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일본 총리 | ||||
임시겸임 | → | 30대 | → | 31대 |
다카하시 고레키요 | 사이토 마코토 | 오카다 게이스케 | ||
역대 조선 총독 | ||||
2대 | → | 3대 | → | 임시대리 |
하세가와 요시미치 | 사이토 마코토 | 우가키 가즈시게 | ||
4대 | → | 5대 | → | 6대 |
야마나시 한조 | 사이토 마코토 | 우가키 가즈시게 | ||
斎藤実 (さいとう まこと)
1858년 12월 2일 ~ 1936년 2월 26일
1차 총독 임기 : 1919년 8월 12일(부임은 9월 1일) ~ 1927년 4월 4일,
2차 총독 임기 : 1929년 8월 17일 ~ 1931년 6월 17일
총리 임기 : 1932년 5월 26일 ~ 1934년 7월 8일
350px
(초상화)
일본의 군인(해군 대장), 정치인. 최장기 조선 총독과 총리를 지냈다.
1 제독이 되기까지
현재 이와테 현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해군을 주름잡은 사츠마(카고시마) 번 출신이 아니고, 순전히 자기 힘으로 승진을 거듭한 실력파이다. 일찌기 영국에 오랜기간동안 유학하여 자유주의적 성향이 몸에 배었고, 일선활동보다는 해군성에 오래 재직하는 관료군인으로서 대해군을 건설하는데 아키야마 사네유키 [제독]과 함께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본의 조약파(条約派)[1] 해군 제독 출신으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방 세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도 풍부했다(미국 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한몫 단단히 했다). 해군중장 니게 카게노리 제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2 조선에서의 문화 통치
3.1 운동 이후 무력적인 통치로는 조선의 통치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일본은 일단 하세가와 요시미치 장군을 자른 뒤,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 도입의 필요를 느끼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사이토 제독을 선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탁된 해군 출신 조선 총독이 되었다. 사실 이 사람이 조선 총독으로 뽑히게 된 이유는 민간인 코스프레를 육군에 비해서 그나마 좀 하는 편인 해군 인사 중 가장 민간인 코스프레를 잘해서라는 게 크다. 훗날 총리대신 임용 당시 타임지에서도 이런 언급을 했다. 민간인하고 구별이 안 된다고.
그는 1927년 4월 4일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6월 2일 ~ 8월4일)의 전권대표로 총독직을 일시 사임하나, 후임 야마나시 한조 장군이 비리[2]로 사임하자 1929년 8월 17일 재 취임해 1931년 6월 17일까지 통치한다. 가히 십년 통치로, 35년 조선 통치 가운데 1/4을 넘어 1/3에 육박한다.
그의 조선 통치는 일본 입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그의 통치 시대를 문화 통치 시대라 한다.
흔히 문화 통치를 조선 민족 정기 말살을 위한 악랄한 통치수단으로 취급하지만, 단순한 (1930년대 이후의) 민족 말살 정책만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민주주의 운동붐이 한창이었고 그러한 민주주의와 평화운동의 분위기가 조선 통치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이때문에 교원까지 칼차고 수업하던 것이 완화되었고, 치안을 책임지던 헌병 대신 보통 경찰이 도입되었으며, 조선인들이 하급 관리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나 이후 상황을 살펴봐도 그렇고 조선의 문화통치 역시 실상은 민족 기만 통치이자 민족 이간책이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는 저항을 느슨하게 하고 조선인들에게 환심과 지지율을 얻기 위해 시행한 회유책이었지, 실질적으로 조선인의 자유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식민통치기 중 조선인들이 약간이라도 숨 좀 편히 쉴 수 있었던 시기 정도로 보면 된다.
데라우치와 하세가와의 폭압통치보다 훨씬 간교한 통치와 식민사관 연구의 기반(1925년의 조선사 편수회)도 사이토 제독이 닦았다. 1930년대 ~ 1940년대 징용, 징병 등을 찬양하는 친일파들이 상당했던 것 모두 모두 모두 이 인간이 그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흔히 아베 노부유키 장군의 괴설 떡밥과 함께 식민교육으로 조선을 장악하겠다는 사이토 제독의 '신교육칙어' 떡밥이 있으나 알다시피 칙어라는 것은 천황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일개 제독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육칙어는 일본의 패전 때까지 개정되지도 않았다. 교육칙어는 유교 봉건적 도덕관을 주제로 한 일제스러운 스타일이라 신교육칙어란 출처미상의 문서와는 맥락도 매우 다르다. 물론 이러한 역사상 사실이나 차이 때문에 사이토 제독이 우리나라에 박아놓은 역사왜곡과 식민사관을 부정할 순 없다.
