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의 역대 황제 | ||||||
2대 세종 명황제 소규 | ← | 3대 공종 정황제 소종 | → | 황조 멸망 |
묘호 | 없음 / 공종(恭宗)[1] |
시호 | 후주(後主) 효정황제(孝靖皇帝)[2] |
연호 | 광운(廣運, 586 ~ 587년) |
성 | 소(蕭) |
휘 | 종(琮) |
자 | 온문(溫文) |
생몰기간 | 556년 ~ 607년 |
재위기간 | 585년 ~ 587년 |
소종은 명제 소규와 황후 장씨(張氏)의 장남으로 자는 온문(溫文)이다. 585년 소규가 사망하자 황제가 되었으며 일찍이 동양왕(東陽王)으로 봉해진 후 황태자로 세워졌다. 소종은 박학하고 재능이 있었고 활과 말을 다루는데 소질이 있었으며 개성은 호방하였고 구속됨이 없었다. 586년 연호를 광운(廣運)으로 고쳤는데 소종이 즉위한 이후에 천하통일을 노리던 수문제 양견은 북주 무제 우문옹이 없앴던 강릉총관(江陵總管)을 설립하고 강릉에 수나라 군대를 수둔시켜 소종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587년 양견은 소종을 징소하여 수나라 조정에 입조하게 하였는데 이후 곧바로 후량을 멸망시키고 소종은 수도 장안으로 끌고 와 거국공(莒國公)으로 봉했다. 이 때 소종의 숙부인 안평왕 소암(蕭巖) 등 다른 사람들은 일부 거민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달아났다.
소종은 수나라에 있을 때도 변함없이 신임을 얻었고 수양제 양광은 즉위 후 소종을 양공(梁公)•내사령(內史令)에 봉했다. 소종의 친족들은 조정에 발탁돼 들어가 관리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의 아이들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소씨여 소씨여 또 다시 일어나는구나!
결국 이는 양광이 소종을 시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마침내 소종은 면직되고 말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여생을 집 안에 있으면서 보내게 되었다. 소종이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은 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 수나라 말기의 할거세력 중 하나인 소선(蕭銑)은 소종의 당질이며 칭제한 뒤에 소종을 공종(恭宗) 효정황제(孝靖皇帝)로 추존했다.
황후 채씨(蔡氏)는 639년 죽었으며 아들 소현(蕭鉉)은 양성통수(襄城通守), 손자 소의(蕭儀)는 태자복(太子僕)을 지냈으며 증손자 소조(蕭慥)도 당나라 때 중용되는 등 대를 이어 중용받았다. 현손녀인 소씨(蕭氏)[3]은 당나라 낙주(洛州) 합궁현(合宫縣)의 승(丞)인 위승휴(魏承休)의 아내가 되었으며 70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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