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의 역대 황제 | ||||||
초대 중종 선황제 소찰 | ← | 2대 세종 명황제 소규 | → | 3대 공종 정황제 소종 |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효명황제(孝明皇帝) |
연호 | 천보(天保, 562 ~ 585년) |
성 | 소(蕭) |
휘 | 규(巋) |
자 | 인원(仁遠) |
생몰기간 | 542년 ~ 585년 |
재위기간 | 562년 ~ 585년 |
1 개요
중국 위진남북조 후량의 2대 황제.
대동 8년(542년) 소찰과 귀빈 조씨(曹氏)[1]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인원(仁遠)으로 구변과 문학을 갖추었고 내전(內典)을 좋아했다. 562년 소찰이 죽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연호를 천보(天保)로 고쳤다. 재위 기간 중 여러 차례 진나라의 장수 오명철에게 패해 강남의 여러 지역을 빼앗기면서 나날이 후량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577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이 북제를 멸망시키자 북제의 수도였던 업(鄴)에 황제의 몸으로 스스로 입조(!)해서 이를 축하했다. 이 때 소규는 우문옹에게 후량을 건국하게 도와준 북주의 옛 은혜를 칭송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는 후량 건국 당시 도와준 것은 서위이지만 서위의 황제가 꼭두각시라서 실권자 우문태가 대신 집정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우문태가 건국을 도와준 것이다. 우문태의 아들이 우문옹이었으므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아마도 단순히 아부 외에도 북주에게 잘 보여서 나라를 존속시키고 특히 나날이 진나라에게 공격받아 멸망해 가는 나라를 구원해 달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우문옹은 소규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스스로 비파를 연주해주며 직접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친목질의 힘? 이렇게 신뢰를 얻어 우문옹은 후량의 수도 강릉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북주 군대를 철수시키고 총관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후량의 자치를 인정했다. 이는 우문태가 소찰을 도와주고 후량의 황제로 세워줬으나, 의심하여 강릉 서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보다는 상황이 나아진 셈이다.
581년 북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됐지만 역시 수도 장안에 가서 조현하고 예우를 받았다. 이 때 수문제 양견은 내가 진나라를 멸하면 옛 양나라 영토를 님한테 돌려드림이라 하기도 했다. 소규의 딸은 양견의 차남이자 훗날 수양제가 되는 양광의 부인이 되어 남편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582년 강릉총관에서 파직되었으나, 매우 불안했던 소찰의 정권과 달리 소규의 정권은 나름 안정되어 수도 강릉에서는 양나라로부터 계승된 문화가 꽃피었다. 소규 본인도 학문에 재능이 있던 인물로 《효경주역의기》와 《대소승유미》 등 많은 저술을 지었다. 개황 5년(585년), 사망 후 아들 소종이 뒤를 이었으며 현릉(顯陵)에 안장되었다.
1.1 가족 관계
- 황후 장씨(張氏)
- 후주 소종
- 소모(蕭某) - 이름 불명
- 소환(蕭瓛) - 의흥왕(義興王)
- 소전(蕭瑑) - 진릉왕(晉陵王)
- 소경(蕭璟) - 임해왕(臨海王)
- 소순(蕭珣) - 남해왕(南海王)
- 소창(蕭瑒) - 의안왕(義安王)
- 소우(蕭瑀) - 신안왕(新安王)
- 진안공주(晉安公主) - 장녀로 정식 칭호는 진안군공주(晉安郡公主)이었다가 남매인 소종이 즉위한 뒤로부턴 진안장공주(晉安長公主)로 바뀌었다. 후량 멸망 이후 수나라에 들어와 양민황후 소씨의 언니로서 임성부인(任城夫人)으로 봉해졌고 왕곤(王衮)에게 시집갔다.
- 소씨(蕭氏) - 두위(竇威)의 아내이다.
- 양민황후(煬愍皇后) 소씨(蕭氏) - 어머니는 황후 장씨이며 정략결혼에 의해 수양제 양광의 아내가 되었다. 그야말로 영욕의 세월을 보낸 여인으로 인생이 매우 파란만장하다. 582년 진왕 양광의 아내가 되었고 587년 조국 후량이 망했지만 600년 남편이 황태자가 되어 황태자비가 되고 604년 남편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다. 606년 장남 양소가 급서하자 '천륜을 어긴 일을 태자 소가 대신 받았다.'면서 남편을 원망했고 이로 인해 그녀는 당분간 마음 고생이 매우 심했다. 거기다 618년 우문화급에 의해 남편이 시해되고 수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619년 돌궐에 시집가 있던 시누이 의성공주가 사자를 보내자 양광의 손자 양정도와 함께 돌궐로 갔다가 629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당나라 장안에 기거했다. 649년 사망할 때까지 당태종 이세민은 그녀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했고 사후 '민황후(愍皇后)'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남편 양광의 시호인 양제의 '양(煬)'자를 앞에 붙여 양민황후로 불린다(...). 愍 자는 불쌍하다는 의미의 애도지만 煬 자는 폭군에게나 주는 시호로 매우 안습하다.
- 소씨(蕭氏) - 후막진의(侯莫陳毅)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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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황태비(孝皇太妃)로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