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가키 가즈시게

역대 조선 총독
3대임시대리4대
사이토 마코토우가키 가즈시게야마나시 한조
5대6대7대
사이토 마코토우가키 가즈시게미나미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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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垣一成.
(1868년 8월 9일 ~ 1956년 4월 30일)
총독 임기 : 1931년 6월 17일[1] ~ 1936년 8월 4일(5년 2개월)
(1927년 5월 10일부터 9월까지 4개월 간의 임시 총독 대리를 지내기도 했다.)

1 개요

일본군인, 정치가. 제6대 조선 총독.

오카야마 현 출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 농사꾼의 5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모쿠지.[2]

2 초기 생애

1890년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였다.[3] 1891년에 일본군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 후 러일전쟁참모로 참전했다.

1906년, 아내를 잃고 38살의 나이로 상관 오하라 요시지로 소장의 딸인 오하라 사다코와 재혼했다. 신부의 나이는 18살. 1913년에는 현역 무관을 군부대신으로 뽑지 않는다는 법령에 열 받아서 괴문서를 뿌리기도 했다. 1915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의 육군대신에 취임했고, 1925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927년까지 4개 내각(기요우라 게이고~다나카 기이치)에서 육군 대신을 지냈다. 사이토가 제네바 군축협상으로 총독에서 물러나자 4대(야마나시 한조) 부임 사이에 임시 총독(1927년)을 지내기도 했고, 이후 차기 총리로 하도 유망해서 정계의 혹성(惑星)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이 별명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니, 뒤에 보듯이 총리(태양)만 뺑뺑 돌다 끝난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가키가 육군장교단이 치를 떠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우가키 군축(일본군 항목 참조)으로 21개 사단 중 4개 사단(3만 4천명)을 날려버렸던 것.[4] 줄인 예산은 교련과 현대적 무기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자유주의에 가까운 정치이념을 가진 인물이라서 육군장교단 내에 팽배한 군국주의적 이념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만 일각에서는 육군 출신 총리 등장의 기반을 닦은 군부통치를 지향하는 인물이라는 시각도 있다. 앞서 현역 무관 군부대신제를 주장한 걸 생각하면 제법 설득력이 있다.

한조가 곧 사이토로 다시 교체되고, 이후 사이토가 물러나자 뒤를 이어 1930년대 전반기의 6대 조선총독을 지냈다. 그의 통치 분위기는 후술하겠다.

3 여러차례 실패한 총리의 꿈

원래는 사실 총독이 아니라 총리가 먼저 될 수 있었다. 1927년 와카쓰키 레이지로[5] 다음의 총리으로 내정하려 했는데, 육군장교단이 나서서(…) 적극 방해했다. 이후 한동안 한직을 보낸다.

1930년 7월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기용되었고, 미수로 끝난 1931년 3월 쿠데타[6] 기도에서 사건에서 총리로 옹립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군대를 써선 안된다."라고 만류했다(그리고 여전히 육군장교단 일부는 반대했다).[7]

이후 하마구치 내각이 무너지고, 1931년 다시 총리로 지명된 와카즈치 레이지로는 그를 조선 총독으로 발탁했다. 정당색이 없고, 청렴하다는 이유였다. 전전임 야마나시가 정치 인사 + 탐관오리였다는 것을 고려하여 반대로 뽑은 것. 일각에서는 당시 정권을 잡은 민정당의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그를 중앙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 총독직 던져준 것이라는 말도 있다.

1936년 총독으로 물러난 직후, 히로타 고키 내각이 붕괴되어 수상으로 지명되었으나, 육군 측에서 아예 육군장관을 내지 않겠다고 땡깡을 부려서;; 내각 구상을 무산시켰다. 당시 우가키는 쇼와 덴노의 부름을 받고 도쿄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 헌병감 나카지마 게사코가 올라타 육군의 뜻이라며 조각하지 말 것을 협박했다. 우가키는 처음엔 나름대로 저항했지만, 육군장관을 추천하지 않겠다는 말에 결국 우가키는 조각을 포기했다. 육군 때문에 총리 지명자가 조각을 포기한 최초의 사건. 결국 총리가 된 사람은 엉뚱하게도 당시 조선 배치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하야시 센쥬로였다. 이렇게 3번이나 총리 물망에만 오르고 끝난다.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아, 협상을 통하여 어떻게든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하려 했으나, 또 이번에도 군부의 방해로 실패하여 사임했다. 일본 정국에서의 기믹은 가히 사이토의 뒤를 이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 고군분투한 기믹이다.

1941년에도 도조 히데키 대신 내각을 맡을 뻔 했지만 도조가 기어코 총리를 먹었다. 4번째 실패. 망했어요

4 조선 총독 우가키

한편, 조선 총독으로서의 업적은 눈부시다

4.1 경제정책?

