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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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 2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알라라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Alaric. '세계의 왕'이라는 뜻의 게르만식 이름. 서고트족의 왕 중에서 두 명이 이 이름을 썼다.이름부터가 세계를 쥐락펴락할 기세

1 서고트 족의 초대 대왕 알라리크 1세

파일:Attachment/알라리크/Alaric.jpg
Alaric I
(370?~410)

로마 제국의 군인[1], 게르만 족의 군주. 서기 395년부터 410년까지 서고트 족의 대왕으로 재위하였고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한 게르만 군주로 유명하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늙은 거인 서로마 제국의 붕괴라는 대사건의 도화선을 당긴 남자.[2]

1.1 로마의 동맹자

알라리크의 등장에 앞서, 알라리크가 활동했던 시기 로마와 게르만의 관계를 반드시 간략히 설명해야 한다. 후기 로마 제국은 자체 군사력 부족을 벌충하고자 이전까지는 로마군의 군제하에서 보조병으로 활용하거나 일방으로 압박하기만 했던 게르만 족을 포이데라티(foederati)라는 이름의 비정규군으로 로마군에 편입하게 한다. 즉,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던 게르만 족들이 부족별로 독자 지휘체계를 유지한 채 로마에 협조하는 형태로 로마와 게르만의 관계가 변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통솔에 실패하여 378년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라는 희대의 흑역사를 적립하기도 하지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발렌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비를 재건하고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고트족을 압박, 로마와 게르만족의 관계를 복원하는데 일단 성공한다.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360년대 말에서 370년대 초에 지금의 루마니아 일대에 해당하는 도나우 강 하구의 페우스 섬에서 출생한 알라리크는 서고트(Visigoth) 족의 유력한 가문인 발티(Balti) 가문 승계자라서 젊어서부터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군에 종군하면서 지휘자로서 역량을 인정받은 듯하다.

로마군 장수로서의 알라리크의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서기 394년 프리기두스 전투에서의 일로, 이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첫째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친족이 되는 플라비우스 티마시우스[3],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사위이자 근위대장이었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각각 지휘했고 여기에 알라리크가 이끄는 2만의 고트 족이 가세하였다[4]. 서로마의 황제 참칭자와 격돌한 프리기두스 전투는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바, 이 전투의 최대 공로자는 스틸리코와 알라리크였다.

1.2 알라리크, 거병

프리기두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서로마와 동로마를 재통합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395년 초에 그만 지병으로 졸사,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5]와 호노리우스[6]가 각각 다스리는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된다. 17세의 아르카디우스나, 10세의 호노리우스 모두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바닥에 가까워서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측근들이 제국을 통치하게 되는데 서로마제국보다는 안정되어 있던 동로마제국은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선친 테오도시우스 장군 시절부터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자문역을 맡아오던 갈리아 아퀴타니아[7] 출신의 법률가 루피누스가 재상 겸 섭정역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자신의 주력 부대를 배치하면서 재건하려 했던 서로마제국은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측근 무장인 스틸리코가 호노리우스의 인척 자격으로 섭정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의 명저, 『로마제국 쇠망사』를 보면, 이 무렵 알라리크는 프리기두스에서의 전공을 기화로, 로마 제국의 정규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이런 알라리크의 희망은 당시 제국의 권력을 두고 스틸리코와 다투던 동로마의 재상 루피누스에 의해 거부되었고 모이시아 일대에 정착하던 서고트 족이 루피누스의 막장 정치에 불만해 반란하는 사태가 겹치면서 알라리크가 반란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추대되고 이어서 "방패 위에 올려지게"[8] 되었다고 한다. 일설로는, 이러한 고트족의 반란은 동로마의 제위를 노리던 루피누스가 유약한 황제 아르카디우스를 제거하려는 음모 일환이었다고도 하고 알라리크가 그리스 일대를 공격하는 동안 자신이 황제가 되게 도우면 알라리크를 돕겠다는 제의했다지만, 진실은 불명이다.

