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복동

동양자전거왕의 위엄.

위 사진은 경평자전거대회 우승사진.

1892년 서울 출생, 사망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951년 경으로 보고 있다.[1]

일제 강점기 시기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개최한 자전거 경기에서 일본인들을 캐바르며 국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전설적인 자전거 선수.

1 개요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조국을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승리를 쟁취했던 위대한 자전거 선수.

당시 대부분의 자전거 선수들이 자전거 점포의 소유주 혹은 직원이였던 것처럼 엄복동 역시 평택에 있는 "일미상회"라는 자전거 점포원이였으며, 여기서 자전거를 배웠다고 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서울~평택을 출퇴근 했다고. ㅎㄷㄷ….[2] 괜히 당시 대회를 휩쓸고 다녔던 게 아니다.

본격적인 선수생활은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 때 엄복동은 중고 자전거 끌고 털레털레 나와 우승을 먹어버림. 이후 열리는 자전거 대회마다 다 휩쓸고 다니게 된다.

엄복동이 자전거 경기에서 항상 골 직전 한바퀴 남았을 때 "엉덩이를 들었다"고 한다. 이는 마지막 1바퀴가 남았을 때 스프린팅을 쳤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 모습을 본 관중들은 엄복동의 모습에 "올라간다!"라며 환호했다고 한다.

상기 실 사진에서도 체형을 볼 때 허벅지의 대퇴사두근은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장딴지로 추정해 보면 스프린터의 성향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3]

한편, 일본의 우민정책이 극을 달하던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애국, 계몽운동, 의병들이 한창 일어나던 실절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기를 꺾고자 잘나가던 엄복동을 밟아주기로 결정한 일본은 1920년 5월 2일 일본의 고수 모리 다카히로까지 초청해서 경성시민대운동회의 자전거 경기를 열게 된다. 무슨 황비홍이나 정무문 필난다[4]

그런데 그만...

엄복동이 모리 다카히로를 신나게 캐발라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지 말입니다….

이후에 일어난 상황은 경성자전거 경기 때 있었던 일에 대한 동아일보의 1920년 5월 3일자 기사가 가장 당시 상황과 감정을 잘 전달해 준다.

여덜사람이 용긔를 다하야 주위를 돌새,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너머 뒤로 떨어지고, 오즉 선수 엄복동(嚴福童)군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질하게 되엿난대, 그것도 엄복동군은 삼십여 회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군보다 댓회를 뒤떠러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업시 엄군의 엇개에 떠러지게 되엿는대 엇지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벼알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군은 분함을 이의지 못하야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일등을 안이 주려고 하난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지즈며 우승긔 잇는 곳으로 달려드려

"이까진 우승긔를 두엇다 무엇하느냐"

고 우승긔대를 잡아꺾으매 엽헤 잇든 일본 사람들이 일시예 몰녀들어 엄군을 구타하야 엄군은 마침내 목에 상처를 내고 피까지 흘니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마저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가치 달녀드러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짓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럿스나, 다행히 경관의 진력으로 군중은 헤치고, 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마럿는대, 자세한 뎐말은 추후 보도하겟스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현대어로 변환한 기사내용

여덟명이 힘을 다해 주위를 도니 다른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다 중간에서 뒤로 넘어져 떨어지고 오직 엄복동과 다른 일본선수만이 그나마 승부를 가리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은 삼십바퀴 정도를 돌고 그 일본선수는 다섯 바퀴정도 떨어지게 되어 엄복동의 우승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무슨일인지 심판진이 별안간 경기중지를 선언하자 엄선수는 분을 이기지 못해

"이것은 꼼수로 나의 우승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교활한 수단이다!"

라고 외치면서 우승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며

"이까짓 우승기가 무슨 소용인가"

하고 우승기를 잡아꺾어버리자 옆에 있던 일본인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엄선수를 구타해서 목에 상처가 나고 피까지 흘리게 되자, 일반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며 엄복동이 맞아죽는다며 운동장으로 달려들어 욕하는 이, 돌던지는 이, 꾸짖는 이들의 분노에 찬 행동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지만, 다행히도 경관들이 힘으로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경기는 결국 중단되었는데. 자세한 전말은 차후 보도할 것이며 우선은 이것만 보도함.

이후로도 열린 경기에서 신나게 일본인들을 케발라버리며 우승하였고, 이는 당시 비행기 조종사였던 안창남(安昌男·1900~1930)과 더불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는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면 엄복동 자전거"라는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5]가 불리워질 정도로 둘의 인기는 엄청났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3면)는 단평(短評) 코너에서 일본인들의 행태에 대해 아래의 기사로 비꼬기도 했다.

