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골포 해전

이순신의 전투 목록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장림포 해전
(1592년 8월 29일)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에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왜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안골포 해전
날짜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장소
조선 경상도 웅천 안골포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쇼쿠호 일본
지휘관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병력전선 56척전선 42척
피해 규모전사 19명, 부상 114명수천명 전사 및 전선 42척 격침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왜란이 발발한 그해 7월 8일 이순신원균이억기 등과 합세해 한산 섬 앞 바다에서 왜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주력대를 격멸한 뒤에 가덕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왜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를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왜선들은 모두 42척으로 그 중 각각 3층과 2층으로 된 큰 배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해 떠 있었는데, 이는 수군장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제2의 수군 주력대였다.

그러나 포구의 지세가 얕아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왜병들은 험고한 곳에 의지한 채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이 계획을 변경, 여러 장수들에게 번갈아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왜선을 공격토록 하자 마침내 왜병들도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춰 이억기의 함대가 달려와 합세하면서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왜병들의 대응사격에 전사 19명, 부상 114명 이라는 이전까지 이어져 온 해전 중 조선수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왜군의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

왜병들은 사상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큰 배로 옮겨 가면서 구키 요시타카가 기함인 니혼마루를 방어벽으로 삼아서까지 총력전을 펼쳤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전투에서 대다수의 배를 잃고 많은 전사자[1] 를 낸 채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달아난 왜병들이 밤중에 바다로 나올 것을 예측, 왜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날의 전투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해전과 함께 왜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빛나는 해전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연이어 패한 왜군은 부산으로 움츠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였고, 이로써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에 주저앉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담이지만 이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구키 요시타카는 자신의 어립선에 날아온 대장군전이 인상적이었는지 소중히 보관해서 종전 후 귀국했고, 이는 지금도 일본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한산도 대첩이치 전투가 방영된 74화 중반부에 간략히 묘사되었다. 여기서 단역인 일본군 병사 한명이 실금하며 공포에 질린 장면과 조선 수군의 포격에 일본 수군이 나뒹구는 모습으로 나왔다. 다만 실제 역사에 나온 구키 요시타카의 어립선이 대장군전에 맞은 사실과 그것을 챙겨 퇴각하여 현재도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는 해설이 나오지 않은 것이 아쉬운 점이다.
  1. 250여 명의 수급외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익사자 라는 일본군의 피해규모를 보고한 기록이 조선왕조 실록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