1.3 동로마의 위기

1.3.1 그리스 진공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정책에 따라 서고트 족은 황제의 최고위 포이데라티로서 황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까운 모이시아 일대에 집중으로 정착했었기에 알라리크는 반란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까지 진격할 수 있었지만, 그 전설 같은 3중 성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라 하더라도, 대제 콘스탄티누스 이래로 제국의 중심으로 번영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힘은 당시 서고트 족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에 알라리크는 그리스로의 진격을 결정한다.

여타 황제보다는 선정을 펼쳤던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18년 치세의 결과, 동로마 제국은 상당히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에는 하필 그 강력한 군대가 이리저리 분산된 상태였다. 즉, 티마시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동로마 군대의 주력은 이른바 백(白)훈족으로 알려진 훈족의 분파를 상대하고자 소아시아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테오도시우스 직속 정예군은 프리기두스 전투 이후 아직 스틸리코 장군의 지휘하에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터였다. 이는 곧 동로마, 특히 그리스에는 알라리크의 고트 군대를 상대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고 테르모필레를 돌파한 알라리크는 그리스 전역을 휩쓸면서 동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때 황제 아르카디우스에게 지시받고 그리스로 스틸리코 장군이 상륙하면서 알라리크의 진격은 1차 저지된다. 스틸리코의 찬미자로 유명한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이때 스틸리코는 일리리쿰 일대로 진군하여 알라리크를 압박하였으나 알라리크를 스틸리코가 끝장내면 그 다음은 자기 차례이리라고 추단한 동로마 궁정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알라리크는 결국 귀환하게 되고 이 시점부터 스틸리코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1.3.2 제2차 그리스 진공

그러나 이 직후, 스틸리코가 귀환하게 한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재상 루피누스가 살해되고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혼란에 다시 휩싸인다. 알라리크는 이 기회를 틈타 그리스로 재진격, 아테네, 아티카, 스파르타, 코린트를 위시해 고대 지중해 문명의 중심지로 알려진 여러 도시를 휩쓸면서 정복자라고 자처한다. 야사의 전설로는, 이때 자신을 달래고자 찾아온 아테네의 사신들에게 알라리크가 아테네인들보다 뛰어난 그리스어로 대답하여 아테네인들을 털어 버렸다고도 한다[9].

그러나 397년, 스틸리코 장군이 서로마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진격하면서 이런 알라리크의 행보는 다시 제지되고 스틸리코의 재빠른 진격을 저지하지 못한 알라리크는 폴로이 일대에서 스틸리코에게 포위된다. 알라리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스틸리코가 철수[10]하면서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코린트 해안을 거쳐 에페이로스 일대로 진격한 알라리크는 동로마 제국 궁정과의 협상(이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음)을 이용해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magister militum per Illyricum), 일리리쿰 일대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문제는 일리리쿰 일대는 당시 동서로마의 영역에서, 엄연히 서로마의 영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다는 것, 결국 동로마는 자기 영역에서의 골칫거리를 무마하고자 엉뚱하게 서로마의 재산으로 선심을 쓴 모양이 되었다[11]. 알라리크는 동로마제국의 장군이자 서로마제국의 군구 총독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십분 활용, 동로마제국의 병기창을 마음껏 가동하여 휘하 병사들을 무장하게 하고 동고트 족을 비롯한 게르만 여러 족과 협상하여 자신의 군대를 증강시키면서 서로마의 숙적, 스틸리코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1.4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서기 401년경,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알라리크는 숙적 스틸리코가 지키던 이탈리아 침공을 결정하나 스틸리코의 재능을 두려워한 알라리크는 스틸리코를 이탈리아에서 떼어 내고자 동고트 족을 지도하던 라다가이소[12]와 동맹하고 스틸리코를 북이탈리아에서 끌어낼 것을 사주한다. 이를 승낙한 라다가이소의 동고트 족과 다른 게르만 족들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할 기미를 보이자 스틸리코는 야전군을 이끌고 급히 출진하고 이탈리아 방위선에 공백이 생긴다.