후임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장군 역시 30년대까지의 문화통치와 공업화 정책으로 충실하게 뒤를 이었다.
앞서 말했듯 문화통치를 시행한 간교한 인물이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합리성을 중시하는 온건파 인물로서 전쟁으로 치닫는 일본을 멈춰보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조선에서 친일파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고 독립 운동이 계파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시기 또한 이 인간이 조선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였다고. 당시 조선의 사회상은 일제강점기의 민족 분열 통치 시기를 참조할 것.
부부 동반으로 최초로 조선에 올라온 총독이기도 하다. 부부 동반으로 군복이 아닌 평범한 양복에 중절모 차림으로 나와 문화통치를 선전한 적도 있다.[3] 그렇게 취임하러 온 당일에 강우규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해서 친일고관과 일본인을 합쳐 37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가까이서 구경하던 민간인 중에도 몇 명의 일본인 부상자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암살 대상이었던 사이토 제독은 그다지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고 한다.
한편 강우규가 재판이 마무리될 때 한 최후의 일언(마지막 항소) 내용은 링크와 같다[4]. 요약하자면 죽이려고 한 것은 사이토 제독 한 사람 뿐이며, 주변의 민간인을 부상 입힌 것은 본의가 아니라는 것.
3 총리취임
그후 1932년 5월 15일 일어난 5.15 사건[5] 이후 군부의 폭주를 경계했고, 사이온지 긴모치와 원로들이 개별적으로 만나 회의한 결과 사이토 제독의 온건노선에 호응하여 총리에 임명 되었다. 정치계의 거물인 사이온지 긴모치가 독자적으로 총리감을 추천하는 방식(...)이 아닌 원로들과의 협의를 통해 이끌어 냈다는 점은 그만큼 일본의 상황이 안 좋았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쇼와 덴노는 5.15사건 이후 '인격이 훌륭한 총리' '파시스트 성향 절대 불가', '국제관계에 중심을 둔 온건파'라는 조건을 모두 갖춘 인재를 원했다. 또한, 해군 출신 총리는 전반적으로 정치권에서 해군보다 큰 힘을 행사하던 육군이 문민 출신 관료들과 대립할 때 타협안으로 옹립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역시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육군이 잘못한 정책을 수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이토 역시 그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20대 총리였던 다카하시 고레키요(왼쪽)와 과거 동료였던 사이토 마코토(오른쪽). 출처는 위키피디아.
이 사진은 1936년 2월 20일에 찍힌 것으로, 6일 후 2.26 사건 으로 인해 두 인간은 사이좋게 저승길로 간다. 총독 시절에 군복 대신 양복을 입고 출근하였는데, 총리대신 취임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캐주얼한 양복차림으로 나타났다.
조선총독을 거쳐 총리가 된 인물은 사이토 제독 외에도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과 9대 고이소 구니아키 장군이 있으며, 마지막 10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 장군은 반대로 총리 역임 후 총독이 된 사례이다.
그는 일본 내부 경제문제 해결과 정치 안정화를 위해 와카쓰키 레이지로 민정당 총재와 스즈키 기사부로 정우회 총재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초당적인 내각을 만들어 낸다. 절친인 다카하시의 재정정책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여 경제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군사비의 급증으로 효과는 미미했다.(...) 한편, 사상면에서는 전혀 온화롭지 않았다. 교토대의 다키카와 교수의 사상을 문제삼아 교단에서 내려오게 만드는가 하면 일본 공산당을 전면적으로 탄압하여 궤멸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온건한" 그 조차도 유지했던 군부의 마지막 철칙.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사이토 본인의 발언)
사이토 내각은 1932년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나, 국제연맹에서 일본은 만주국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국제연맹을 탈퇴해 버린다. 일왕의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 굴러가는 동네 헬게이트 오픈
군부[6]와 대립을 극력 피했으나 군부는 그의 리버럴 성향을 싫어 했으며 내각을 흔들기 위해 끊임없이 관료에 대한 스캔들 사건을 폭로했고 '제국인조견사' 불법 주식매매사건을 통해 궁지에 몰린 그는 1934년 내각을 사임했다.