그의 정책은 '조선인에게 약간의 을 주겠다'[8]로 요약된다. 악명 높던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근무기강을 개선해 제대로 된 행정을 구현했으며, 총독부 조직을 개편했고,[9] 농업진흥정책과 수력 발전소 건설 등 공업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스스로도 조선을 근대화시켰다 자부했다. (조선의 총독이라는 별명도)

나진한반도 북부의 중심 항구로서 역사에 나타난 것도 이 때문이다. # 인구가 3자리 간신히 되던 작은 어촌이었던 나진의 땅값은 만주 철도의 종착역이 된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졸지에 "동해의 다롄항" "조선의 경제수도"로 거론되면서 1,000배나 폭등했다. 본격 부동산 신화의 선조격이랄까. 거꾸로 다른 곳들에 땅 사놓은 인간들은 제대로 망했어요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지정하고 1934년 1차 발표한 지정문화재에 보물, 고적(사적), 천연기념물을 지정했다[10]. 다보탑을 본뜬 극우단체 흑룡회도쿄 '합방기념탑' 건립을 반대하기도 했다. #

씁쓸한 부분이라면 이 농업진흥정책이 훗날 새마을운동의 일부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멸사)봉공, 자조, 협동"이란 슬로건은 "근면, 자조, 협동"으로 거의 비슷하게 차용했다고 한다. 물론 뉴라이트계열이나 일본 우익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농업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지만,[11] 이런 것 때문에 일본이 한국 농업에 발전을 시킨 존재라고 미화하는 건 잘못된 판단이다.

4.2 식민지 총독

당연히 그도 언제까지나 식민지의 총독이었으므로, 조선에 대해서 진심으로 좋게 여겨서 발전시켰다기보다는 당시 조선도 일본의 영토이고 식민지라고 생각하고 발전시키기로 한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경제정책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문화통치에서 이어진 민족기만책과 억압정책은 그대로였다. 일본이 우리나라 경제나 농업에 발전을 시켰던 것도 아니었고 농업 진흥책은 언제까지나 일본 본토를 위한 것이였다.

내선일체보단 덜했지만 내선융화를 강조했으며 조선어 교육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1932년에는 장충단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와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파를 기리는 "박문사" 를 박아넣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시대는 이른바 1기 무단통치, 2기 문화통치에 뒤이은 3기 전시체제나 그 준비기간으로 여겨진다.

광산 정책은 총독부의 자금으로만, 또 장진강 수력발전공사의 전력은 일본의 노구치사의 흥남비료공장에 대부분이 돌아갔다. 또 "남면북양(南綿北羊)[12]"과 2차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농촌진흥운동"은 당시 조선의 농민들 대부분이 소작농 + 문맹이었던 상황이라 근본적으로 사회구조가 뒤바뀌지 않는 이상에 큰 효과를 내기 어려운것이었는데[13] 이런 현실은 극복하지 않고 "자력갱생 정신교육"만 쑤셔넣은 것이다. 결국 농업진흥정책은 총독이 스스로 각반을 차고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일본 본토 농업을 덴마크급으로 끌어올렸다는 관료 등도 열심히 참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시행정이 되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고 대차게 실패하였다.

4.3 재임시기와 이후 영향

여튼 우가키는 이렇게 5년간 조선을 다스리고, 1936년2.26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정계에 나설 때라고 생각하고 총독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이 양반이 물러나고서 나타난 후임 총독이 미나미 지로... 가히 헬게이트가 열렸다. 물론 단순히 성장률만 따져서는 미나미 지로 때의 조선 경제도 만만치 않았다만... 이런 시기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좋은 떡밥이 되는 시기로써, 경제 성장률만으로 모든걸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시기는 그 유명한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졌다. 우가키 총독 초기에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남아있어 보통학교 이상을 졸업한 졸업생 75%가 취업을 못했다 지금 취업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이때 상륙해 큰 인기를 끈 독일어 단어가 그 유명한 룸펜. 이상의 《날개》나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이 이 시기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때는 세계 대공황 중이므로 어느 나라나 그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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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의 우가키 사진. 후줄근해진 인상

사족으로, 우가키의 사위 야노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보고 홀딱 반했다 고 전해진다. 여자였다면 몽양 선생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했을 텐데, 남자로 태어나서 그러지 못했다고.

5 패전 이후

결국 정치에서 은퇴하고 다쿠쇼쿠(척식) 대학[14] 학장에 취임했다가, 패전으로 공직에 추방되었으나 공직추방령이 해제된 후에 이루어진 총선거(1953년)에서 전국 최고의 득표수로 의원직 당선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전후에도 정당총재이자 수상 후보로 꼽혔다. 이후 참의원 임기 중 88세까지 살고는 죽었다. 그간 조선 총독과 일본 정치인을 여러 번 오간 세월을 생각하면 정말 오래 산 셈(...)

6 평가

병맛 넘치기로 유명한 일본 육군에선 그나마 개념있는 인물이었고, 능력도 나름 뛰어났으나 역부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역시 군국팽창주의자. 육군 대신으로서 "만주몽골은 일본이 반드시 영유해야 한다"라고 여러차례 강조했으며, 그의 재임 직후 일어난 일본의 만주침략(만주사변)도 그 돌발적인 측면에선 놀라긴 했지만 그 이후의 만주 침략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을 병참기지화하여 만주 침략을 착실하게 도왔다.

