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역사

멕시코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사

기원전 2만년 경에 베링해협으로부터 건너온 주민들이 멕시코 지역에 정착했으며 일부부족은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다. 어쨌든 멕시코 지역에 정착한 주민들은 기원전 8000년부터 농경을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2300년 경의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면서 이 시기부터 문명의 기원이 형성된걸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14(혹은 12)세기부터 멕시코 동남부 지역에서 올메카 문명이 최초로 등장하였고, 이후 멕시코 본토에서는 사포테카, 미스테카, 테오티후아칸, 톨테카 등의 문명이 형성되고 사라지면서 수많은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였고, 멕시코 남부 및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 일대에서 마야문명이 번창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우 정확한 태양력과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건축술, 인신 공양의 제례 방식 등을 공유하였고, 문자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이 문자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사용된다해도 장식용정도로나 쓰는게 대부분으로 대충 룬 문자오검 문자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다가 14세기 경부터 모습을 드러낸 아즈텍이 멕시코 고원의 주도권을 잡고, 북부지방의 톨텍제국에게서 제국의 타이틀을 빼앗아 왔다. 아즈텍은 이전부터 계속되던 인신 공양의 제례를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텍스코코 호수 중간의 수중 도시인 테노치테틀란에서 '치남파스'라고 불리는 수경 재배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 테노치테틀란은 인구가 15 ~ 30만 명까지 추산되는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대도시였다.

하지만 쿠바에서 스페인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의 병력 200여 명을 자신들 신화 속의 신 케찰코아틀로 여겼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이들을 환대하였다. 1519년 코르테스는 이후 황제를 기습해 포로로 잡고 아즈텍을 유린했으나, 뒤늦게나마 반격을 가한 아즈텍에 의해 코르테스는 쫓겨나게 된다. 이후 코르테스는 본국의 지시 없이 단독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 자신을 뒤쫓은 1000여 명을 부대로 편입하고 아즈텍의 과도한 공물 요구와 인신 공양 제례에 지쳐 있던 다른 원주민들 10여 만 명의 협조를 받아 1521년 마침내 아즈텍을 멸망시켰고, 스페인은 이후로도 정복사업을 지속시키며 18세기 들어 메소 아메리카 전역을 식민지화하기에 이르렀다.

2 근대사

이후 이곳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누에바 에스파냐'라는 이름으로 스페인의 부왕(副王)이 지배하게 된다. 이 지역에서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 아즈텍 또한 천연두로 인해 대대적으로 인구가 몰살당했고,[1] 대항해시대 당시 건너온 유럽 백인들이 남자가 대다수이고 여자가 태부족하여 원주민 여자들과 섹스하고 혼혈해서 하프인 메스티소들이 양산된 것. 흠좀무. 하지만 단순히 강간 윤간 등의 성범죄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사실혼으로 혼혈해서 생긴 사례도 많으니 오해는 금물이다. 메스티소는 멕시코 인구의 주류를 차지한다. 스페인은 막대한 은을 캐내고 대농장을 건설했지만, 정작 본국에서는 타국의 모직물 등에 사치하는 바람에 멕시코 은은 유럽으로, 그리고 필리핀을 거쳐 멀리 중국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된다. 멕시코 은은 16세기 가격 혁명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일본 은과 함께 세계 경제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지만, 정작 스페인에서는 바람직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멕시코 은이 물가 앙등의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17세기 이래 쇠퇴 일로를 걷던 스페인이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본토가 유린당하며 해외 식민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y Costilla,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신부가 돌로레스라는 마을에 위치한 그의 교회에서 사람들을 부른 뒤 스페인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킬 것을 부르짖었고, (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 이후 그를 중심으로 1810년대 독립 운동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달고 신부는 1811년 스페인 군대와 크리올들에게 패배했고, 그의 사망 이후 그의 독립 운동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가 이어받아 4년간 항쟁을 계속하나, 그 역시 1815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운동의 실패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 본토의 정권을 장악한 좌파 성향의 인물들로 인해 멕시코 식민지에서의 힘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크리올들에 의해 멕시코는 1821년 독립하게 된다. 그 독립을 선언한 사람은 다름아닌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였고,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방해 스스로 황제 아구스틴 1세가 되었다.제왕병자 1823년에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이 중앙 아메리카 연방을 구성하며 떨어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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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의 멕시코 제국의 영토.
이 영토를 한번봐줘 이 영토를 어떻게 생각해?...크고...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몇 십년 뒤면(...) 지못미

