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노 사파타

파일:Attachment/에밀리아노 사파타/에밀리아노.jpg

생몰년도: 1879년 8월 8일 ~ 1919년 4월 10일

멕시코 혁명의 영웅
남쪽의 아틸라[1]

1 생애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1879년 8월 멕시코의 모렐로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원래 소규모 지주였지만 대농장주들에 의해 대대손손 물려받은 토지를 모조리 다 빼앗겼다. 1910년 멕시코에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자 그 역시 무장 게릴라를 일으켜 멕시코 남부에서 기의했다. 당시 그의 군대가 내걸은 슬로건은 '토지와 자유'였다.

그 당시 그는 대농장주들의 막대한 토지 점유에 혐오하는 입장이었고 따라서 그는 대농장주들을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믿었다. 1911년 5월 13일 쿠아우트라 대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멕시코 정규군을 격파해 멕시코 시티로 입성했고 그는 판초 비야와 함께 가장 유명한 혁명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 멕시코의 정세는 프란시스코 I. 마데로 대통령이 이도 저도 아닌 정책으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크게 잃었고 그 틈을 타 군사령관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반란을 일으켜 마데로를 죽이고 자기가 지도자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멕시코인들은 그를 멕시코 헌법을 위반하고 불법적으로 대통령직을 빼앗은 자로 여겼고 이에 따라 판초 비야, 사파타, 카란사, 오브레곤 같은 혁명 지도자들은 우에르타에 반대했고 결국 그는 사퇴하고 멕시코를 떠났다.[2]

1914년 12월 4일 사파타는 비야를 만나 회담을 가졌고 그들은 비야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데 합의하고 12월 6일에 카란사와 오브레곤을 내쫓고 멕시코 입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의 차이와 불신 때문에 끝내 연합하지 못했다.

파일:Attachment/에밀리아노 사파타/Example.jpg
멕시코시티 입성 후 찍은 기념사진[3]

오브레곤과 카란사가 다시 반격을 개시하자 비야는 오브레곤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끝내 셀라야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란사를 공식 대통령으로 승인한 미국을 공격했지만 잠자는 사자의 콧털 뽑기 오히려 역관광당했다. 미국은 보복으로 퍼싱 장군과 군대를 보내 그를 잡으려 했고 그는 숨어야 했다.

한편 사파타는 남부에서 다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주로 철도, 다리, 공장 등 기반시설을 박살내는 전략이었는데 그는 이런 전략으로 카란사를 괴롭혔고 이에 맞서 카란사는 사파타를 지원하는 마을을 전멸시켜 지원을 받기 어렵게 했고 멕시코판 남한 대토벌 작전 그의 목에 상금을 걸었다.

사파타는 당시 정부군 포병대 대령 구아자르도에게 탈영을 설득했는데 그의 상관인 파블로 곤잘레스는 이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총살당할 건지 사파타 제거에 협력할 건지를 선택하게 했고 구아자르도는 후자를 선택했다. 구아자르도는 사파타에게 탈영하겠다고 말한 뒤 사파타를 만나게 되었고 사파타를 위한 경호대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나팔소리를 신호로 경호대는 사파타에게 총을 발사했고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2 여담

오늘날 멕시코 남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단체 사파티스타는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 멕시코의 보수적인 미디어는 그를 이렇게 칭했다.
  2. 나중에 그는 재기를 위해 미국으로 가서 준비를 하였으나 멕시코 정부와 미국은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그를 감금했고 그는 1916년 1월 13일 텍사스주 엘패소에서 죽었다.
  3. 멕시코 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 두 혁명가의 표정이 사뭇 다른 점이 포인트. 이 사진에는 하나의 일화가 있는데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뒤 비야는 이 자라에 앉아 본 후 사파타에게 앉아보라고 권했다. 사파타 曰: 나는 이 자리를 원한 게 아니라 토지를 얻기 위해 싸웠다. 우리는 모든 야심을 없애기 위해 그 의자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