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트 왕국

스페인의 역사
Historia de Esp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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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국



그리스반달족
타르테소스인페니키아카르타고서로마비잔티움
~ 718년


에스파냐어 : Reino visigodo
영어 : Visigothic Kingdom
라틴어 : Regnum Visigothorum
서고트, 비스고트, 비시고트라고도 불린다.
418-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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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갈리아를 먹고 있고, 수에비와 반달을 몰아내지 못했던 시절의 강역(톨로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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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되기 직전의 강역(톨레도 왕국)

1 역사

서고트 왕국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알라리크의 뒤를 이어 서고트의 지도자가 된 아타울프가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와 결혼동맹을 맺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남부 갈리아의 지배권을 정치적으로 인정받은 418년, 혹은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를 잡은 451년으로 분류된다.

서고트 왕국의 영토 변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동안 갈리아 남부에 정착하면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서로마가 맞붙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측으로 참전하는 등 로마군에 포에데라티로서 복무했으며, 로마가 점차 쇠약해지자 에우리코 왕이 이끄는 서고트족이 수에비와 반달을 몰아내면서 갈리아 남부와 루시타니아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를 아우르는 강국을 건설하지만, 얼마 안 가 507년 갈리아 지역은 클로비스 1세프랑크 왕국에게 빼앗긴데다 내전에 휘말리는 동안 고토수복을 외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동로마 제국에게 히스파니아 남부 일대도 점령당한다.

그래도 내전을 대강 수습하고 갈리아 일부, 히스파니아 전체, 북아프리카세우타를 아우르는 통일을 625년에 이룩했지만, 고질적인 왕위 다툼은 끊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악화된 상태에서 711년, 당시 반란군을 섬멸하고 돌아오던 길에서 북아프리카를 건너온 우마이야 왕조 이슬람 제국의 공격에 의해 멸망당한다.

서고트족들이 콘스탄티노플처럼 지브롤터 일대를 요새화하여 이슬람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방법은 있었으나 지방 귀족과 중앙정부의 사이는 와해된 상태였고 모로코 세우타에 영토를 둔 줄리안이라는 자가 모로코의 이슬람군에게 배를 제공하였고 1차로 7000명의 병력이 지브롤터 땅을 밟았다. 원래 목적은 당시 왕이었던 로데릭만 제거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울 생각이었으나 예상과 다르게 이슬람에게 중앙정부가 무너지자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었다. 그리고 훗날 후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자 친 아바스 왕조 지사들이 우마이야를 끌어내리려고 카롤루스 대제를 불러들였다가 통수 맞을 뻔 하고 후우마이야 왕조가 분열되자 기독교 국가를 막겠다고 무라비트 왕조를 끌어들였다가 통수맞는다. 통수의 땅 이베리아

사실 당시 숫자는 서고트 왕국군이 약간이나마 많았으나 당시 내전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나서 바로 이슬람군과 싸우느라 과달키비르 전투[1]에서 숫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패하는 동시에 왕 로데릭도 전사하였다. 이때 서고트군영 기병부대가 전열을 이탈하여 이슬람에 붙는 모습은 그야말로 서고트 왕국은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모습은 서고트족의 분열상이었지만 이베리아인들에게는 큰 참극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당시까지 서고트계 게르만족들과 히스파노 로마인들은 문화적 인종적으로 완전히 결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항전하는 지역이 있었으나 이슬람에 의해 점령당했다.[2]

전성기 시절 서고트 왕국은 이베리아에 흩어져있던 소수의 게르만족들을 복속하고 반달족, 수에비족을 쫓아내거나 복속시켰다. 서고트 왕국의 복속 이전에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히스파니아로 내려와서 눌러 앉아 살았으나 이슬람의 핍박 등으로 오늘날 그들의 흔적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들의 영향인지 몰라도 금발의 파란눈의 스페인 사람도 흔치는 않지만 가끔씩 보인다.

툴루즈를 본진으로 하였던 507년 이전을 톨로사 왕국, 에스파냐의 톨레도로 본진를 옮긴 507년 이후를 톨레도 왕국이라고 한다. 톨레도는 오늘날 스페인 주요 여행지중 한 곳이다.

2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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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의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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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브로치. 같은 시기에는 동로마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던 붉은 채색 유리를 사용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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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가 자체적으로 발행한 트레미스.

기본적으로 서고트의 문화적 수준은 여타 게르만계열 국가에 비해 굉장히 높았다. 서고트의 통치 하에서, 로마인들은 서고트에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관직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를 서고트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톨레도에는 로마인으로 구성된 회의가 만들어져 왕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었고, 동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실전되어버린 채색 유리 제조기술이라던가[3], 버트레스와 돔[4], 말굽 아치 등을 포함한 발전된 건축 양식, 산모를 제왕절개해 아이를 꺼낼 수 있는 높은 의료기술[5] 등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비스고트 건축물과 서적들이 무어인들에 의해 소멸되었다시피 할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6] 실제 수준은 더 높을지도 모른다.

