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2세

역대 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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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1세
(Edward I)
에드워드 2세
(Edward II)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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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II(1284 ~ 1327)

영국(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이며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부왕인 에드워드 1세의 빛나는 업적에 반비례하여 실정만을 거듭하다가 죽었다(...). 재위 시기는 1307 ~ 1327년.

1 생애

에드워드 2세는 1284년에 에드워드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드워드 1세에게는 이미 앞서 존, 헨리, 알폰소 등을 비롯하여 4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이들은 대부분이 10살을 전후한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 에드워드 1세에게 있어서 에드워드 2세는 나이가 45세가 되어서야 얻은 소중한 후계자였다. 1307년, 부왕인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정벌을 위해 원정을 나갔다가 병들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2세는 겉모습 만큼은 아버지를 닮아 건장한 체구의 장신에다가 잘생긴 외모를 타고난 미남이었다. 또한 말을 잘 탔고 싸움도 잘 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냉철하면서도 대담한 면이 있었던 아버지 에드워드 1세와는 달리 성격은 게으르고 안일했으며, 또한 소심하고 의지가 박약한 편이었다. 좋게 말하면 소탈한 편이라서 마부나 음유시인을 비롯하여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지만, 아버지와 같은 위엄과 강단은 갖추지 못했다. 그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 왕실에서 시집온 아내 이사벨라와의 관계도 별로 좋지 못했고, 귀족들이나 다른 왕족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못했다.

에드워드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에 총신 가베스턴을 콘웰 백작으로 임명하면서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가베스턴은 에드워드 2세와는 어릴적부터 친한 친구 관계였던 사람이었는데, 에드워드 2세는 그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에드워드 2세의 동성연인으로 여기기도 했다. 가베스턴은 비록 용맹하고 유능한 기사이기는 했으나 높은 직책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의회에서 제동을 걸었다. 결국 가베스턴는 의회와 귀족들의 눈총을 받아 해외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의회는 이를 계기로 왕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한편 몰래 영국으로 돌아오려던 가베스턴을 붙잡아 교수형에 처했다.

1314년, 부왕인 에드워드 1세에게 패배하여 아일랜드로 달아났던 스코틀랜드로버트 1세가 세력을 키워서 돌아오자 에드워드 2세 또한 이에 맞서 군대를 보내 스코틀랜드 정벌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보낸 잉글랜드 군은 전력에서 월등히 우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베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군대에게 참패를 당하였고, 이로 인하여 잉글랜드는 사실상 스코틀랜드에서의 지배권을 상실해버렸다. 반면에 베넉번 전투에서 승리한 로버트 1세는 알렉산더 3세 이후로 끊어진 스코틀랜드 왕통을 이어나갔으며 오늘날에도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1]

이런저런 실정으로 인해 에드워드 2세와 의회 사이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결국 에드워드 2세가 기회를 엿보던 중에 군사를 모아 의회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의회의 우두머리는 에드워드 2세의 사촌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였는데 다른 의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붙잡혔고 얼마 후에 모두 처형당하였다.[2]

의회의 주요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에드워드 2세는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었으나 그 치세는 곧 종말을 맞이하였다. 1326년, 평소에 사이가 좋지 못했던 왕비 이사벨라가 가신 모티머와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 에드워드 2세에게 반대했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 이사벨라를 지지하였으며 떨어질 콩고물을 노린 프랑스 본토에서도 지원군을 파견하여 쿠데타를 후원하였다.

