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1세

역대 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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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3세
(Henry III)
에드워드 1세
(Edward I)
에드워드 2세
(Edward II)
이름에드워드 1세(Edward I)
별칭긴 다리 에드워드(Edward Longshanks)[1]
부친헨리 3세
모후프로망스의 엘레오노르
생몰년1239년 6월 17일 ~ 1307년 7월 7일 (68세)
재위기간1272년 11월 16일 ~ 1307년 7월 7일
대관식1274년 8월 19일

영국(잉글랜드)의 왕인 헨리 3세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로, 잉글랜드 중앙집권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영국 의회를 창설하여 그 기초를 닦은 명군으로 손꼽힌다.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 생애

1.1 태자 시절

나쁜 의미로 그 유명한 존 왕손자이자 헨리 3세의 장남으로 헨리 3세 때에는 할아버지 존 왕이 치세 시절에 일으킨 갖은 병크로 인하여 마그나 카르타가 수립된 이후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던 시대였다. 게다가 해외의 나라들과의 사정도 좋지 못했고 내분도 심하게 일어나 잉글랜드의 국력은 무척 쇠약해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는 태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어[2]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아버지 헨리 3세를 도왔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큰 위기는 귀족이었던 시몽 드 몽포르가 일으킨 2차 바론 전쟁에서 패배했던 일이었다.

프랑스 혈통의 귀족인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에게 있어 당대 최고의 정적으로[3], 헨리 3세의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왕을 압박하여 옥스퍼드 조례를 인정하도록 굴복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헨리 3세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를 번복하려 하자 귀족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루이스(Lewes) 전투에서 헨리 3세의 군대는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들이 이끌던 군대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려버리고 말았다(...).[4] 결국 에드워드 1세는 부왕과 함께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으며 결국 옥스퍼드 조례가 통과돼버리고 영국 의회가 소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탈출을 감행하여 글로스터 공과 함께 국왕군을 결성, 이브샴에서 다시 한번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군과 싸웠으며 마침내 반란군을 개발살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 싸움에서 전사했고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큰 굴욕을 주었던 그의 시체를 찾아내 목을 벤 다음 사지를 찢어버리고 창칼로 난자해 복수를 마쳤다.

이브샴에서의 승리 이후로 에드워드 1세는 태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부왕이었던 헨리 3세 이상의 영향력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실권은 사실상 에드워드 1세의 것이 되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자 1271년에 제 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으나 동행했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일찍 죽고,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던 키프로스의 위그 3세는 바이바르스와의 휴전을 선언해 버렸다. 에드워드 1세는 이 휴전에 반대했지만 이슬람에서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5] 여러 악조건에 부딪혀 귀국하였다. 그 와중에 헨리 3세는 영국에서 병사하였고 에드워드 1세는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왕위에 올랐다.

1.2 내정

태자 시절부터 대담한 활약을 보인 에드워드 1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 강력한 군주로 군림하였으며 왕권을 강화시키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초석을 다지기 위해 이전의 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덕분에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는 별명도 얻을 정도였다고.

기존의 관습법을 정비하여 국법의 불합리하던 점들을 해소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법령을 통해 강력한 교회의 권력을 억눌렀으며 영주들이 지닌 땅을 재분배하여 그 권력을 분산시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양모와 와인의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시키는 등 영국의 중앙 집권화를 착실히 이루어 나갔다. 사실상 봉건 제도의 종말을 알린 왕으로, 봉건시대 유럽에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영주들과 교회를 끝없이 견제하고 약화시켰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봉건제는 이 후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또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하나로 뭉쳐 단결력을 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의회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제법 공을 많이 들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영국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영어의 사용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태자 시절에 꺾었던 정적 시몽 드 몽포르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회 운영법만큼은 적극적으로 본받았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 상하 정치 계급의 화합을 이루어 강력한 결속력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1.3 외정

