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태저넷 왕조


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
History of the United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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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태저넷 왕조의 문장

1 개요

영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하나.

플랜태저넷(House of Plantagenet)은 사실 헨리 2세의 아버지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항시 투구에 금작화의 가지(라틴어: Planta Genista)를 꽂고 나섰던 것에서 유래해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1]. 플랜태저넷이라는 말 자체는 조프루아 이후에는 쓰이지 않다가 1460년경 요크 공작 리처드[2]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자신의 별칭으로 썼다.

본가에서 8명, 랭커스터 왕가에서 3명, 이후 요크 왕가에서 3명이 즉위해 총 15명의 군주를 배출한, 1154년에서 1485년까지 잉글랜드의 왕가였다.

이 왕조에서 유명한 사람으로는 리처드 1세, 존 왕, 에드워드 왕세자 등이 있다.

2 역사

2.1 기원

편의상 앙주 백작가라고도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조는 본래는 루아브 계곡의 영주중 하나로 좀 더 계보를 올라 간다면 본래는 서프랑크의 초대 국왕이었던 대머리왕 샤를 2세에게 예속되었던 사냥터지기였다. 이후 세력을 확장해 10세기에 백작위를 얻었고, 헨리 2세의 조부였던 풀크 5세의 경우 1131년 예루살렘의 멜리장드와 재혼해 예루살렘 국왕으로 즉위하기까지 했다. 이때 전처인 멘의 상속녀인 아렝뷔르가 사이에서 난 장남 조프루아에게 앙주 백작위를 물려주고 중동으로 건너갔다.

2.2 영국 왕위

헨리 1세 사후 그의 외조카인 스티븐이 즉위하는데 사실 헨리 1세가 생전에 삼은 후계자는 딸 마틸다였다. 하지만 봉건 영주들은 마틸다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스티븐과 마틸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일단 스티븐이 승리했으나, 스티븐의 외아들이 죽어 계승자도 없었고 후에 마틸다와 화해하면서 스티븐은 마틸다의 장남 헨리를 후계자로 삼는다. 스티븐의 사후 헨리가 헨리 2세로 즉위, 플랜태저넷 왕조가 열렸다.

2.3 앙주 제국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 2세 및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1세, 존 왕을 별도의 왕조로 구별하여 앙주(Anjou) 왕조로 분류한다. 우선 헨리 2세가 외할아버지 헨리 1세의 노르망디[3]와 아버지 조프루아의 앙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키텐 공작 기옌 10세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투 등을 가지게 되면서 대륙 쪽에 광활한 영토를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브르타뉴까지 가지게 되면서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 이상을 잉글랜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왕은 원래 노르망디 공국 시절부터 프랑스 내의 영토에 관해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지만 그 봉신이 프랑스 왕보다 영토가 컸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서부를 지나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으며, 이를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4 잉글랜드의 왕조

하지만 필리프 2세의 공격을 받아 대륙 내의 영토를 존 왕이 대거 상실되고 되는데 따라서 진정한 플랜태저넷 왕조는 잉글랜드가 주력이었던 헨리 3세로부터 시작된다.

2.5 단절과 분열

플랜태저넷 왕가의 본가에선 리처드 2세가 마지막 후손이 아니다. 에드워드 3세는 비교적 아들들을 많이 남겼는데 적자 출생은 장자가 흑태자 에드워드이고 차남은 영아때 죽어서 다음 아들은 클러렌스 공작 라이오넬, 4남이 랭커스터 공작, 5남이 요크공작이다. 삼남 라이오넬은 딸 하나만 남기고 죽었고, 적장자 흑태자 또한 에드워드 3세보다 일찍 사망해서 적장손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즉위한것이지. 플랜태저넷 혈통이 끊긴게 아니며 랭커스터나 요크나 작위명이지 두 왕족의 성은 플랜태저넷이었다. 리처드 2세가 어렸기에 2대랭커스터 공작이 섭정하다 찬탈하여 헨리 4세가 되었고, 헨리 5세, 헨리 6세를 거쳐 헨리 6세가 정신병이 있어서 사람구실을 못해서 3대 요크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의 장자 에드워드가 왕위를 찬탈했다. 이과정에서 구분을 돕기위해 랭커스터가문 요크가문 하는것이지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플랜태저넷 혈통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삼촌에서 육촌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랭커스터 공작은 1399년 리처드 2세가 사촌형 헨리 4세에게 폐위된 후로는 방계인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로 이어진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에드워드 3세에게는 아들들이 8명이나 있었는데 그중에 적자 아들은 4명씩이나 장성한다. 장남 에드워드 왕세자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지만 이미 뒤를 이을 아들인 리처드가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아들들은 영토와 공작의 지위를 하사받고 분가하였는데 사남인 겐트의 존이 랭커스터를 하사받고 제 1대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으며 5남인 랭리의 에드먼드가 요크를 하사받고 제 1대 요크 공작이 되었다. 다행히 리처드 2세가 즉위초에는 겐트의 존이 섭정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겐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이미 청원파의 수뇌부중 한명으로서 리처드 2세와 꾸준히 반목하고 있었고, 겐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사촌형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영토와 직위를 박탈하고 추방시켰는데 방심하고 아일랜드를 방문해서 궁전을 비웠다. 이 때 헨리가 반란군을 조직하고 귀국한 뒤에 왕위를 찬탈하고 리처드 2세는 항복한 뒤 유배당하고 얼마 뒤에 사망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가 된다.

