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사는 머피?
에디 머피가 아닙니다
Audie Leon Murphy
1925.6.20 ~ 1971.3.28
미 육군사상 레전드급 군인, 명예 훈장을 비롯한 군인이 수여받을 수 있는 훈장은 죄다받은 그야말로 먼치킨급 군인이면서 미 역대 군출신 인지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1위를 차지하는 영웅급 대접을 받는 인물이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을 실생활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PTSD의 전형적 표본을 보여준 인물. "오디 머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1 출생
어린시절은 불우했다. 1925년 6월 20일 텍사스주 소재 헌트 카운티의 킹스턴에서 아이리쉬계 소작농인 에멧 베리 머피와 처 조시 벨 킬리안 사이의 12자녀들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린시절은 파머스빌, 그린빌과 셀레스트 등지를 옮겨다니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려둔체 집을 나갔으며, 어머니는 그가 16살때 심장 내막염과 폐렴의 합병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굉장히 아름답고 땅에 닿을듯한 긴 머리를 갖고계신 분이었다. 아울러 과묵하시고 무언가를 찾는듯 하신 분이셨는데 어머니를 여읨으로서 나의 일부도 떠나간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어머니의 사망은 그의 일생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결국 초등학교 5학년만을 다니고 중퇴. 16세이던 1941년, 그린빌에서 라디오 수리점 직원으로 일했고 목화농장, 일반상점, 주요소등 막일을 했다. 그의 어린 세 동생들은 헌트 카운티가 퀸란에 있는 고아원으로 입원하도록 허락되었다.
2 군 시절
군인이 되기를 소망했던 그는 진주만 공습후인 1941년, 육군에 입대했고 현 텍사스 주 소재인 캠프 월터스[1]에서 양성훈련을 받았고 후기교육은 메릴랜드주 소재 포트 미드[2]에서 받았다가 1943년 2월 20일, 루시안 프러스캇 소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3사단 15보병연대 1대대 '브라보'중대로 배속되어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파병된다. 후에 소대전령으로 알제리의 아르쥬에서 시칠리 연합부대침공작전 훈련을 받게되었고 5월 7일 일등병으로, 7월 15일 상병(Corporal)으로 진급된다. 7월 10일 본대가 시칠리의 리카타에 상륙했었을때 척후 정찰중 도망중이던 이탈리아군 장교 2명을 사살한다. 그러나 열흘후 소속중대가 팔레르모를 도착했었을때는 와병중이라 작전에는 불참했고, 회복후에는 연합군이 작전목표인 메시나 항을 향하는 도중에 산 프라텔로에서 본대가 교전을 하는 동안 고지에 있는 기관총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작전에 임한다. 1943년 9월 살레르노의 배티파글리아 파견돼 볼트루르노에서 척후중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으나 전사자 1명의 피해만 입은것외에는 별다른 피해없이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적군 5명을 사살, 그리고 10월달에 있었던 전투에서는 7명의 독일군의 공세를 방어해내면서 3명 사살, 포획 4명의 업적을 이뤘고 그해 12월 13일, 병장으로 진급한다. 1944년 8월 15일. 라마투엘르의 포도밭으로 이동중 독일군의 기습을 받자, 기관총으로 응수해 2명 사살, 1명 부상을 기록한다. 곧이어 저택에서 2명의 독일군이 투항의사를 밝히고 나와 그의 절친이 처리차 다가가자 갑자기 발포, 절친을 살해하자, 곧바로 진격해 응사, 6명을 사살, 포획 11명을 기록한다. 그러던 중, 1944년 9월 15일 북동부 프랑스 지역에서 작전 중, 박격포 공격으로 부상 퍼플 하트를 받는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중위로 진급함과 동시에 최전선에서 연대본부로 연락장교로 전임되었다.
3 명예훈장
보즈산맥에 위치한 2,200평방킬로미터의 콜마르 지대는 1944년 11월부터 독일군의 점령지였는데 1945년 1월 14일에 이미 12월로 본지역으로 이동한 소대와 합류한다. 1월 24일, 3사단과 홀즈위르의 마을로 진입하는 중, 독일군의 역습을 받아 두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 M10 대전차 자주포가 파괴되면서 승조원들이 차량을 버려두고 후퇴하는 혼란가운데 휘하 병력에게 숲쪽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이 직접 M1 카빈으로 응수하는 것과 동시에 야전 통신기를 이용, 아군포격을 유도하고 파괴되어 버려진 M10에 위치한 50 칼리버 기관총으로 나머지 잔여병들을 처리하는 한편 진격해오는 적 전차와 보병을 1시간동안이나 탄환이 떨어질때까지 막아냄으로서 아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는 발판을 제공한다. 여기에 두 다리에 부상을 당했음에도 도리어 동료들과 남아있을 것을 고집했으며 결국에는 반격작전에까지 참여한다. 이러한 무용에 힘입어 명예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4 전후
전후 제대한 다음에는 배우로서 21년간 활동했는데 주로 서부극에 출연했다. 아울러 작사가로서도 괜찮은 성공을 거두며 더티 해리의 주연에도 거론되기도 하다가 197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5 여담
- 어릴때 외톨이였는데다가 감정기복이 심하고 아울러 성격이 불같았었다고 한다.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었던 듯.
- 스웨덴 메탈 밴드 Sabaton의 To Hell and Back이 이 사람에 대한 노래이다.
- 군입대 당시 많은 군종이 그의 입대신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입대연령 상한선에 미달한데다 체중미달에 체격도 왜소했던 탓이었는데 그의 누나가 그의 생년월일을 조작, 육군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고. 그래도 왜소한 체격과 체중은 어쩔 수 없었던지 상관장교들이 그에게 비전투병과를 추천했을 정도였다.
- 전후 파머스빌에 그의 누나와 매형을 위해 집을 사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형제들이 누나의 집에 잠시 더부살이를 했었다고 한다.
- PTSD를 설명할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중의 하나다. 전장의 참혹함에 시달린 나머지 배게 머리밑에 항상 권총을 둔 상태에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여기에 밤마다 악몽을 꾸는 건 두말 할 것도 없다. 자신의 회고에서도 "두려움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도박까지 했었을 정도로 심했다. 한때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감독에게 "전쟁에 참전하기 전엔 모든게 흥분되고 기대가 되던 심정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라고 고백했었다고 한다.
- 그야말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무공훈장이란 무공훈장은 죄다 받은 경력때문에 미 육군 장병들 사이에서는 넘사벽이면서 미군 장병들이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할 롤모델로 받들어질 정도로 전설급으로 대우받고 있다. 수훈무공훈장, 대통령 부대표창, 은성 훈장, 동성 훈장, 훈공장 등등.. 당장 위에 첨부된 사진만 봐도 소련식 훈장 방탄복을 방불케 한다.
- 자신의 자서전 To Hell and Back을 영화화 하자 그 자신이 역할을 맡았다. 영화 도입부에 그를 소개하는 인물은 미 육군 대장 월터 B. 스미스 장군이다. 스미스는 북아프리카, 유럽 전선에 아이젠하워의 참모로서 종군하였으며, 전후 주 소련 대사, 중앙정보국장, 국무차관을 지냈다.
- 명예 훈장을 수여받을 당시의 나이가 1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