이때 멕시코는 현재 미국 동남부 지역인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일대를 차지하고, 파나마 지협 이북의 중앙아메리카까지 모두 지배하고 있는 아구스틴 1세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1824년 산타 안나(Antonio de Padua María Severino López de Santa Anna) 장군의 쿠데타로 붕괴하여 공화정이 성립되었고, 부정부패와 독재를 일삼던 아구스틴 1세는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의 일부였던 이탈리아의 리보르노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아구스틴 1세는 이후 다시 돌아왔다가 끔살(...)

멕시코 제 1 공화국의 헌법은 미국의 그것을 모델삼아 쓰여진 것이고, 공화국의 형태 또한 합중국이었다. 여러모로 미국에게 영감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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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의 멕시코 영토(...)

이후 산타 안나 등에 의해 강력한 중앙정부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했고, 멕시코를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는 스페인의 재침공도 막아내고 잘 나가나 싶었더만, 미국인들이 서부개척 한답시고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더니, 결국 1846년에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 멕시코 거의 절반 가까운 땅을 왕창 빼앗아 간다. 게다가 미국은 캘리포니아 반도랑 멕시코 북부 주까지 뺏으려 했으며, 텍사스에서는 석유가, 캘리포니아에서는 이 왕창 왕창 쏟아지고 미국은 강성대국을 넘어서 초강대국이 되었고 멕시코는 크게 몰락하였다. 이래서 멕시코로서는 더더욱 이가 갈릴 일이 되었고, 아직도 멕시코는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같은 곳이 원래 자기들 땅인데 미국에게 억지로 빼앗겼다고 여긴다. 솔직히 억지로 빼앗긴 거 맞잖아? 그래서 멕시코인 불법이민자들은 텍사스나 캘리포니아가 자국 땅이라면서 '이게 어디가 불법이냐?'라며 되려 큰 소리치기 일쑤다.

1860년대에는 전후 멕시코의 혼란상을 틈타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의 조카였던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괴뢰 황제 막시밀리아노(Maximiliano) 1세로 세우려 시도하였으나, 프로이센의 성장으로 인해 본국의 힘을 쌓아야 했던 프랑스가 힘을 빼면서 멕시코 제2제정은 붕괴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는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의 혁명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만다.

3 현대사

1870년대부터 멕시코는 포르피리오 디아스(José de la Cruz Porfirio Díaz Mori, 호세 데 라 크루스 포르피리오 디아스 모리)라는 전형적인 개발 독재형 대통령이 정권을 잡아 억압 속의 안정을 이루게 되고, 나름대로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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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권층에 집중된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1910년대부터는 멕시코 혁명의 물결이 멕시코를 뒤덮고, 이미 노년이었던 디아스가 별 힘 없이 물러난 상황에서 판초 비야(Pancho Villa),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등의 혁명 군사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를 멕시코 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시대를 상징하는 곡이 바퀴벌레라는 의미가 이후에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던 곡 '라 쿠카라차'이다.

그러나 판초 비야는 미국 국경을 넘어 약탈을 벌였다. 약탈이라고 해서 미국내에서는 도둑떼 취급을 받았지만, 판초 비야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좀 다르다. 당시 판초 비야와 사파타를 포함한 세력이 멕시코을 장악하였는데, 그들중 하나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런데 카란사는 혁명의 종료를 선언하였고, 미국이 이걸 지원하고 나섰다. 이 때 카란사와 비야의 대표적인 전투가 셀라야 전투인데, 이 때 판초비야 쪽의 미국산 무기가 문제를 일으키면서 판초 비야가 패하게 된다. 이후 판초 비야는 무기상과 카란사를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미국 도시 콜롬비아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탈'을 벌였다가 판초 비야는 존 퍼싱 장군의 추적을 받는다. 판초 비야는 산맥으로 숨어들었고 퍼싱은 지형상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결국 포기하고 퇴각했다. 이후 판초 비야는 카란사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은퇴해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이후에 암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판초 비야가 정치계로 나와서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한 카예스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 암살한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다.