백년전쟁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서 내전인 장미전쟁이 벌어진다.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는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되어 랭커스터 왕조는 혈통이 단절된다. 더불어 조카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한 리처드 3세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사망해 왕위를 상실한다. 거기다 그의 조카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1499년 처형되어 요크 왕조도 직계 혈통이 단절된다.

2.6 튜더 왕조로의 계승

장미전쟁이 끝난 후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사실 방계라고 부르기도 어려운데 헨리 7세 본인은 부계로는 잉글랜드 왕가의 피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잉글랜드는 여계승계와 외손승계를 허가하기에 외가인 보퍼트 가문의혈통으로 에드워드 3세의 사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이었는데 세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식으로 리처드 2세에게 적자로는 인정되나 왕위 계승권은 주지 않았었다.. 이렇게 애매한 가문이었지만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가 폐위되고 그의 유일한 아들이 요크가에 잡혀 처형되자 헨리 6세의 이부형제이며 보퍼트가문의 후손인 튜더가가 랭커스터 지지자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왕위를 주장하게된다.

헨리 튜더가 즉위해 튜더 왕조가 열렸다. 튜더가는 본래 웨일즈듣보잡 가문이었지만 헨리 튜더의 조부였던 오웬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 샤를 6세의 딸이자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의 미망인인 캐서린을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듣보잡에서 벗어났다.

헨리 튜더는 이부 형이었던 헨리 6세가 형제임을 인정했고 거기에 장미 전쟁으로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자들이 모조리 작살나면서 왕위를 이을만한 사람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계승이 가능했다. 그리고 헨리 7세는 부족한 정통성을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채웠다. 즉, 랭커스터의 어설픈 방계 따라지였던 헨리 7세가 요크 가문과 정략 결혼을 하면서 간신히 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3 전설

앙주 백작 가는 악마의 자손이라는 전설이 있다.

12세기 무렵에 떠돌던 전설에 따르면 앙주 백작들 중 한명이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멜뤼진이란 여인을 데려왔고, 그녀에게서 4명의 자식들을 보게 되었지만 항상 아내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미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밖으로 나가는 것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이 때문에 백작은 비밀리에 기사 네명에게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내의 외투 자락을 밣고 있으라고 명령했고, 명령을 받은 기사들을 그것을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고, 이에 신부가 멜뤼진에게 성체를 갖다댄 순간 뒤에 서있는 기사들을 밀쳐내고 아직 어린 두 아이를 안고 창문 밖으로 날아 갔다. 멜뤼진의 정체는 악마의 딸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를 바라 볼 수 없기 때문에 미사 때 밖으로 나가려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같은 전설이 나올 정도로 포악하고 호전적이며, 폭력적인 행동과 끝을 보고 마는 성미를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고, 1154년 헌팅던의 헨리는 '앙주 혈통이 다혈질이고 호전적인 통치자 아래 번성했고, 사람들을 공포로 다스렸다는 것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며, 그 힘으로 주변국들을 파괴하고 영토를 복속시켜 온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기록했다.

