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수

梁憲洙
(1816~1888)

1 개요

조선 후기의 "명장".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관은 남원이고 호는 하거, 시호는 충장.

2 병인양요

유학자 이항로의 제자이기도 하며 최익현하고 친구 먹는다.
스승 이항로는 3살 때 천자문을 땠다고 한다.[1] 그런 스승에게 배웠으니 학문 실력은 높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1848년에는 무과에 급제했고 선전관이 되었다. 철종 때는 참상으로 승진, 그 뒤에는 희천군수로, 갑산부사로 삼수갑산 할 때 그 갑산이다. 부임했다.1865년에는 제주목사로 있었다. 이 때 탐관오리 백기호를 처벌해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다. 1866년에 정족산성 수성장과 승정원에 동부승지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지금의 이 사람을 만든 이야기이다.

1866년에 프랑스군들이 강화도에 침략했다. 자세한 상황은 병인양요 참조 좌선봉장으로서 양헌수는 500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족산성에 숨어서 프랑스 해군 대령 올리비에와 일종의 게릴라전(?)을 펼쳤는데 그로 인해 프랑스군 6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다.[2]
양헌수는 병인양요 이후에는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먼저 그 공으로 한성판윤이 되고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이어 어영대장, 그리고 1884년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 즉 재상까지 되었다!
무관이 재상까지 오르는 일은 아주 많은 편은 아니다.
1876년에는 강화도 조약에 반대했는데, 이걸로 보아 개화파는 아니고 보수적인 척화론자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병인양요 때 서양과 싸운 것은 그렇다 쳐도 외국과 개항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1887년에는 독련사로 천거되나 늙은 나이를 근거로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1888년 11월 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산59-3에 있다.
같은 양평군에는 그의 신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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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서울시에는 그의 병인양요 일기를 문화재로 지정했다.
  1. 3살 때 천자문을 땐 것은 여러 인물들도 그렇다. 최승로라던지 이이라던지.
  2. 물론 우리 측의 기록이다. 프랑스 측의 기록에는 3명이 죽고 35명이라고 되어있다. 이렇게 따지면 사상자가 더 많아지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