에드워드 1세는 내정을 통해 잉글랜드의 통치력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잉글랜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은 명목상 웨일즈의 왕도 겸하였으나, 그 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실권은 거의 없었고 잉글랜드의 왕들도 웨일즈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웨일즈의 통치 세력에 대해서는 그리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까지 웨일즈는 사실상 독자적으로 놀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의 독자적인 세력을 제압하고 그 곳에서도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친히 원정을 나가서 직접 통치에 반발하는 웨일즈의 토착 영주들과 싸워 이겼고 이들을 복속시켜 잉글랜드 국왕이 웨일즈에서도 실권을 발휘하도록 하였다.[6]

한편 북쪽 스코틀랜드에서는 던켈드 왕조의 왕이었던 알렉산더 3세가 1268년 3월 18일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했다. 그날 밤 연회를 베풀고 술에 만취한 상태로 부인을 만나러 간다고 말을 타고 갔다가 신하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낙마사했다. 즉,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망한 셈이었다. 알렉산더 3세는 원래 헨리 3세의 딸 마가렛과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뒀으나, 딸 마가렛 하나 외에는 모두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었다.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손으로 딸 마가렛이 노르웨이 왕과 결혼해서 태어난 외손녀인 마가렛이 왜 여자이름을 죄다 마가렛이라고 짓는건데 있었고 그녀를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했기에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차기 여왕으로 지목되자 에드워드 1세는 마가렛을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혼인시켜 스코틀랜드까지 집어삼키려 했다. 하지만 마가렛이 갑자기 어린 나이에 병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존 밸리올이라는 영주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밸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되었으나 정작 그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뿐이었다. 때문에 밸리올은 군대를 일으켜 에드워드 1세와 전쟁을 벌여 스코틀랜드의 종주권을 빼앗고자 하였으나 되려 패배하였다. 이후부터 에드워드 1세는 아예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서며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행세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7]과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 마가렛의 검은 십자가상마저 1296년에 빼앗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가져가버렸다.[8] 이 덕분에 후에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는 왕도 없이 몇 년을 지내야만 했다. 물론 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들은 엄청난 굴욕을 당한터라 에드워드 1세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이 거세게 저항하자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뇌물과 권력으로 달래어 포섭하는 증 회유책을 쓰면서도 반항하는 도시는 가차없이 짓밟고 그 곳의 귀족들과 시민들을 학살하는 등 잔혹한 통치를 펼쳤다. 그러나 이것이 되려 역효과를 불러와 스코틀랜드 귀족과 백성들의 원한을 사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저항군을 조직하여 수차례 잉글랜드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에드워드 1세는 토벌군을 파견하여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으며 결국 윌리엄 월레스를 잡아 사지를 찢어죽여서 본보기를 보였지만 끝내 스코틀랜드는 항복하지 않았다.

1.4 사망

비록 반란군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잡아 죽이긴 하였으나[9]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날로 심해졌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선언하자 에드워드 1세는 진노하였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와 싸우기 위해 직접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나가고자 하였으나 이 원정 도중에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끝내 스코틀랜드를 평정하지 못했던 에드워드 1세는 최후에도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고 전해지며 전설에 따르면 죽기 전에 '내가 죽거든 시체를 화장해서 남은 잿가루와 뼈를 부대 자루에 넣고 병사들과 함께 진군하여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도 한다.무덤에 묻히려면 400년 정도 기다려야 겠네...정말 지독한 노인네다(...).

2 평가

중세 잉글랜드 최고의 성군이자 스코틀랜드의 악몽

잉글랜드를 발전시키고 중앙 집권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큰 활약을 펼친 위대한 명군으로 손꼽힌다. 또한 전략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어, 수많은 전투를 치뤘음에도 루이스 전투 외의 패배를 겪어본 바 없고,[10] 그나마도 이때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또한 장궁의 도입을 권장했는데 이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연승의 요인이 된다.