화폐의 경우, 초기에는 로마의 솔리두스나 트레미스 등의 화폐를 쓰다가, 이후에는 자체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경제 수준은 781개 가량의 주조소에서 화폐를 발행할 정도였고,[7], 동유럽이나 반달과 지속적인 무역을 했다. 서고트의 합금[8]과 유리, 도자기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포도와 같은 비싼 작물을 기르는 법이나 고급 의복을 생산하는 법을 몰라, 동로마로부터 수입해야 했다고 한다.

요컨대, 서고트는 로마의 문화를 상당부분 수용하였으며 이슬람에 의해 파괴당하기 전까지, 그 대부분을 보존하고 있었다.[9][10] 문화로만 따지면 서고트 왕국은 서유럽 어느 곳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3 정치/사회상

3.1 왕위 계승

명목상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었지만 구체적인 왕위 상속법이 없었기에 세력이 있는 서고트 귀족이라면 누구나 왕위에 도전할 수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교회의 주도로 7세기 초에 통치자 선출의 절차 규정을 법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겨우 그 정도로는 복잡한 후계 문제를 끝낼 수는 없었고, 이슬람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왕위 계승 문제로 서고트 왕국 내에서 분쟁이 있었으며, 애초에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인 자들이 바로 서고트 왕국의 국왕에 반대해 들고 일어난 귀족들이었다. 이렇게 보면 서고트 왕국의 멸망은 어느 정도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었던 셈이다.

가령 형제인 왈리아를 뒤통수친 테오도릭 1세는 형제인 유릭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왕위를 빼앗겼고, 장군이었던 킨다쉰트는 의회로부터 지지를 얻어 선왕인 투르가에게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았다. 테우디우스는 미친 척 다가온 암살자에게 암살당했고, 교회는 아리우스파와 카톨릭파로 갈라져서 각각 왕을 임명했고, 둘로 갈라진 고트는 100년 가까이 내전을 치뤘다.

이로 인한 빈번한 내전 및 외부와의 전쟁은 곧 인구 감소를 불러왔고, 이러한 인구의 인구의 감소는 제일 먼저 군사, 그 다음은 농경에 악영향을 미쳤다. 상공업이나 예술, 종교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몇 명만 있으면 실행되지만, 농경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서고트는 일반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서 수입해야 했다는 기록이 있다.

3.2 법률

아타울프부터 시작해 서고트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로마 문화를 동경했으며, 그것은 로마의 것을 반영한 법전을 편찬하는 것으로 반영되었다. 물론 로마법을 그대로 고트족에게 적용할 수는 없었기에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결국에는 게르만 법과 로마 법이 적절하게 섞인 포룸 루디쿰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률은, 동시대의 다른 나라나 로마와 비교해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여성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등 여성차별이 보였던 로마법이나 여성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슬람법(샤리아)와는 달리 여성의 권리를 크게 신장하는 부분이 있었고[11], 가정 내에서의 폭력을 엄격히 처벌하는 등, 현대적 관점에서 선진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12]

하지만 서고트의 법률이 뛰어났던 부분은, 법학자들과 의회에 의해 법을 사회에 맞게 수정하고 개정하며, 이를 성문화했다는 것이다. 렉스 로마냐 비스고트룸에서부터 시작해 테오도시쿰, 렉스 고트룸 등의 개정을 거쳐 포룸 루디쿰까지 도달한 법전은 선민족 로마와 침략자 게르만의 가치를 융합하려 한 노력의 증거다. 이 노력들 덕에, 일단 왕이 세워지면 서고트의 관료제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고, 경제와 군대를 비롯한 국력 전반을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고 사용할 수 있었다.

3.3 행정

3.3.1 중앙 행정

중앙의 중대사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의회에서 결정되었다. 이 의회의 정확한 명칭은 왕실자문회로, 7세기 경 왕실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문회는 왕이 지방에 파견한 공작들과 그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관리만이 참석할 수 있었으며 입법 및 사법권을 행사했다.

한편, 왕이 소집권을 행사하는 톨레도의 산 타 레오카디아 성당에서의 종교회의 역시 적지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이들은 이단문제 같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 뿐만 아니라 국왕의 선출과 폐위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어 내전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3.3.2 지방행정

서고트 왕국 지방 행정의 중추는 여려개로 나뉘어진 와 그러한 주를 통치하는 중앙의 왕이 파견한 공작(dux)이었다. 이러한 공작 밑에는 작은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백작(count)과 도시 참사회가 유지되었다.

