물학자인 로버트 바커 교수는 창조과학 주장자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읽고 와라"고 말한 바 있다(...) 참고로 바커 교수는 공룡이 둔한 파충류가 아니라 활발하게 움직이는 온혈동물임을 주장한 '공룡 르네상스'의 주역 중 1명이며, 동시에 에큐메니컬파 그리스도교 신자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대개의 경우, 지구와 하늘과 이 세상의 구성요소, 천체의 움직임과 궤도 그리고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일년과 계절의 순환, 동물과 식물 광물 등의 종류 등에 대해서는 기독교 비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명확한 것이다.그런데, 비신자에게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기독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 수치는 단지 무지한 개인이 조롱받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믿음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성한 성경 저자들 역시 그렇게 무식하다고 생각하게 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힘들게 일한 것도 소용없이, 우리의 성경 저자들이 배움이 없는 이라 여겨져 그들에게 비판받고 거부당하게 될 것이다.
만약 비신자들이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이 실수를 하고 우리의 성경에 대한 그런 멍청한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의 경전이 자신들이 경험과 이성으로 습득한 것들에 대해 오류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 영생의 희망, 하늘의 왕국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경솔하고 서툰 성경 해설자들이 유해한 오류에 빠져 우리의 신성한 성경의 권위 밖의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은 보다 현명한 그들의 형제들에게 전에 없는 곤란과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럴 경우, 그들의 멍청하고 명백히 틀린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그 증거로써 성경을 내세우고 심지어 그들이 기억하는 많은 문장들이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1:7)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I- XIX-39, A.D. 408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전쟁"론을 주장했고, "매춘은 처녀 및 결혼한 부인을 (강간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이라는 식의 주장으로 마르틴 루터 등에게 엄청 까였다(…) 하필 마르틴 루터가 성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신부였으니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적법한 전쟁론'은 전쟁을 하라고 부추기는게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탄압을 받던 소수종파 시기에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 등의 논의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제국의 국교가 된 이상 전쟁에 대한 이론적 정의는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전쟁을 안하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현실정치가 항상 이상적으로 굴러가는것도 아니고, 어쨌든 나라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제국을 지키는 방어전을 치르는 군인들을 살인자라고 단죄할수도 없는 일 아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론은 이런 시대상황에서 나온 당시 많은 신학자들의 고민과 동일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필요악으로서의 전쟁이지, '성전'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매춘에 대한 주장도, 매춘을 필요악으로 몬 형태에 가깝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냐는"라는 질문에 대해)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냐고 묻는 자들을 벌할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
고백록 11권의 내용. 다만 심각하게 보면 안되는게 이건 본인도 '이런 식의 농담으로 대답할 순 없습니다'라고 표현한다. 즉 일부러 틀리게 표현한 농담. 아우구스티노가 내놓은 실제 답은 '창조 이전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과학의 관점과도 비슷하다. 지옥 이야기는 아마 아우구스티노 당대에도 널리 퍼져있던 농담으로 생각된다.
1.6 그밖의 이야깃거리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세례명이 이 성인의 이름이다. 칼의 노래를 집필한 소설가 김훈 선생의 세례명이기도 하다.
2014년에 사망한 故 신해철의 세례명이 바로 이 성인의 이름이다. 다만 신해철이 세례를 받았던 시절엔 표기법이 지금과 달라 장례식 자리에선 '아오스딩'으로 표기되었다. 생전에 신해철은 자신의 세례명이 된 이 성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타락이 꼭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언급한 것이다. 이 세례명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추천했는데, 훗날 가수가 된 신해철은 자신의 미래 모습을 모친이 예견한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2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생몰년도 : ?~604
1번 항목과는 동명이인. 이런 사례가 있기 때문에 히포, 캔터베리 등 교구 지역명을 통해 분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고 잉글랜드로 건너가, 앵글로색슨 민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인물이다. 이때 세례를 준 사람들만 해도 켄트 왕국의 왕과 왕비, 그리고 수천 명의 신하들이 포함되었다고.(…) 그 외에도 주교가 된 이후로는 12개의 교구들을 새로 창설하는 등 맹활약을 펼쳐, 그 결과 601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해당 부지는 세인트 오거스틴 대학교 교내에 있다.- ↑ 칼 야스퍼스의 평가이다. 그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근원을 사유한 철학자는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뿐이다.
- ↑ 前 주교황청 한국대사인 성염 교수의 평이다.
- ↑ Adeodatus. A deo datus로 풀어서 해석하면 하느님이 내린 선물이라는 뜻이 된다.
- ↑ 주의해라, 플라톤의 사상에 빠진게 아니라 플라톤주의에 빠졌다.
- ↑ 천국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신국론>의 책 제목과 맞추기 위해 이렇게 옮겼다.
- ↑ 물론 여기서 말하는건 넓은 의미의 서유럽으로,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 등을 포함한다.
- ↑ 다만 정교회 문화권에서는 서방에서만큼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는데,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대동단결하여 오늘날에도 아우구스티누스에 열광하는 서방과는 달리, 정교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저명한 신학자 A' 정도의 위치이다.
- ↑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 ↑ 구원은 믿음으로 얻으며, 행위는 믿음의 증거이다.
- ↑ De Trinitae(삼위일체론) 1.5.8.
- ↑ 고백록 3.6.10.
- ↑ 고백록 1.1.1: "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 ↑ 고백록 7.10.16.
- ↑ Soliloquia(독백록) 1.1.5.
- ↑ 신국론 19.19.
- ↑ 삼위일체론 8.7.10.
- ↑ 고백록 7.10.16
- ↑ 고백록 10.2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