사이토 제독은 사임 직후 오카다 게이스케를 후임으로 하여 해군 출신의 중립성을 강조하려고 했으나 현실은..
4 사임과 사망
하지만 여전히 온건파의 거두였기 때문에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군부는 1936년 2.26 사건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당시 내각대신이었던 그는 결국 암살당해 79세(만 77세)에 사망. 이때 다카하시 대장상과 와타나베 교육총감도 함께 살해당했다. 2.26 사건 참조.
물론 그가 암살 기도를 받은건 처음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대표적으로 1919년 부임하는 마차에서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과 1926년 순종의 승하 때 송학선 의사의 기도가 있었지만[7] 모두 실패했다.
여러 번 암살 시도를 넘겼던 사이토 제독은 제 명에 죽을 줄 알았지만, 총독을 그만두고 일본 궁내성에서 내대신으로 활동하던 도중 청년 황도파에게 친영미파로 지목되어 죽게 되었던 것. 사이토 제독은 암살 당했던 대신들 중에서 가장 끔찍하게 살해 되었다. 집에 난입한 반란군 황도파 육군 장교들에게 47발이나 난사 당했고, 그 중 몇 발은 장교도 아닌 증오심으로 가득찼던 일반 육군 병사가 자원해서 시행한 확인사살이었다. 암살 과정에서 사이토 제독의 부인도 장교들에게 저항하다가 장검으로 토막 났다고 하나, 실제로는 총검에 부상을 입었을 뿐으로, 장수해서 1971년에 98세로 사망했다.
5 그 외
앞서 말했듯 조선에는 꽤 교활한 인물이었으나 개인적 성격은 털털했다고 전해진다. 1914년 전역 직후 구입한 별장에서 여느 집 노인들과 다름 없이 검소하게 지내다 보니 그 지역의 서장이 일을 하고 있던 제독을 보고 "못보던 영감님이네" 라고 했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흠좀무 했다.
군인치고 꽤 신사적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분위기 파악이 빠르고 조용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총리 재임 시절 정치인들이 맹렬하게 비난하고 도발을 해도 "긴장감이 없어보이지만 저는 극도로 긴장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공손하게 답변 했을 정도로 점잖았다고.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해서 감사 편지나 답장을 자주하였으며, 서예를 좋아했던 그에게 휘호를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고 빠짐 없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한 번 들어온 서신은 반드시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개인 정보 습득에 빨랐다. 이런 습관으로 인해 그가 지녔던 서류가 일본 국회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을 정도.
전술했듯 2.26 사건 때 암살 당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절친이었다고 한다.- ↑ 런던 해군 군축조약 유지를 지지하는 온건파 노선이다.
- ↑ 한 미곡상이 야마나시 한조의 측근에게 당시 금액으로 5만엔의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야마나시는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로 인해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타이완에서 조명하가 일본 황족 구니노미야 구니히코(쇼와 덴노의 장인)를 칼로 찔러 이로 인한 책임까지 겹쳤다는 말이 있다. 추가바람.
- ↑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제복을 입고 보내던 육군과 달리, 근무 시간이나 큰 행사 외엔 사복 정장 차림을 하는 게 일반적이던 해군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도 있다.
- ↑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는 점은, 강우규는 이미 재판 과정에서 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대해 "끝에서 뾰족한 것이 튀어나와 내가 죽이고자 하는 사람 하나만 맞힐 줄 알았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 바 있었다.
- ↑ 해군 급진파 청년이 중심이 되어 호헌운동의 중심이었던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를 암살한 사건이다.
- ↑ 여기서 말하는 군부란 대체로 육군을 말한다. 일본 육해군의 대립은 해군 출신 총리대신들에 대한 육군의 끊임없는 흔들기로 나타났다. 선술했듯, 해군 출신 총리대신은 보통 육군과 문민 관료간 대립시 일종의 합의에 의해 나오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육군들이 언젠간 쫓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컸다.
- ↑ 송학선의 경우는 닮은 사람을 사이토로 오인하고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