알라리크는 전술가로서의 재능은 스틸리코만 못했다고 여겨지지만,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출중했다고 후대의 혹자에게 대체로 평가된다. 실제 제1차 이탈리아 침공을 앞 둔 상태에서 알라리크는 동고트 족과의 연계로 강적 스틸리코를 배제한 뒤에도 서고트 족의 결속을 공고히 하고자 초자연력을 빌리려 했다고 전한다.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알라리크는 고트 족이 숭배하는 신성한 숲에서 기도하던 중 다음과 같은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망설이지 말라, 세계의 군주(알라리크)여, 바로 이해에 그대는 알프스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도시'(로마)에 입성하게 되리라."

이러한 신탁의 존재로 사기가 오른 서고트 족은, 알라리크의 지휘하에 스틸리코가 없는 북이탈리아로 진입, 한때 밀라노에 체제하던 황제 호노리우스를 사로잡기 일보 직전까지 갈 만큼 이탈리아를 종횡무진하 그의 숙적인 스틸리코는 자신도 전쟁에 능숙했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자신의 조카사위로 맞이할 정도로 신임했던 최측근 무장답게 알라리크에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동고트 족과 연계한 다른 게르만 족들을 잇따라 격파한 스틸리코는 측근 소수 부대만 이끌고 한겨울의 강행군해 밀라노로 귀환, 황제 호노리우스를 구출하여 로마로 피신하게 하고서 북부 전선으로 재이동하여 게르만 족들을 제압하고 그들을 동맹군으로 맞이하여 전력을 증강하게 하는 방식으로 알라리크의 전략을 무산하게 한다.

브리타니아에서 소환된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을 비롯한 각지의 로마 정규군과 스틸리코에게 패한 뒤 협력하게 된 게르만 족의 가세로 전력이 크게 증강된 스틸리코 휘하의 서로마 군대는 402년 4월 6일, 부활절에 지금의 피아몬테에 해당하는 폴렌티아 근교에서 알라리크가 지휘하는 서고트 군대와 격돌한다. 알라리크는 이 전투에서 선전하여 스틸리코 휘하의 기병대장 사울(Saul)을 전사하게 하는 등, 초반에는 서로마군대에 우세를 점했으나 스틸리코가 지휘하는 본대가 도착한 뒤에는 결국 스틸리코에게 패하여 처자마저 내버려 둔 채 휘하 부대만 이끌고 퇴각하지만, 여전히 알라리크 휘하의 서고트 족은 강력했고 알라리크가 터놓은 통로를 이용해 이탈리아로 잇따라 이동한 다른 게르만 부족들이 가세하여 알라리크는 상당한 군세를 회복하나 전술 차원에서 알라리크가 스틸리코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제 스스로 더 잘 알았던 알라리크는 전략 차원에서 스틸리코에게 화의를 청한 뒤 일시 퇴각을 단행한 때 알라리크의 의도는 스틸리코를 방심하게 하고서 이탈리아를 재침공할 기회를 엿보려는 것이었다고 클라우디아누스는 전하나 스틸리코는 여기서 역으로 알라리크를 낚았으니 즉 알라리크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알라리크를 비밀리에 추격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스틸리코는 403년 초로 추정될 무렵에 베로나 근교에서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여 알라리크를 '그 자신이 탄 말의 다리에 자신의 운명을 걸게 할 정도'[13]로 크게 격파한다.

알라리크는 알 수 없는 스틸리코의 의도[14]에 의해 일리리쿰으로 퇴각,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점령은 무산된다.

1.5 제2차 이탈리아 침공

1.5.1 스틸리코와의 화해

스틸리코와 알라리크는 403년 이후, 더는 서로 쓰러뜨릴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에게 대패하고서 약화한 세력을 회복하게 하기에 급급했고 스틸리코는 동고트 족을 비롯한 다수의 다른 게르만 족들을 상대하면서 궁중의 환관들과 원로원 의원들 같은 로마 고위층과의 정쟁에 골몰하여 외부로 힘을 행사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이들의 역량이 호적수라는 말에 어울릴 정도로 동등했다는 사실은 분명했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설정에 애를 먹던 스틸리코로서는 동로마 제국의 실력자라고도 할 알라리크의 힘을 빌리는 것을 바림작하게 고려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408년 5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죽으면서 그때까지 동로마 제국에 정치상으로 밀리는 처지에 있던 서로마 제국은 황제 호노리우스가 동로마 제국의 제위를 겸병하거나 동로마 신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섭정을 맡는 것을 고려하는 등, 동로마 제국에 실력 행사를 고려하기 시작하자 에페이로스에 체류하던 알라리크는 서로마제국의 동맹자가 되기를 청하면서 그 대가로 금 4,000 파운드를 요구한다. 이는 로마 원로원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당시 견딜 수 없었던, 라인 강을 비롯한 각 전선에서 증대되던 게르만 족의 압력을 타개할 유일책은 동로마 제국을 서로마 제국 통합뿐이라고 간주했던(것으로 추정되는) 스틸리코에 의해 사용된다.

