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룡

(알바왕에서 넘어옴)
인생, 피하지말고 정면돌파가 정답이다!
세상에 할 일은 많잖아요.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해서 열심히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겨낼 수 있어요.

1 개요

1960~2014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해서 빚을 갚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대출갤러 의문의 1패

2 생애

1960년 전라북도 군산 출신이다. 20대부터 옷 가게, 식당, 과일 가게 등 자영업을 해왔다. 1995년쯤 전주시 효자동의 시계 도매업 사장이 싼값에 사업을 정리한다는 소문을 듣고 ‘헐값에 내놓는다니 이참에 사업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사업을 인수했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며 생활했다.

“그런 안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니 잘될 턱이 있겠어요? 처음엔 사장 소리도 듣고 잘될 때는 하루 순수익이 100만원이 넘을 때도 있었어요.

2.1 빚쟁이 시절

하지만 갑작스레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거래처가 하나둘씩 끊겼고 곧이어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그의 사업 빚은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시계방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한 방에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곳 저 곳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지만, 큰돈을 노리고 투자했던 돈들은 도리어 3억 5000만원의 빚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이 씨는 2000년 초 부도를 내고 말았다.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를 택했다. 아내를 차에 태우고 부산에서 격포로, 또 부안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빚쟁이들이 찾아올까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주소지가 불투명한 상태라 기소중지가 되기도 했고 군산검문소에 걸려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끌려가는 경험도 해야만 했다. 끝내 구속위기에 처한 이 씨는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면 가족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 마지막으로 작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00만 원을 겨우 받아 합의를 보고 위기를 넘겼다. 어음을 해결하지 못하면 구속을 당하기 때문에, 그 돈과 아파트를 판 돈을 합쳐 어음을 회수했다.

빚쟁이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해서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빚에 쫓기면서도 그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돈 못 받아서 복장이 터지는데 전화까지 안 받으면 채권자들이 얼마나 숨이 넘어가겠냐는 거다.

그 후 실의에 빠져 1년 가까이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2.1.1 알바왕

마음을 다잡고, 술 담배를 끊고, 7개의 아르바이트에 도전했다. 찜질방 청소, 떡 배달, 신문 배달, 학원차량 운영, 폐지 줍기 등 근면과 성실, 시간 엄수를 무기 삼아 하루 24시간 중 2시간을 잠 자고 22시간 노동을 했다.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만 ~ 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 ~ 80만 원, 떡 배달 150만 ~ 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세후 450만 원 정도 생겼고, 유류비가 100만원 정도 들어서 남은 돈은 350만 원이다. 10년 동안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당시
06:30-09:30떡 공장에 도착해 떡 배달 준비 및 3군데 마트에 떡 배송.
09:30-11:30떡 도시락 포장 작업
11:30-12:30군산 대우자동차 떡 배달
13:00-20:30학원 차 운전
20:30-23:30떡 포장 작업 및 군산 대우자동차 야간 배달
24:00-02:00목욕탕 청소
02:00-03:30배달할 신문에 광고지를 삽입하는 작업.
03:30-05:00신문 배달
05:00-06:00신문 배달이 끝나면 집에 들러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취침은 중간중간에 빈 시간을 이용한다)

결국 2008년 10월 29일 마침내 10년에 걸쳐 빚 3억 5천만 원을 모두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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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남은 빚 100만원을 송금하면서 총 3억 5천만원을 모두 갚는 故 이종룡씨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일하고자 했었지만 고졸 학력에 변변한 기술 없는 40대 남자가 제대로 된 직업 갖기는 어려웠고, 그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으며, 심지어 공사판에 가도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 인부들의 심부름만 했다고 했다.

그는 새벽에 신문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 벌었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다시 음주와 도박에 빠졌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가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하고는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다시 깨달았다. 길에서 주운 전기장판을 쓰기로 했는데 합선되어서 불이라도 날 까봐 노심초사했다. 3일 뒤, 그는 니퍼를 가져와 스스로 송곳니 2개를 뽑았다. 무식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그때 그는 자신의 손으로 송곳니를 뽑을 만큼 절박했다. 그 후로 나약해질 때마다 뽑은 송곳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졌다. 지금도 그가 잘 웃지 않는 이유다. 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2009년 대우자동차가 경영난으로 떡 배달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그는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로 대체하는 등 절대 쉬는 법이 없었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운전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고 깜깜한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다가 넘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무릎을 붙잡고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죽도록 고생만 하고 돈 한 푼 못 받은 채 잘린 적도 부지기수. 추운 겨울 젖은 신발을 신고 배달을 할 때에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처음 2년 동안은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게 3년 정도였다. 그러다 떡집 주인 아주머니가 딱한 사정을 알고 아침밥을 주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구인정보는 생활정보지에서 얻는다. 그가 했던 거의 모든 아르바이트는 생활정보지 덕이었다. 또 아르바이트 장소는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잡는다.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떡공장이나 학원, 목욕탕 모두 그의 승합차로 5분 이내 거리에 있다. 이동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다.

