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시 한조

역대 조선 총독
임시대리4대5대
우가키 가즈시게야마나시 한조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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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梨 半造 1864.4.6 ~ 1944.7.2
조선총독 임기 : 1927년 12월 10일 - 1929년 8월 17일

조선총독부 제4대 총독. 역대 조선총독중에서 유일하게 공기화된 총독. 부패한 "금권장군"이자 정치질과 탐관오리로 유명했는데, 결국 이것으로 인해 정치생명이 끝장났다. 조선총독부 부임전에도 시베리아 출정 당시 일본군이 획득한 황금을 횡령하는 등의 혐의로 군부내에서 '배금장군'이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1 뇌물로 얼룩진 과거

카나가와현 출신. 188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에, 1892년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 1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뒤 1921년 하라 타카시 내각의 육군 대신이 되었다. 이 시절부터 탐관오리로 유명했다는데, 이것이 나중에 조선 총독 시절의 뇌물 의혹에 연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동 대지진 시절에는 관동 계엄 사령관 및 도쿄 경비 사령관이 되었다. 1925년에 전역해서 예비역이 되었다.

2 조선에서도 벌인 부패행각

전임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 제독1927년 4월 4일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6월 2일 ~ 8월4일)의 전권대표로 총독직을 일시 사임하자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 직책을 맡으면서 그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장 났는데...

취임 다음해인 1928년 5월에 황족이자 쇼와 덴노의 장인인 육군대장 쿠니노미야 쿠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이 대만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조명하에게 암살될뻔한 사건이 벌어지면서[1] 조선인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야마나시도 간접적인 책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생명이 끝장난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한 미곡상이 경성(서울)에 미곡 거래소 설립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야마나시 장군의 측근에게 당시 금액으로 5만엔의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을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조선총독에서 사임하게 되고 전임 총독 사이토 제독이 다시 총독으로 복귀했다.

3 이후

야마나시 장군은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로 인해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그의 정치생명은 끝장나고 1944년 8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자택에서 칩거했다.

리그베다 위키 시절 가장 늦게 작성된 조선총독이다.
  1. 결국 이듬해 1월에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