일본 상인들은 목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야, 일본에 잇는 선수들을 전부 초치(招致)하야 자전차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사(憤死)나 할는지.
일본 상인들은 목전 자전거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뺏긴것이 분하다고 해서, 일본에 있는 선수들을 전부 불러들여 자전거 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화병으로 죽을건가?

이러했던 엄복동은 광복 후 그 말년이 아름답지 못했는데, 그동안 벌어놓았던 돈을 다 탕진하고 집이 없어 동두천시, 의정부시 일대를 떠돌았으며, 6.25 전쟁 시기가 한창이던 1951년 동두천의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2 엄복동의 자전거

자전거라는 이름과 용도를 넘어선 민족의 기대를 지닌 귀중한 물건

지금 남아있는 자전거는 1920년 자전거 경기 때 영국의 러지(Rudge-Whitworth)사[6]에서 1910~1914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자전거 중 가장 오래된 자전거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자전거이다.

차대번호는 1065274

1920년 경기 당시 영국 러지사에서 자전거 홍보를 겸하여 엄복동에게 증여하였으며, 이후 엄복동의 우승신화와 함께하게 되었다. 맨 위 1923년 경평대회 우승기와 같이 있는 자전거와는 핸들바가 다르며, 그 외의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뒷 코그는 트랙 경기용과 동일한 1개 짜리 고정기어 방식. 프레임은 강철재이며 토클립, 경량화되어있는 체인링 등 당시 트랙용 자전거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림은 목재로 몇 겹의 나무 층으로 라미네이팅 공법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당시 경량화를 위해 1940년대까지 트랙 경기용으로 흔히 사용하던 방식이라고.[7]

타이어는 당연히도 클린처 개발 초기(미쉐린에서 개발)였던 관계로 트랙용으로는 사용을 안하고 있어서 튜블러.

이 자전거는 엄복동의 1929년 은퇴 후 후배에게 전했다고 하며, 이를 다시 박성열씨가 받아 소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박성열씨[8]는 이 자전거를 들쳐업고 피난을 와서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문화재 등록 당시 소유주는 김근우씨로 상세한 사항은 주요 연표 참조.

3 주요연표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바로 경기전적의 연대다. 모두 일제 강점기 시절이다.

  • 1892 탄생. 아버지 엄선양, 어머니는 당시 표현대로 그냥 김씨라고.
  • 1910 자전거 경기 우승. 이미 10대 때부터 싹수가 보였다.
  • 1913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본격 선수생활 시작.
  • 1918 장충단 공원 자전거 경기 우승.
  • 1920 경성시민대운동회 자전거 부분 우승(?) - 본문 내용 참조.
  • 1922 장충단 자전차경주대회 우승.
  • 1923 마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 1925 상주 조선팔도자전거대회 우승.
  • 1928 전국운수조합대회 우승.
  • 1929 은퇴. 당시 나이 서른이 넘으면 이미 중년이였다.
  • 1932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 1만미터 경기 우승. 이 때 나이 무려 41세.
  • 1951 사망.
  • 1977 대한사이클연맹에서 1999년 까지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 개최.
  • 2010 엄복동배의 마지막 경기일인 8월 24일을 기점으로 그의 자전거를 근대 문화재로 등록.(등록공고, 등록문화재 제466호)

4 주요 링크

위클리조선 2009년 4월 14일자 기사 내용이다.
어쨌든, 본문 상당부분은 상기 두 링크를 참조하였다.
  • 추정시기는 본문 참조.
  • 실제로는 일미상회에서 일종의 행상을 했다고 한다. 상세한 내용은 상기 링크 참조.
  • 당시 아직 국내 경기 중에는 오르막을 오르는 등의 산악구간 경기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경기도 트랙 혹은 드물게 구간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 실제 일본중국조선에서 이딴 짓 자주 했다.
  • 민요인 '청춘가'라는 노래를 개사한 곡이다.
  • 1894년부터 자전거모터사이클을 만들던 회사. 사실 자전거보다는 모터사이클 회사라 보는 것이 옳다. 기아모터스가 그랬듯. 여튼, 궁금한 자덕은 위키피디아의 Rudge-Whitworth(영문) 참조. 혁신적인 변속기설계와 경주용 오모터사이클의 디자인은 클래식 모터사이클 덕후들을 하악대게 만들 기 충분하고도 넘친다.
  • 도로경기(Criterium)에서는 강도의 문제로 사용하기 힘들었음.
  • 서울에 거주다가 2010년부터 일산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도싸에 박성열씨의 제자가 활동하고 있다. 궁금한 자덕은 검색해 볼 것. 가끔 한강에서 새끈한 카본프레임에 팀 져지 쫙 빼입고 깝쭉대는 로드게이를 녹슬은 유사 MTB 끌고나와 발라버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속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