우가키의 총독 재임 기간은 흔히 "민족말살통치 시대"로 분류되었으나, 실상은 아직 중일전쟁 이전이라 문화통치기의 연장선 상에 있던 시대였다. 최근 교과서에는 문화 통치기로 서술되고 있다.

1910년대 무단통치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1920년대 문화통치의 사이토 마코토, 그리고 민족말살통치의 미나미 지로, 이 세 총독의 임팩트가 강한 일제강점기사에서 사이토와 미나미 사이 이런 인물도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나 군부 독재기 경제정책이 이 양반의 정책과 어느정도 맞닿아 있는 접점이 있다,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한편 육사 1기이자 수상 물망에 여러차례 오르내린 만큼 "우가키의 역사는 일본제국 육군의 역사다"라는 평도 있는데, 이 점에서 일본 육군에도 황도파나 통제파 같은 병맛뿐만 아니라 이런 인물도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냥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정도 말이다.

  1. 정확히는 7월 11일 부임. 취임 직전에 만보산 사건(7월 2일)과 뒤이은 조선인들의 화교린치로 뒤숭숭하던 상황이었다.
  2. 가즈시게(一成)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1등으로 성공하겠다"라는 의미로, 1896년에 중위로 진급하면서 스스로 바꾼 이름이다.
  3. 1932년 윤봉길 의사에게 죽은 시라가와 요시노리가 동기. 그 외 스즈키 소로쿠, 스기야마 하지메, 하타 슌로쿠, 하타 에이다로, 가와시마 요시유키, 아베 노부유키 등의 후배들도 그의 파벌이었다.
  4. 이때 짤린 야마나시 한조 대장이 그대로 총독으로 직행하여 금권정치를 펼친다.
  5. 와카츠키 수상은 재임 때 그를 「진정한 평화 애호자」라고 말하고 뒤에 보듯 그를 총독으로 발탁하는 등 그의 재능을 아꼈다.
  6. 고이소 구니아키 군무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획이었다. 노동법이 상정될 3월 20일 군중 1만명으로 의회, 입헌 민정당사, 수상 관저를 덥쳐 혼란을 일으키고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육군을 보내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계획이었다.
  7. 일설에는 전후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쿠데타에 관여했으나, 그가 총리 물망에 오르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3월에 갑자기 뒤집었다는 이야기. 여하간 쿠데타는 이후 불문에 부쳐졌고 참여한 장군, 장교들도 처벌받지 않았다.
  8. "내가 조선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9. 토지개량국과 산림국을 통폐합하여 농림국을 신설하고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10.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숭례문), 보물 2호는 경성 동대문(흥인지문)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으로 이어졌다. 사적 1호가 포석정, 사적 2호가 김해시 봉황동 패총 유적인 이유도, 대구광역시 도동의 측백나무 숲이 천연기념물 1호인 이유도 이와 같다. (고적 3호부터 10호까지는 북한 소재). 또한 보물 4호였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국보 2호, 5호였던 대원각사비가 보물 3호, 8호였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국보 3호가 되었다. 다만 보물 3호였던 종로의 보신각은 오늘날 기념물 10호이다. # 참고로 보물만 지정한 이유는 문화재 체계상의 "국보"는 일본에 있다는 논리 때문. 여하간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 체계는 이 시대의 것을 답습한 측면도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간 숭례문흥인지문, 그리고 경애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포석정이 1호라는 것이 일제의 조선 정복의 상징이라며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11. 일부는 북한의 천리마운동도 새마을운동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12. 조선 남부에서는 면화 농업을, 북부에서는 을 중심으로 한 모직 목축업을 장려하겠다는 정책.
  13. 애초에 1920-30년대에 조선에서 쌀 수출량이 대폭 늘었났음에도 실질적으로 농민들이 만주로 이민가느냐니 북부지역 도시로 가야했다느니 했던것도 바로 이것때문이었는데 산미증산계획으로 일본인들은 싼값에 쌀을 먹을수 있어서, 지주들은 돈을 대거 벌수있어서 이득이었지만 쌀 수출이 늘어난다 해서 그 이득이 소작농들에게 돌아가는건 아니었고 되려 소작농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부담해야했기 때문에 때문에 소작농들은 별수없이 시궁창스러운 삶을 살아야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런 상황은 모른건 아니었지만 소작농들의 희생으로 본토의 쌀값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시정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니 효과가 제대로 나기가 힘들었던 것.
  14. 이름부터 매우 수상한 일본의 극우 성향 대학으로, 원래 대만 총독부의 관료 양성을 위해 세워진 교육 기관이 모체다. 김완섭과 함께 전후 양대 친일파로 절찬리에 병신짓 중인 고 젠카(오선화)가 여기서 교수질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