한편 외부의 침략이 거세지고 왕국 내에서도 내전이 발생하면서, 마치 중세 서유럽의 영주와 비슷한 대토지 소유주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선출과 형벌의 면제라는 특혜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는 특권까지 향유하게 된다.

4 대유대인 정책

참고로 초기의 유대인에 대한 처우는 로마의 법을 그대로 따랐다. 다시 말하면 차별은 있었지만 심각하진 않은 정도.[13] 하지만 아리우스파와 가톨릭의 내전에서, (반삼위일체론이라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였던)아리우스파를 이긴 가톨릭파(유대인에게 적대적인)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서고트 왕국에 대해 강한 적개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이슬람 제국의 침공 당시 유대인들의 배반을 초래하게 되었다.

5 군사

남아있는 기록들이 단편적이다. 일단 4세기 이전에는 어느 게르만족과 같이 경무장한 보병 중심이었을 것이 분명하고, 점차 로마화가 진행되면서 게르만과 로마 양식이 혼합된 미늘 갑옷을 착용한다.

편제는 대게 서로마와 비슷했다. 잘 무장한 로마병과 서고트 병사간의 장비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기병을 육성했으나 수가 적었으며, 전술적인 부분도 (다른 게르만 부족과 같이)어느 정도 서로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역시 서로마와 비슷하게, 주무장은 라멜라 갑옷과 창, 방패, 검이었다. 이중 검과 갑옷은 패턴 웰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마의 그것보다, 혹은 동급으로 견고하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으나 창날은 무지하게 약했다고 한다.

해군은 좀 규모가 작았지만 로마를 바다에서 공격했다는 기록 정도는 있다. 비스고트 문헌이나 유물은 없지만, 동로마 기록에 '우리 해군이 반달과 서고트의 연합군을 몰살시켰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최소 수송을 위한 해군 정도는 갖춰져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랍 해적에 대한 대응은 못한 걸로 봐서 이 패전 이후로 해군이 해체되었을 수도 있다.

6 외교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서, 동고트의 테오도릭 대왕 (서고트의 테오도릭 1세나 2세와는 다른 인물이다.)은 서고트의 왕 알라릭 2세와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알라릭 2세가 프랑크 왕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한동안 서고트 왕국의 섭정으로 서고트 왕국까지 통치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서고트는 일단 명목상 서로마 황제의 수하로서 카탈라우눔 전투 같은 전투에 종군하고 서로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지만, 서로마 제국 자체가 무능한 암군들의 실정과 반달족,프랑크족, 색슨족 등 다른 게르만족들의 압력으로 워낙 빌빌거렸다보니 가끔 무리하게 하사금을 요구하거나, 기분 나쁘면 한 대씩 치고 윽박지르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상하 관계였다.

반달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험악했지만 이후 공적이 된 동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친밀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수에비 왕국과 바스크족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뤘으며, 이중 수에비 왕국은 레오비길드 왕에게 결국 정복되었으나 바스크족은 끝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과는 초기에는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고토 수복 전쟁의 일환으로 서고트 왕국의 내전에 개입해 핍박받던 정통 기독교인의 지지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히스파니아 속주를 설치하면서 서로 전쟁을 치루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딱히 외교관계가 없었으나, 갈리아를 평정하고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진 프랑크족을 통합한 클로비스 1세에게 부예 전투에서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는 수모까지 겪으며 국토의 절반인 아키텐, 셉티마니아 해안가 이외 갈리아 영역을 잃으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7 언어

서고트인들은 게르만어 동게르만어파의 고트어를 사용하였으나 곧 로마화되어 히스파니아 로마인들의 로망스어를 썼으며 고트어는 7세기에 완전히 사멸하였다. 그러나 현 스페인어포르투갈어에는 약간이나마 서고트어의 영향이 있으며 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지명, 인명에 알바로, 페르난도(프리데난드), 로드리고(로데릭), 로센도(루데신드), 아르기미로, 엘비라(겔로비라), 알폰소(아드폰스, 알폰스, 일데폰스), 곤살로(군디살브), 아돌포(아타울프, 아돌프), 라미로, 베르문도, 갈린도, 고메스(구마즈) 등 서고트족에서 유래된 이름이 상당수 나타난다.