한편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자비가 없고 무척 잔혹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나 윌리엄 월레스같은 적들에게는 사지를 찢어버릴 정도의 잔인하고 냉혹한 모습도 보였으며 이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저런 유언을 남길 정도의 전설이 있을 정도로 성격은 지독했다고도 한다. 상술한 내용 처럼 머리도 좋고 군사적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기술과 자원이 훨씬 발전했던 후대 15세기, 16세기 잉글랜드의 왕들도 평정하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거의 집어 삼킬뻔 했고, 역사학계에서도 조그만 더 오래 살았으면 여전히 불안하고 조직력이 엉망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도 격파하고 진짜 스코틀랜드를 석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많다.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먼 훗날 동군연합 먼저, 그 다음에 광범위한 자치권과 동등한 대표권을 인정 받으며 연합왕국에 서서히, 스코틀랜드 고유의 문화와 민족 의식을 지키면서 통합 된 것과 달리 일찍부터 상당히 강압적으로 통합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스코틀랜드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렇게 숙적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에서도 자국 역사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이 왕을 공포와 경외심을 같이 담아 스코트인들의 참교육망치라는 뜻의 라틴어인 Malleus Scotorum라고 부른다.

다만 스코틀랜드인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몇 차례 입었으며, 이를 해결하려고 계속해서 새로운 세금을 매겨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았던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다. 때문에 말년에는 민심에서 멀어졌으며 영국 상공업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유대인 상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영국 경제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점은 후대에도 큰 실책으로 손꼽힌다.

워낙 본인이 강력한 전제적 통치를 했기 때문에 귀족들간의 대립 요소가 있었고, 말년에는 계속해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에드워드 1세의 개입 탓에 분쟁이 생겼지만, 그는 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의 문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점들도 그의 많은 업적에 가려져 있으며, 지금까지도 영국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 편이다. 확실히 잉글랜드의 초석을 다진 왕이었다.

3 그 외에

  • 에드워드 1세의 시대 이전에는 잉글랜드의 왕족이나 귀족들 대부분이 프랑스의 왕족들과 혈연관계에 있었으며 사실상 잉글랜드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인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단적인 예로 제 3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만 해도 잉글랜드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잉글랜드에는 단 6개월 정도만 머물렀으며 아예 영어도 할 줄 몰랐다. 되려 프랑스어를 더 잘했다고 하니 말 다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에 어느 정도 존재하던 잉글랜드 소유의 봉토가 크게 줄었으며 자연히 잉글랜드의 왕족들과 귀족들도 점차 현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도 프랑스어를 멀리하고 영어를 가까이 하기 시작했으며 에드워드 1세 본인도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 사후에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가 부왕이 쌓아올린 업적을 죄다 갉아 먹었다고 손가락질받고 있다. 에드워드 2세는 부왕에 비해 확실히 왕으로서의 능력이 뒤쳐졌으며 결국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도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빼앗겨 버렸다. 결국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 공주 출신의 아내에게 살해당하고 권력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녀가 대려온 프랑스 출신 가신들의 손아귀에 잉글랜드가 놀아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이들을 무찔러 다시 잉글랜드의 왕권을 바로 잡았다.[11]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Braveheart-king-edward-i-longshanks.jpg

