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明河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05년 4월 8일 ~ 1928년 10월 10일
서울대공원 동상[1]
일본 황족을 처단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독립운동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우리나라나 중국 본토가 아닌 타이완에서 활동하였다.
총이나 폭탄이 아닌 도검을 이용해서 의거를 일으킨 것도 특이한 점.
황해도 송화군 태생으로 젊었을 때는 황해도 신천군 군청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 운동과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를 보고 깨달은 바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범을 잡기 위해서는 범의 소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가명을 쓰면서 오사카에서 전기제작소의 직공, 메리야스공장 노동자, 상점원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상공전문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일본에서 뜻을 펼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을 떠나 1927년 11월 기착지인 타이완에 도착했다가, 바로 상하이로 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타이중 시로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녹차밭에서 일꾼으로 일하면서 타이완의 항일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대만총독부의 총독 등 요인을 암살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답답해하던 중, 1928년 5월 타이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당시 덴노 히로히토의 장인(고준황후의 아비)이자 본인도 황족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왕이 육군특별검열사로 파견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구니노미야를 처단하기로 했다. 5월 14일 타이중 시에서 열린 환영식 환영인파 속에서 기다리다가 구미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그를 독묻은 칼[2]로 찌르고[3]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구니노미야는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칼에 찔린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다음해 1월 죽었다. 조명하 의사는 같은 해 7월 18일 타이완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순국했다. 이 사건은 이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가 사임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관리 및 후속조치 미흡)
조국이 독립된 후인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現 독립장)이 추서되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조명하 의사의 동상이 과천 서울대공원에 있다. 주 타이베이 한국학교에도 조 의사의 동상이 있다.#
1989년 5월 13일에는 KBS에서 특집드라마 '조명하'를 방영하였으며, 탤런트 김영철이 조명하 의사 역을 맡았다.- ↑ Sony DSC-RX10, 2015년, 사진 촬영자 최광모, 공용 도메인 기증
- ↑ 독이 아니라 배설물을 가볍게 도포했다고도 한다. 모욕하려는 의도로 배설물을 묻힌 게 아니라 상처에 감염증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
- ↑ 조명하 의사는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조직과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기 때문에 총이나 폭탄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타이완의 항일운동가들에게 무술과 검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