이미 귀족들과 왕족들 사이에서 잔뜩 미운 털이 박혀있던 에드워드 2세는 빼도박도 못하고 이사벨라에게 사로잡혔으며 그 추종자들은 대부분 살해당했다. 에드워드 2세는 곧 무능함과 마음대로 법률을 제정하고 파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폐위당하고 감금생활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1327년에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에드워드 2세에게 원한이 있던 이사벨라가 에드워드 2세를 폭행하거나 고문하여 죽였다는 설도 있으며 혹은 훗날을 걱정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은밀히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어떻게 죽었든 참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신분을 숨기고 프랑스나 잉글랜드 혹은 스코틀랜드 어느 수도원에 유폐되어 수도사로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2 사후

왕비 이사벨라와 총신 모티머는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킨 후 어린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혔다. 왕비와 프랑스 출신의 가신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에드워드 1세가 확립해놓은 잉글랜드의 왕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에드워드 3세는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와 모티머의 꼭두각시로 지냈으나 장성한 후에는 어머니의 세력을 꺾고 모티머를 죽여 무너진 잉글랜드의 왕권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인 에드워드 2세와 대비될 정도의 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김으로서 에드워드 1세의 위업을 계승하였다.에드워드 1세: 훗! 그래야 내 손자답지!

3 그 외에

에드워드 2세 본인이 가베스턴 등을 총애한 나머지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돌았기 때문에, 에드워드2세의 아내인 이사벨라가 낳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실은 에드워드 2세의 핏줄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3] 다만 이는 신빙성이 매우 낮은 속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에드워드 2세가 이사벨라와 전혀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사벨라가 낳은 에드워드 3세를 아들로 인정했을리가 만무하다.

잉글랜드 왕자들의 전통적인 칭호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시초도 에드워드 2세이다. 부왕인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를 침공하여 승리한 기념으로 에드워드 2세를 웨일즈의 영주로 임명하고 이런 칭호를 내려주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도 이러한 전례를 따라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똑같은 칭호를 주면서 이 일이 후대에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4 평가

여러모로 부왕의 빛나는 업적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무능한 왕으로 비난받고 있다. 특히 베넉번 전투에서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점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는 아들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켜주려 노력하다 병사했지만 정작 본인이 스코틀랜드 침략에 실패하면서 이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끝나 버렸다. 어찌되었든간에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면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에드워드 2세의 삶을 주제로 한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 제목도 <에드워드 2세>. 당시로서는 최초의 실질적인 역사극 중 하나로, 후대의 영국 연극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다. 훗날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이 연극은 1991년에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멜 깁슨이 주연과 감독을 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엄청난 찌질이로 묘사된다. 하는 일이라고는 늘 병풍처럼 서있다가 말 몇마디 잘못하거나 실수를 저질러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이 전부(...). 극중에서도 동성애적인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아버지 에드워드 1세가 에드워드 2세의 동성연인을 성의 창문 밖으로 던져 살해하는 장면도 나온다.[4] 사실 에드워드 2세가 아버지 못지않은 장신의 거구인데다가 개인적으로는 꽤 뛰어난 싸움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무시한 좋지 못한 고증이다.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 타임라인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그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암살당했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항문에 도롱을 꽂은 후 그것을 통해 달군 쇠를 쑤셔서 장기를 태워죽였다고 한다(...). 이는 영국 극작가 말로가 쓴 '에드워드 2세'에서 묘사된 그대로이다.

그 외에 드라마 끝없는 세상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5] 그래도 해당 작품은 브레이브 하트보다는 고증에 신경을 썼기에 지나칠 정도로 찌질하게 폄하되었던 모습에 비하면 나름 포스있게 묘사된다.
  1. 당시에 겪었던 패배는 잉글랜드 측에서는 상당히 뼈아프게 여겼던 것 같다. 에드워드 2세의 실정 중에서도 특히 큰 것으로 여겨지는데,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아버지인 에드워드 2세가 생전에 쌓아올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2. 토머스는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이었던 가베스턴을 탄핵하고 국외로 추방한 장본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2세와의 사이는 극히 나빴다.
  3. 심지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아예 윌리엄 월레스의 핏줄인 것 마냥 묘사된다(...). 물론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윌리엄 월레스는 이사벨라가 영국에 오기 4년 전에 처형당했다.
  4.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시켰더니 군사적인 재능도 없는 애인을 데리고 가서 군사 고문이라고 둘러댔다가 에드워드 1세의 화를 돋우었다.
  5. 이전 버전에서는 초반에 짧게라고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의외로 중요한 비중이다. 자세한 사항은 중대한 스포일러이므로 직접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