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일본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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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라 타카시 | 다카하시 고레키요 |
原(はら) 敬(たかし)[1]
1856년 2월 9일 ~ 1921년 11월 4일
일본의 19대 총리. 중의원에서 바로 총리로 선출된 첫 케이스. 전형적인 정치인이자 민간인 총리.
난부 번의 하급 무사 가문 출신이었으나, 1875년 20살이 되자 스스로 평민으로 독립했다. 기자 출신으로, 1896년 주한 공사를 맡기도 했다.
당시 군부가 깽판을 쳤던 전전(戰前)의 일본 사회에서, 그리고 안정적인 권력 기반을 갖추기 어려운 의원내각제 체제에서 38개월이라는 긴 기간을 총리로 재직했다. 여러 모로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양반. 당시 일본 사회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다 안다. 군인이 정치인이나 국가 원로를 짐승 다루듯이 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고, 전쟁이나 그런 행위를 반대하는 자는 총리라도 처단 대상으로 간주해서 어떤 수단을 쓰든 죽였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총리 자리를 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더욱 오래 내각을 유지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19살 때 처음 쓴 일기를 죽을 때까지 매일 썼다고. 게다가 본인이 죽는 순간조차 메모 형식으로 일기를 써서 남겼다고 하니, 흠좀무. 그의 일기는 전전의 일본 정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그의 임기 중간에 조선에서 3.1 운동이 터졌다. 이 때 무단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꾼 것도 하라였다.
그 밖에, 교통운수시책의 확충을 내세우며 내각철도원을 철도성으로 승격시키기도 하는 등 철도 부설에 각별히 신경을 쓴 총리이다. 자신의 고향인 이와테에 신선을 건설하려고 국회에서 논의를 하고 있을 때 한 의원이 "그런 산골에 철도라니, 원숭이라도 태울 셈이요?"라고 하자 하라는 "철도규칙에는 원숭이를 태워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라며 위트있게 대처했다고 한다. 그 철도가 현재의 야마다선.
총리 재직 중인 1921년 11월 4일에 도쿄역에서 나카오카 곤이치(1903년 ~ 1980년)라는 청년의 칼에 찔려 죽었는데, 정치 스타일에 불만을 품은 군부의 소행이 아니라 극우 범죄단체의 소행이었다. 조금 황당하게도 하찮은 민간인이 천황가의 혼인 문제에 관여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와쿠라 토모미급이 아니면 안돼 당시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결혼 문제를 앞두고,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선정된 것에 불만을 가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배후에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이것이 발각되어 야마가타가 난처해지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하라가 해명하고 중재를 해준 일이 있었다. 친구를 잘못 사귀면 이렇게 된다 이후 나카오카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지만 사건 당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15년으로 감형되었다가.... 여차저차 해서 1934년에 사면되었다.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 함.
- ↑ '하라 케이(혹은 게이)', 혹은 '하라 사토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 국내 일본지역학 관련 서적을 보면 '하라 케이'로 기재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