1.5.2 스틸리코의 사망과 제1차 로마 포위

그러나 408년 8월, 틱티눔에서의 쿠데타로 말미암아 스틸리코는 실각하여 국가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때까지 스틸리코를 따르던 게르만 외원군(포이데라티)은 스틸리코 파 장군들이 잇따라 숙청당하면서 이탈리아를 떠나 알라리크 휘하에 편입되었다. 그 수가 거의 30,000명에 육박했다. 그들에게는 전쟁 경험이 있었기에 즉시전력감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 덕택에 완벽하게 재기할 수 있게 된 알라리크는 '친구이자 동맹자'인 스틸리코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로 침공, 408년 9월에 로마를 포위하게 된다. 스틸리코와 같은 실력자는커녕 변변한 군대도 없었던 로마로서는 알라리크가 공격해 온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로마 원로원은 평화사절을 파견했다. 이들은 알라리크에게 협상을 제안할 때 로마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포에 떤다는 등으로 동정을 사려 했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건초는 무성할수록 베어내기 좋다!"라는 말을 하여 한껏 로마를 위압하였고 결국 로마 포위를 푸는 대가로 원래 로마에 동맹을 제의하면서 요구했던 금 4,000파운드를 상회하는 거액[15]을 뜯어내게 된다.[16]

1.5.3 제2차 로마 포위

실제로 알라리크는 이 시점까지 로마를 완벽히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 그는 로마 제국의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던 바 있었고 공식으로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이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그가 원했던 것은 서고트 족과 다른 게르만 족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스틸리코의 지위[17]를 그가 물려받는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황실의 인척으로 로마 제국의 고관이라는 사실을 자부했던 스틸리코와는 달리, 그는 어디까지나 서고트 족의 왕으로서 그 지위를 원해서 그는 서로마제국과의 교섭에서 도나우 강 남안과 베네치아 해안에 이르는 영토 전부를 서고트 족의 영지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과중한 요구였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당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던 서로마제국으로서는 알라리크라는 당대 최고 수준의 무장을 입수할 호기이기도 했다.

1.6 로마 약탈과 죽음

그러나 천연의 요새인 라벤나에 웅거하던 데다가 이 무렵 동로마제국에서 보낸 경호 병력까지 도착하여 안심하던 황제 호노리우스는 이러한 알라리크의 요구를 숙고하지도 않은 채 거부해 버리는 병크를 터뜨리고 이에 격노한 알라리크는 409년에 로마로 재진격, 이번에는 로마의 장관 아탈루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호노리우스 배제를 시도하게 된다.

원로원의 무례하고 경솔한 서간, 그리고 황제와 그 측근 신하들에 의한 거듭되는 배신에 알라리크는 분노했고 410년에 서고트군은 사상 최초로 로마를 함락하게 하고 사흘 간에 걸쳐 약탈했다. 이때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비롯해 역대 황제의 무덤이 도굴되고 많은 재물을 약탈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어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아프리카로 남하하던 중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코센차에서 수해을 만나 앓다가 병사했다. 그는 사세 직전까지 부족민들에게 안전한 땅을 찾아 주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알라리크의 유해는 콘센티아 성벽 아래로 흐르는 부센티누스 강의 물길을 잠시 바꾼 다음 드러난 마른 강바닥 위에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고 알라리크의 부하들은 장례를 치르느라 잠시 바꾸어놓았던 물길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공사에 동원된 모든 포로를 살해했다고 한다. 무덤의 위치를 영원히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처남인 아타울프[18]가 알리라크를 뒤를 이었지만 로마의 복수공작에 의한 고트족 내분으로 암살 당했고, 몇년간의 혼란기를 거친 후에 알라리크의 사생아인 테오도리크(Theodoric) 1세가 418년 왕위에 올라 서고트 왕국의 기틀을 잡게 된다.

