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영묘

라틴어 : Mausoleum Augusti
이탈리아어 : Mausoleo di Augusto
영어 : Mausoleum of Augustus

오늘날의 모습
복원 상상도

1 개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8년에 지었으며, 황제와 황족들의 유골이 안장된 영묘(靈廟)이다. 현재는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

2 건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해 명실상부한 로마의 지배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에 대대적인 건축붐을 일으켰는데, 그 첫 번째 계획으로 착수한 공사가 바로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대규모 무덤의 건설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들어선 장소는 캄푸스 마르티우스 인근으로, 당시에는 '도심'으로 여겨졌던 세르비우스 성벽 바깥에 속했다. 이는 시내에 무덤을 쓰지 않는 당대 로마인의 관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영묘는 지름 90m, 높이 42m의 원형 대리석 건물이었으며 영묘 외부에는 노송나무를 심어 사철 푸른색을 유지했다. 영묘의 원뿔 지붕 제일 높은 꼭대기에는 무덤을 건설한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영묘의 통로 앞쪽 좌우에는 로마에서 제작한 화강암 오벨리스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에스퀼리노 언덕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과 퀴리날레 언덕의 대통령궁으로 각각 옮겨졌다.[1]

3 안장자들

아우구스투스가 영묘를 건설한 목적이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무덤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영묘에 가장 먼저 안장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그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켈루스였다. 아들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염두에 둔 사람인데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황제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갓 완공된 영묘에 마르켈루스의 유골을 안장했다. 두 번째 안장자는 아우구스투스 평생의 조력자였으며, 그의 사위가 되어 외손자들을 낳아준 의리의 사나이 아그리파였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모두 사망 후 화장되었고 황금 납골 항아리에 담겨졌다.

안장자출생사망비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42기원전 23아우구스투스의 조카 겸 사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기원전 63/64.10/11.23기원전 12아우구스투스의 사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기원전 38/23.3기원전 9.9.14티베리우스의 동생
옥타비아(소)기원전 69기원전 11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안토니우스의 아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204.2.21아그리파의 장남,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72.8.20아그리파의 차남,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9.2314.8.19로마 제국 초대 황제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5.5.2419.10.10칼리굴라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의 형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323.9.14티베리우스의 외아들
리비아 드루실라BC.58.1.3029.9.28아우구스투스의 아내,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빕사니아 아그리피나기원전 1433.10.17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칼리굴라의 어머니
네로 카이사르630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장남
드루수스 카이사르733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차남
티베리우스기원전 42.11.1637.3.16로마 제국 제2대 황제
안토니아(소)기원전 36.1.3137.9/10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칼리굴라12.8.3141.1.24로마 제국 제3대 황제
율리아 리빌라1841/42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막내딸
클라우디우스기원전 10.8.154.10.13로마 제국 제4대 황제
브리타니쿠스42.2.1255.2.11클라우디우스의 외아들
포파이아 사비나3065네로의 아내
네르바30.11.898.1.27로마 제국 제12대 황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황족들이 묻히던 영묘는 네르바 황제가 묻히면서 만원이 되어 트라야누스 황제는 자신이 만든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원기둥에 황후와 함께 안장되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테베레 강 서안에 새로운 황제묘를 건설했다. 통칭 '하드리아누스 영묘'로 불리는 이 영묘는 교황청 성채로 개조되어 오늘날에는 산탄젤로 성(카스텔 산탄젤로)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4 훼손

원래 영묘 심장부에 있는 방은 이들의 묘실로 이 곳에 안장된 사람들의 황금 납골 항아리가 안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410년 서고트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고 약탈했을 때 영묘가 도굴되어 이 항아리들은 내부 장식품들과 함께 약탈당했다. 따라서 현재는 항아리의 관석들만 남아있으며 이들의 유해는 남아있지 않다.[2] 하지만 이 때는 건물 자체는 멀쩡히 남아있었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요새로 전용되어 크게 훼손되었고 19세기에는 투우장, 공연장으로 쓰이다가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 이 때문에 에스퀼리노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의 오벨리스크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상형문자 위에다가 회칠한 것도 아니다(…).
  2. 하드리아누스 영묘와 트라야누스 원주도 이 때 도굴당했다. 하드리아누스 영묘의 경우 유골이 든 항아리는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고 청동상 등 값이 나가는 장식품들은 서고트족이 약탈해 가거나 테베레 강에 버렸다고 한다.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항아리의 관석 하나는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