8 종교

서고트 왕국의 국교는 서고트인들이 믿고 있던 기독교의 이단 종파 아리우스파였으나 레카레드 1세 시대 587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9 역대 서고트 왕국의 왕

이름재위기간
족장 시대
아타나리크369년 – 381년
프르티게른376년 – 380년
발티 왕조
알라리크395년 – 410년
아타울푸스410년 – 415년
시게리크415년
왈리아415년 – 419년
테오도리크 1세419년 – 451년
토리스문트451년 – 453년
테오도리크 2세453년 – 466년
유리크466년 – 484년
알라리크 2세484년 – 507년
게사레크507년 – 511년
동고트 왕국 테오도릭 대왕의 섭정시대 (511년–526년)[14]
알마라리크526년 – 531년
발티 왕조 이후의 왕조
테우디스531년 – 548년
테우디기젤548년 – 549년
아길라549년 – 554년
톨레도의 아리우스 기독교 왕조
아타나길트554년 – 567년
리우바 1세568년 – 573년
리우비길트568년 – 586년
톨레도의 가톨릭 왕조
레카레드 1세586년 – 601년
리우바 2세601년 – 603년
위테리크603년 – 610년
군데마르610년 – 612년
시세부트612년 – 621년
렉카레드 2세621년
수인틸라621년 – 631년
시세난트631년 – 636년
킨틸라636년 – 640년
툴가640년 – 641년
킨다수인트641년 – 649년
레케수인트649년 – 672년
왐바672년 – 680년
에르위그680년 – 687년
에르기카687년 – 701년
위트차701년 – 710년
로데리크[15]710년 – 711년
아길라 2세[16]711년 – 713년
아르도[17]713년 – 721년

10 관련 문서

  1. 혹은 세레스 데 라 프론테라 전투
  2. 다만 서고트 귀족 출신 펠라요가 북부 산악지대 아스투리아스에 코바동가 전투에서 회교 군대를 격퇴시켜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립하여 레콘키스타의 근원이 된다.
  3. 아랍권도 동로마에서 청색이나 녹색 유리를 만드는 법 등은 배워왔으나 빨간색, 갈색 유리 등은 만들지 못했다. 서고트의 유리는 특별히 '서고트(visigoth) 유리'라고도 불리며, 중세 서유럽의 귀중품 취급을 받았다.
  4. 제대로 된 돔은 남아있는 게 없지만, 소형 돔과, 돔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반원통 볼트 형태가 중기 유적에 있다. 즉, 돔을 만들기위한 기술은 있었다는 뜻
  5. 왜 이걸 강조하냐면, 통일 히스파니아의 계승자가 되었어야 할 아스투리아스의 이사벨라가 애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6. 서고트의 도시였던 톨레도, 코르도바 등에 남은 유적이 없다. 남아있는 건 시골 구석의 조그마한 교회 건물들 정도 다만 톨레도와 코르도바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대도시로서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해오고 그 때문에 교회들이 점차 사라지고 모스크가 들어서면서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7. 단, 주조소의 개수에 비해 발견된 동전은 3500개 정도로 적다. 귀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고트의 다른 유산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도래 이후로 파괴되었을 거라 추정된다.
  8. 구리와 철로 만든 제품이 유명했다.
  9. 얼마나 파괴당했는지, 남은 고트어 문헌은 20개도 안 될 지경이었다. 다만 포룸 루디쿰 정도는 그라나다의 도서관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부부왕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이 포룸 루디쿰을 경쟁적으로 카탈루냐어와 카스티야어로 번역했다.
  10. 다만 이렇게 파괴가 된건 의도적인 파괴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하면 왕왕 일어나는 일이고 교류가 끊기면 문화가 유실되는 사례가 많다. 일례로 8~9세기 이슬람 제국인 아바스 왕조의 과학, 문화는 상당히 발전했고 로마나 그리스의 고전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서유럽에서는 그 고전들이 이미 유실된 상태여서 이슬람 쪽에서 수입해야 했다. 이렇게 되 원인이 서유럽에서는 전쟁이 끊이질 않아서 과학이나 문화가 지체되었고 당시 아바스 왕조는 평화기여서 발전이 빠른 것이 이유다.
  11. 이를테면 강간당한 여자는 다만 납치되었다는 사실 만으로 강간을 증명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가해자 재산의 절반을 요구할 수 있는 등.
  12. 물론 엄청나게 선진적이였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노예제가 있었고, 유태인을 차별했다.
  13. "일부는 정부의 높은 위치에 있었고, 일부는 군대의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일부는 군에 모집되어 수비를 맡았다. 물론 대부분은 낮은 위치였지만." Jane S. Gerber, The Jews of Spain: A History of the Sephardic Experience (New York: Free Press, 1992), p. 9.
  14. 이때 동고트와 서고트 왕국이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가 테오도릭 사후 재분열된다.
  15. 킨다수인트(친다스윈스) 왕의 아들. 사실상 서고트 왕조의 마지막 정식 군주로 비정되며,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압둘 아지즈에게 톨레도와 왕비 에길로나를 빼앗기고 살해 당했다.
  16. 711년 톨레도 함락 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아랍군에 대항했다.
  17. 서고트의 마지막 추정 군주. 무슬림 왕조에 패사했고, 일부 사학자들은 아르도의 패사를 레콩키스타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