2 기타

영국의 BBC 방송에서 제작 6부작 다큐멘터리 로마 제국의 탄생과 멸망 마지막화 '몰락의 시작'에서 등장한다. EBS 방영 당시의 성우는 김준.[19] 로마측 인물(스틸리코 제외)에 비해 상당히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된 부족민들에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언제까지 이런 떠돌이 생활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묻는 부족민에게 "곧 좋은 땅이 생길 테니 조금만 참게"라며 따스하게 달래고, 로마군에 고트족을 복무시키는 대가로 부족민이 정착해 살 안전한 땅을 로마로부터 받는다는 조건으로 맹약을 맺는데, 너무 많은 것을 내주는 거 아니냐는 아타울프에게 "황제를 믿어서가 아니라 실세인 스틸리코를 믿기 때문에 약속했다"고 말하지만, 스틸리코가 암살당하고 로마가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로마 안에서 야만족 병사들을 마구 학살하자 황제가 있는 라벤나로 들어가는 대신(라벤나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늪지라서 공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로마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떠올리다 무력 시위로써 로마시를 포위하고는 "우리는 오랫동안 굶주렸다. 로마인들도 굶주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겪어 봐야 한다"며 로마로 들어가는 모든 공급을 차단해 버리고, 로마는 거의 유령도시화된다.

로마에 남아 있던 귀족 의원 및 시민들이 끝까지 로마를 지키며 알라리크와 싸울 것이라는 말에도 코웃음을 치며 "건초는 무성할수록 베어내기 쉽지"라고 한다던가, 전재산을 몸값으로 내놓으라는 요구에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게 되느냐고 묻는 로마측 의원에게 "목숨은 남겨주지"라고 말하는 등 역사 속에서 등장한 알라리크 본인의 발언 역시 재연되었다. 로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조건으로 노리쿰[20]을 고트족이 정착할 땅으로 내달라는 요구에 황제는 찬성하는가 싶더니, 최종 협상을 앞두고 로마에서 알라리크가 철수하자마자 "지금이 알라리크를 칠 기회"라는 환관 올림피우스의 꾐에 넘어가서 퇴각하는 알라리크를 공격하는 병크짓을 저지른다. 알라리크는 이들 로마군을 가볍게 밟아준(...) 뒤 다시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당신들 손으로 나와 떳떳하게 협상할 수 있는 참신한 황제를 뽑아보라"며 원로원 의원들을 부추기고, 로마 지사 아탈루스를 추천해 황제로 앉힌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노리우스를 자극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생각이었는데 호노리우스는 "로마를 굶주리게 하면 로마 시민들이 아탈루스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라는 요비우스의 주장에 북아프리카에서 로마로 오는 곡물 무역로를 끊어버리고, 시민의 지지를 잃은 아탈루스를 황제에서 끌어내린 뒤 알라리크는 "내가 직접 가서 황제와 협상하고 싶다"며 아탈루스가 입었던 황제의 옷을 보내며 "이번에도 약속을 어겼다간 로마는 끝이다. 내 맹세하지."라며 분노를 찍어누른다. 호노리우스는 알라리크에게 라벤나로 오라고 하지만, 고트족 출신으로 알라리크에게 원한이 있었던 장군 사루스가 알라리크와의 협상을 반대하다 급기야 소수 호위병만 데리고 호노리우스가 있는 라벤나로 향하던 알라리크를 중간에서 습격해버린다. 사루스의 얼굴을 알아보고 "황제가 우리를 또 배반했다!"며 절규하면서 알라리크는 결국 꼭지가 돌아 로마를 약탈하게 된다. 로마 공격 직전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투구를 쓰고 말에 올라 게르만 족을 거느리고 로마로 진군.