이런 앙주 가문 말고도 그 통치하의 앙주 주민들도 이웃의 노르망디 주민들로부터 교회를 모독하고, 사제 살해와 역겨운 식사예절을 가졌다는 이유로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노르망디 주민들은 노르만의 혈통이 섞여 있는 바이킹의 후예다. 이걸 감안한다면 진짜 흠좀무한 성향이었던 듯. 폴크 2세처럼 성인에 가까운 평화주의자인물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계 구성원들은 잔인했고, 폴크 5세처럼 다섯번이나 결혼하는 엉망인 결혼생활, 방탕, 집안 불화들이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한편으로 당시 중세유럽의 기준으로서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영주들도 많았다. 앞서 언급한 풀크 2세의 경우 그 자신도 대단힌 학식이 있는 인물로 자신의 주군인 프랑스 국왕 루이 4세를 글도 읽지 못하는 왕관을 쓴 당나귀라고 대놓고 조롱까지 했으며, 이외에도 미남들이 많은 편으로 큰 키와 다부진 체격, 황금빛 붉은 머리카락이 특징적이었다. 물론 헨리 2세처럼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고 전혀 상반된 특징을 가진 가진 인물들도 많았다.

4 프랑스와의 연관성

사실 이 왕조는 '잉글랜드의 왕'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영국의 왕조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보다는 프랑스 지역에 영토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백년전쟁 이전까지는 프랑스 지역의 비중이 훨씬 더 컷다. 앙주 백작 가문은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때 앙주, 노르망디, 투르, 멘의 영주였다. 헨리 2세 즉위 이후로 결혼 및 정복을 통해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티에, 브르타뉴 등을 득템... 존 왕이 많이 털리긴 했지만 프랑스 왕보다 프랑스에 땅이 더 많았고 이것이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 내 영토 문제와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고 한 때는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시원하게 물리쳤고 그 뒤 샤를 5세에게 밀리는가 싶었지만 다시 헨리 5세가 이끈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대승으로 파리까지 장악해버리고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영국 왕은 물론 프랑스 세자 샤를 7세를 제치고 프랑스 왕까지 한다는 트루아 조약을 맺어 프랑스 왕위 계승과 영토 전역의 장악이 눈 앞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헨리 5세가 갑자기 죽고 갓난 아기인 헨리 6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렇게 불안해진 와중에도 섭정공인 베드포드 공작이 잘 지휘하여 계속 우세하게 이끌고 마침내 오를레앙을 포위하여 샤를 7세를 몰아붙여 프랑스 정복의 꿈이 현실로 이뤄질 무렵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하러 왔다는 잔 다르크가 등장, 그녀에게 오를레앙을 비롯한 결정적인 여러 곳에서의 전투에서 치명적으로 패배, 원래 점령하고 있었던 대관식이 열리는 랭스까지도 그녀에게 빼앗기고 샤를 7세가 먼저 프랑스 왕에 정식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힘들어져버렸다.

결국 동맹하고 있던 프랑스내 친잉글랜드 세력 부르고뉴 공작의 도움 및 프랑스의 배신 덕분에 잔 다르크를 포로로 손에 넣어 이를 갈면서 그녀를 엉터리 종교재판으로 마녀와 이단자라고 억지로 몰아붙여 화형 시켰으나 그 짓도 소용없이 부르고뉴 공작과 그 휘하 영주가 안그래도 우세해진 프랑스 편에 붙은데다가 오히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잉글랜드에 적대하는 감정이 프랑스에 퍼져나갔고 이후로도 쭉 전세가 밀려 결과는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잃는 것으로 끝났다.

많은 왕들이 영국보다는 프랑스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었다.[4][5] 최절정기에는 피레네 산맥에서부터 아일랜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까지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온화한 기후에 비옥한 프랑스 땅에 비해 영국은 날씨도 불안정하고 땅도 비교적 척박해서 당대 유럽인들의 인식으로는 보잘 것 없는 땅이었다. 영국에는 몇 달 머물지도 않은 왕도 많이 있다. 또한 플랜테저넷 가문 사람들은 왕실 용어로 프랑스어를 썼다.

5 기타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에서는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죽지 않고 귀환, 플랜태저넷 왕조가 계속 유지된다는 설정을 통해 플랜태저넷 왕조 치하의 영불제국(Anglo-French Empire)을 그리고 있다. 겁스 무한세계센트럼도 비슷한 세계관.
  1. 당시의 별명이 아니라 후대에 셰익스피어가 붙인 별명이라는 말도 있다. 정확한 내용을 아시는 분이 수정바람.
  2.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아버지
  3. 영문 위키에서는 헨리 2세의 아버지 조프루아가 1144년에 노르망디 공작에 올랐다고 기술되어 있다.
  4.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보다도 아키텐(프랑스 내부에 있는, 프랑스의 1/8정도 크기의 땅)의 세금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머지 7/8의 지역에서 세금이 나오는 것을 더한다면...
  5. 아키텐은 포도주로 ‘’‘지금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