사파타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어 급진 좌파 세력은 기가 꺾였다. 그렇게 멕시코는 1920년대부터 다시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해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판초 비야를 몰아내고 사파타를 암살한 카란사는 오브레곤의 반란으로 쫓겨나서 암살 당했다. 오브레곤 시대에도 안정되었다지만 역시 군사 쿠데타가 이어졌다. 오브레곤의 2차례 재임기간 도중에 집권한 플루타르코 카예스 시대에는 크리스테로 봉기라고 불리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교도들과의 사실상의 반란~전쟁상태가 벌어졌다. 과격한 무신론자였던 카예스 대통령과 그의 신정부는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 교육을 강제로 없애는 등 과격한 반가톨릭, 세속주의 강요정책을 시행했고(이를 비공식적으로 카예스법(Calles Law)’이라고 부른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항의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합법적 청원도 일체 거부하고 신부들을 죽이는 등의 폭압적 정책까지 저질렀다. 카예스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들은 멕시코 정부가 아닌 교황청에 충성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편협한 주장을 고수했고, 멕시코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교회의 권력과 재산을 몰수하려고 시도했다. 가톨릭 신부들에 대한 핍박과 순교가 이어지고, 결국 가톨릭 농민 신자들과 사제들이 게릴라전을 위시한 광범위한 민중봉기운동을 펼쳤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종교의 자유는 1929년 에밀리오 길 대통령 시대에 들어서야 개선되고, 가톨릭 신자들과 정부의 화해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예스 대통령 이후 재집권한 오브레곤도 암살. 포레스트 힐 시기에도 이어진 폭동과 파스쿠알 루비오는 암살시도 등 전반적으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대로 된 안정화는 플루따르꼬 까예스 대통령 이후 30년대 중후반 라사로 카르데나스 집권기 즈음 되어야 멕시코 혁명의 잔불도 진압 되고, 경제도 성장하여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개혁주의자 라사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del Río) 대통령에 의해 보수파의 거점이었던 교회에 대한 압력, 토지 개혁, 보통 교육의 확대, 석유의 국유화 등이 진행되면서 멕시코 사회는 변모해 나갔으나, 단선제이면서도 여당인 제도 혁명당에 의해 지속적으로 장악되어 '6년마다 죽는 신'이라고 불렸던 대통령주의와 정권의 보수화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 등의 인권 탄압으로 인해 제도 혁명당은 194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계속된 진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은 지속적으로 이루워졌고 비록 유혈사태로 얼룩졌지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과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 개최되었을때도 이때였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수입대체산업은 점차한계점을 보였으며 1976년 금융위기로 종말을 맞았다.

그래도 경제성장률은 그럭저럭 유지는 했으며 포르티요 대통령 시기 들면서 석유화학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석유에 대한 투자를 급속히 늘렸다. 그 결과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멕시코의 경제는 매년 고성장을 기록하였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라서 이에 따라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으며 당연히 공공지출이 늘어나지 않을수가 없었다. 1980년대 동구권 국가들이 체제전환이 이루워지게 된게 1960년대에 성장률 침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중공업에 투자를 했다가(루마니아와 폴란드가 그 예다.) 오일쇼크로 한차례 타격을 받고 1980년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갚아야 할 빚이 크게 증가하자 빚을 갚기위해 1980년대에 대대적인 긴축정책을 펼침에 따라 복지정책을 축소시켰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다. 당연히 인민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거기에 소련이 유가하락과 아프간전-체르노빌 사건 3콤보로 약해지자 공산당의 입지가 크게 약해졌고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것. 물론 체제전환 이후에도 이런 조치는 한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이후 계속되는 유가 하락과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해 빚이 가하급수적으로 증가했는데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해 이자율이 크게 올랐을때에는 석유가격이 상승세라 큰 문제는 안되었지만(1981년에 석유가격이 고점을 찍었다). 그런데 정작 1982년부터 유가가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났고[2], 특히 1985년에 일어난 멕시코 시티 지진과 사우디와 영국, 미국의 석유가격전쟁은 안 그래도 늘어나는 외채로 신음하는 멕시코 경제를 더욱 더 황폐화 시켰다.