  • 멜 깁슨이 주연과 감독을 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저항군 지도자였던 윌리엄 월레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큼 희대의 악당으로 등장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명배우 故 패트릭 맥고한이 열연했다. 재미있는 점은 에드워드 1세를 연기한 배우 패트릭 맥고한도 키가 188cm로 장신이었다는 것.
작중 묘사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권모술수의 달인.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에 혈육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계략과 술수에는 당할 자가 없는 노회하면서도 교활한 왕으로 묘사되어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는 결국 스코틀랜드의 저항세력을 이끌던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인의 시점으로 묘사된 영화인만큼 과장될 정도로 잔혹하고 몰인정한 면만이 부각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영화 속에서는 실제와는 달리, 런던으로 끌려온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당하는 순간에 자신도 노환에 시달리며 죽어가다가 최후에 윌리엄 월레스가 산채로 칼로 난자당하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유(Freedom!)"를 부르짖으며 죽자 그 소리를 듣고 숨을 거둔다. 더욱이 죽기 직전에는 며느리인 이사벨라가 윌리엄 월레스를 고통없이 죽게 해주도록 자비를 베풀것을 애걸하자 이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며느리로부터 사실 자신의 뱃속의 아이가 윌리엄 월레스의 아이이며, 에드워드 1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었으니 더욱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월레스를 죽이고 나서도 2년 정도 더 살았을 뿐더러, 윌리엄 월레스가 사망할 당시에 며느리 이사벨라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다. 그 뱃속의 아이가 윌리엄 월레스의 자식이라는 것도 영화의 재미를 위한 허구에 불과하다.
  •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등장. 아버지 헨리 3세와 함께 영국 오프닝에서 등장한다. 정치 78, 전투 90, 지모 83에 상업, 건설, 기동, 돌격, 공성 특기를 소유하고 있는 시나리오 중 유럽 최고의 명장. 오프닝 조건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는 것인데 파리를 함락하면 전투가 5 상승해서 더더욱 먼치킨이 된다. 시나리오 시작 시점이 1271년이라 비교적 오랫동안 활약이 가능하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평범한 군주이지만 좀 놔두면 필리프 3세보다 유능한 왕자인 필리프 4세가 등장하므로 그가 등장하기 전에 프랑스를 멸망시키는 게 좋다.
PK 시나리오 3인 늑대 무리들의 포효에서는 1239년 무렵에 헨리 3세가 아들을 낳으면 자동으로 에드워드 1세라고 개명되는 이벤트가 있으며 PK로 시나리오 2를 플레이한다면 프랑스를 점령한 후에 에드워드에게 양위하자. 왜냐하면 프랑스를 멸망시키기 전에 에드워드에게 양위하면 에드워드의 능력치 상승 혜택을 받지 못한다.
덧붙이자면 시나리오 2에서 카스티야 왕 알폰소 현왕의 아내로 설정된 엘레오노르(게임에서는 '엘레오노라'라고 표기된다)는 사실은 알폰소 현왕의 여동생이자 에드워드 1세의 아내이다. 에드워드 1세를 영국왕으로 세운 후 알폰소 현왕을 사로잡으면 사실에서의 부부관계를 재현할 수 있긴 하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듀토리얼 모드에 등장. 유저는 스코틀랜드 주민들을 조종하며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영국군을 잡는 것이 주 내용이다.
  1. 에드워드 1세의 별명인 'longshanks'는 '긴 다리'를 뜻한다고 한다. 즉 다시 말해 롱다리 에드워드(...). 당시에 키가 무려 188cm나 될정도의 장신이라 붙여진 별명이다.
  2. 16세에 가스코뉴의 영주 자격으로 가스코뉴 귀족들의 분쟁을 해결했다.
  3. 아이러니하게도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의 여동생의 남편이기도 했다.
  4. 이 싸움에서 에드워드 1세가 수하 병력을 이끌고 적을 선두에서 무찌르는 전공을 세웠으나 달아나는 적을 잡기 위해 전선을 이탈하는 바람에(...) 헨리 3세의 본대가 털러버렸다고 한다.
  5. 이슬람 자객을 역관광시켜 죽였으나 독이 발라진 자객의 단검에 중독되는 바람에 이거 치료한다고 고생했다.
  6. 이때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2세를 웨일즈의 영주로 앉혔는데 이 후로 잉글랜드의 태자들에게 '웨일즈의 군주(프린스 오브 웨일즈)'라는 별칭을 주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7. '스콘의 돌'이라고도 불리우며 영어로는 'The Stone of Scone'이라 한다.
  8. 이후엔 잉글랜드 및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의 대관식에 쓰였다. 1950년 크리스마스에 네 명의 스코틀랜드 학생이 이것을 훔치려다가 적발된 바도 있었고 이 돌이 런던에 있는 것에 대해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불만 또한 대단하였다. 결국 1996년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반환. 스콘석 탈취사건은 2008년에 영화 '스톤 오브 데스티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9. 정작 윌리엄 월레스는 살인죄는 인정해도 자신이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으므로 스스로 반란군이 아니라고 했지만...
  10. 다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변덕스러운 동맹군+불안정한 국내사정+중과부적의 여러가지 악조건 때문에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11. 사실 아들 에드워드 2세보다 손자인 에드워드 3세가 더욱 에드워드 1세를 닮은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