약탈이 벌어지는 가운데에도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교회는 불태우지 말고 놔둬라"는 명령을 남기는가 하면, 로마 약탈이 끝나고 약탈품을 챙기는 부족민들을 보며 아타울프가 "다 끝났습니다. 이기셨습니다."라고 하자 "이게 우리가 원하던 거였나?"라고 자조하듯 중얼거리고, 당하고만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아타울프의 대답에 씁쓸하게 "그만 가지."라고 대답하는 등, 마냥 악역으로만 보기 힘들다.
  1. 대제 테오도시우스 재위기에 외원군으로 언역되기도 하는 포이데라티의 지휘관으로 로마군에서 봉직한 바 있다.
  2. 로마 약탈 이후로도 서로마 제국은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버텼지만 알라리크가 그나마 남아있던 서로마의 저력과 저항의지를 뿌리째 뽑아버림으로서 게르만 족이 서로마의 땅을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3. 황제 테오도시우스 사후에도 동로마 제국군을 지휘하면서 활약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 의해 숙청
  4. 알라리크의 370년 출생설을 좇으면, 이때 알라리크는 24세에 불과한 나이에 고트 족 전체를 대표하여 정예병 2만 명을 지휘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5.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프리기두스 전투 이전, 이미 아르카디우스를 자신과 함께 동로마를 다스리는 공동 황제로 만들어 두었다.
  6. 프리기두스 승전 직후,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호노리우스를 자신과 공동으로 서로마를 다스리는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했다.
  7. 現 아퀴텐
  8. 즉, 왕으로서 추대
  9. 의외의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무렵 게르만 고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로마와 그리스의 학문을 학습이 유행해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측근이었던 프랑크 족 출신 리코메르 장군은 그리스 학자들을 모아 살롱 일종을 조성하기도 하였고 스틸리코도 클라우디아누스가 한 기록을 보면, 법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즉, 이때까지는 로마 그리스가 소위 '소프트파워'로 게르만족을 '로마화'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이후 로마를 상대로 게르만 족이 자신들의 실력을 확인하게 되면서 이러한 엘리트 게르만 군주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 이르러서는 아예 "로마 엘리트들을 시다바리로 부리는 무식한 게르만 왕"의 구도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10. 역사가 조시무스는,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와의 1차전에서 승리한 뒤 승리에 취해 술을 퍼마시고 놀다가 알라리크를 놓쳤다고 주장하는데 이 기록은 앞뒤가 영 맞지 않기에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리 많지 않다.
  11. 게다가 일리리쿰 일대는 군인 출신 황제들 대부분이 이 일대 출신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후기 로마 제국에서는 군대 유지에 필수 지역이었고 결국 이 일대의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스틸리코 이후 서로마제국 군대의 막장화는 심화하고 만다.
  12. 라틴어로는 라다가이수스, 406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한 그 사람.
  13. 에드워드 기번의 기록
  14.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 알라리크를 대상으로 한 스틸리코의 비밀 교섭 본격화가 이때부터의 일이라고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15. 금 5,000파운드, 은 30,000 파운드, 향료 3,000파운드, 비단옷 4,000벌, 주홍빛으로 염색한 가죽 3,000벌
  16. 이 때 원로원 의원이 "그러면 왕이여,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게 되는 겁니까?"라고 묻자, 알라리크는 "살려는 드릴게그대들의 목숨은 남겨 주지."라고 대답했다.
  17.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쿠이 밀리타이(magister utriusquae militiae), 즉 최고사령관
  18. 로마 약탈 때 호노리우스의 누나 갈라 플라키다아를 포로로 잡았는데 414년 혼인동맹의 형식으로 정식 혼인했다. 참고로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타울프 사망 후 라벤나로의 귀환에 성공해 훗날 서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가 되는 장군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결혼한다.
  19. 2화 '카이사르의 선택'에서 라비에누스도 맡았다.
  20. 도나우 강 남부와 오스트리아 중앙부 및 바이에른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의 로마 시대 명칭(출처: 두산백과). 당시에는 척박한 황무지에 가까운 땅으로 야만족들의 침략에 상시 노출되어 있었던 곳이었기에(작중에서도 "산밖에 없는데 주면 뭐 어때서?"라고 황제가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협상에서 알라리크가 지닌 유리한 위치가 믿기지 않을 만큼 로마에게는 관대한 조건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