그가 별다른 기술이나 학력이 없었지만 꾸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신문 배달이며 목욕탕이며 떡 공장이며, 일하는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뀌더라고요. 대부분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못해요. ‘아르바이트’ 하면 필요할 때 잠시 들렀다가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거든요. 저 역시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은 그만둬야지’ 했어요. 힘들 때마다 쉽게 그만둘 생각을 품었던 건 그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였죠.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는 직업이다’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아르바이트는 쉽게 그만둬도 직업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떡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직원들이 일이 힘들다거나 보수가 적다고 쉽게 그만 둘 때 타이르기도 했어."

"돈의 많고 적음만 따지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금 할 일이 있고 또 열심히 살 수 있는데 돈만 바라보고 일을 하면 그게 얼마나 불행한 거야."

그 외에 폐지 수집으로 부수입도 올린다. 예상보다 아르바이트가 30분 정도 빨리 끝날 때면 폐휴지를 줍는 부지런함도 보였다. 한달 동안 배달에 소요되는 기름값은 거의 폐지를 고물상에 팔아 얻는 돈으로 충당한다. 월 2톤 가량 주워 월 20만원 정도를 받고 있다.

또한 이 씨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 배달하러 가는 30초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신문 헤드라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익혔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면 <좋은 생각> 같은 작은 책을 틈틈이 읽기도 했다. 이렇게 그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총 20시간으로 이동하는 거리만도 약 400㎞에 달했다.

“학벌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 이런 것들이 인생에 아무리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의지만큼 강력한 것은 없어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고 모두 술주정뱅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환경이 아무리 힘들어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으면 술주정뱅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요. 너무 뻔한 얘기 같죠(웃음)? 근데 제가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2.1.2 최저 수준의 생활

5살 연상의 아내와 아들이 있었는데, 10년 동안 버는 족족 빚을 갚고 생활비에는 한 푼도 보태지 못했는데도 10년 넘게 가족이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씨는 자신을 구해준 건 가족이라고 말했다. 아들은 공부를 잘 해서 서울로 대학을 가려고 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고졸이 되었다. 경기도 광주에 자리를 잡은 아들은 가끔 와 냉장고도 채워주고 다달이 용돈을 부쳐주며 성실하게 살고 있다. 가끔 아들에게 대학 못 보낸 미안함을 내비치면, 요즘 대학 나오고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며 자기는 제 밥벌이는 하고 있으니 너무 미안해 마시라고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한다고.

이씨는 10년 동안 3억5천만원이란 빚에 시달렸던 이유도 1억원의 빚을 우습게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값이 오르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빚을 갚지 않고 버티다가 빚을 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집을 줄이고 사업 규모를 줄이고 먹고 자는 것을 줄여서라도 빚은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단순히 생활비를 아끼고 지출을 줄이는 것으로는 거액의 빚을 갚을 수 없다. 차를 가지고 다니니 기름값이 나갔고 일을 하자니 밥도 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씨는 술을 끊어야 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자고 싶은 거 다 자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없다. 과감히 포기하고 줄일 것은 끝까지 줄여라. 신용을 잃어본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신용은 생명이다. 은행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과 가족에게서 신용을 잃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신용과 신뢰는 시간 엄수에서 시작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 당신이라면 약속을 자주 어기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겠는가."

한 달 용돈은 2만원만 썼다.

2.2 빚 청산 이후

그 후에도 "내 몸이 편안하면 다시 옛날에 방탕했던 모습이 나올까봐 일을 포기를 못하겠어요"라면서 7개의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며 연 500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2009년에는 3억 5천만원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3 사망

그러나 과도한 일로 건강을 돌보지 못한 탓에 2014년 2월 대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특히 대장암은 적은 수면과 관계가 아주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1] 과로로 인한 수면부족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몸을 돌보지 않는 극단적인 노동도 결국 몸에 해롭다는 걸 다시 증명하고 말았다.

4 방송 출연

방송에 출연한 이유를 묻자, 사람들에게 "이겨내지 못할 절망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5 관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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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간 중간마다 이종룡씨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이 실려 있어, 그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각 장의 마지막에는 이종룡씨의 간단한 조언이 기술되어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실생활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 대장은 제 2의 라고도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