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小宗
2 所從
=소종래(지내 온 근본 내력)
3 消腫
부은 종기나 상처를 치료하는 것 또는 그런 방법
4 小鐘
절에서 쓰는 작은 종으로 크기는 밥그릇만 하며 큰방 한구석에 달아 두는 종 또는 편종(編鐘) 가운데 작은 종
5 동아시아 묘호 중 하나인 昭宗
6 동아시아 묘호 중 하나인 紹宗
- 남명의 제2대 황제 융무제의 묘호.
7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황족 소종(蕭綜)
502 ~ 531
자는 세겸(世謙)이고 어머니는 숙원(淑媛) 오씨(吳氏)이다. 아버지는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무제 소연, 다른 하나는 제나라 동혼후 소보권이다. 근데 양나라와 제나라는 먼 친척 관계였고 성씨가 같으므로 누가 아버지이든, 소종은 소씨이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무제와 숙원 오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걸로 나와 있다. 무제 역시 그를 아들로 여겼기에 예장왕(豫章王)으로 봉해졌으며 지방의 자사를 겸임시켰다. 소종의 어머니인 오씨는 원래 소보권의 후궁들 중 하나였는데 무제가 소보권을 죽이고 화제 소보융을 세웠을 때 오씨를 받아들였고 즉위한 뒤에는 오씨를 숙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오숙원은 7개월 만에 소종을 낳았으므로 무제의 총애를 잃은 뒤로는 사람들로부터 소종이 사실은 동혼후의 아들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런 의심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와서 소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어머니 오씨는 눈물을 흘리며 소종에게 도망가라고 권하였다.
525년 소종은 무제의 명령을 받고 북위를 정벌하러 갔는데 국경 지대에 있는 성을 지키다가 밤중에 틈을 타서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와 북위로 망명하였다. 다음날 성에서는 소종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서둘러 그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고 마침내 성은 북위의 군사들에게 함락됐다. 소종은 이름을 소찬(蕭贊)으로 바꾸고 북제의 종묘와 동혼후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북위는 소찬을 단양왕(丹陽王)으로 봉하고 제주자사(齊州刺史)로 삼았으며 수양장공주(壽陽長公主)를 소찬에게 시집보냈다. 이에 양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놀랐고 무제는 소찬을 속적에서 끊은 뒤 이어서 소찬과 그의 아들인 소직(蕭直)의 성씨를 패씨(悖氏)[1]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모든 조치를 다시 회복시키고 소직에게 후작의 작위를 내렸다.
530년 북위가 혼란에 빠졌을 때 제주 사람 조낙주(趙洛周)가 제주를 가지고 이주조에게 호응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켜 소찬을 쫓아내고 성을 점거했으며 수양장공주는 잡아서 낙양으로 돌려보냈다. 소찬은 사문(沙門)으로 변장해서 떠돌아 다니다가 장백산(長白山)에 머물다가 오래지 않아 양평(陽平)에 갔는데 그 곳에서 병사했다. 마침 수양장공주도 이주세륭이 그녀를 취하려는 것을 따르지 않고 자결해서 북위 조정은 그 두 명을 숭산(嵩山)에 합장했다. 그런데 이 후 어떤 사람이 소찬의 영구를 훔쳐서 양나라로 왔는데 무제는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아들의 예로 장례를 지낸 뒤 안장하였다. 그러나 양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에 사후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