이후에 여러차례 채무가 조정되기는 했지만 이미 멕시코의 부채는 감당할수없을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군사정부하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꾸거나 해외투자를 유치했는데 하필 오일쇼크때라 수출이 잘 안되었던데에다가 이자율이 급속히 올라가면서 재정적자가 급증하였고 그 결과가 경제파탄인것. 그리고 브라질은 그 후유증이 2000년대까지 갔다.

이 부채때문에 포르티요 이후의 대통령들은 심각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대통령들은 재정적 위기상황의 개선과 광범위한 경제부양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80~90년대에 걸쳐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조치도 그 일환으로 행해졌고 구조조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진데다가 구조조정이 적극적으로 행해지면서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아지고 임금도 크게 까이는건 물론 복지지출도 크게 축소되면서 멕시코인들의 삶이 악화되었다. 멕시코의 복지지출이 OECD에 가입한 나라 답지않게 적고 노동시간도 역시 최장수준인것도 이 시대의 유산이며[3] 그나마 출산율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은게 다행이다. 1982년 금융위기를 겪지않았으면 미국이 멕시코를 절대 무시하지 못했을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올 지경[4]

또한 1983년과 1987년 사이에 멕시코 주가가 경제상황과 관련없이 크게 오르기도 했지만 1987년에 블랙먼데이로 인해 멕시코 증권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경제난은 크게 가중되었다. 제도혁명당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져서 1988년 대선에서 민족민주전선으로 정권이 교체될듯 했지만 선거개표 도중에 정전을 시키고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는 방식의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 시켰다.

부정선거(선거결과 조작에도 득표율이 50.7%로 사상최저 기록)로 당선된 카를로스 살리나스(1988∼1994) 대통령은 취약한 정통성과 구조조정에 따른 엄청난 반발에도 시장개방정책을 추진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시켰으며 석유노조를 약화시키고, 1994년에는NAFTA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재임 후반기는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으로 1994년 3월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던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여당 후보인 콜로시오가 유세 도중 저격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1994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Chiapas)주에서 사파티스타원주민 농민들의 무장투쟁이 발생하면서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접어들었으며, 12월에는 외환위기까지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과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개입으로 일단 경제위기는 극복되었지만 이후에도 사회양극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부정부패도 여전히 심각했다. 그 결과 우파에선 국민행동당, 좌파에선 민주행동당이 크게 세를 넗혔으며 1997년 중간선거에서 제도혁명당은 과반에 밑도는 의석을 얻어서 일당제에서 3당제로 전환되었다.

2000년 7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계 야당인 국민행동당(PAN)의 빈센테 폭스(Vicente Fox)가 당선되어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71년 만의 역사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빈센테 폭스 정권하에서도 소득분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지지율이 크게 낮아져 2006년에 민주혁명당으로 정권교체 될듯했지만 선거 막판에 판세가 뒤집혀져서 국민행동당이 0.6% 안팍의 근소한 표차이로 겨우 정권을 연장하였고 이후에는 마약문제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고 말았고 2012년에 제도혁명당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이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1. 이때의 인구감소가 회복된건 만회하게 된건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였다.
  2. 더군다나 그 기간동안 지하철 공사도 벌이고 송유관 건설사업도 하고 그래서 경상수지 적자도 심각했던 터였다.
  3. 1980년대 초반 대비로 친다면 실질 최저임금이 20%대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1인당 GDP는 1980년대 초의 3배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빈부격차가 넘사벽급으로 벌어진데다가 비정규직도 대규모로 양성되었기에 실질적으로 하위층의 삶은 80년대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4. 아닌게 아니라 1981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멕시코의 60%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2010년대에 미국의 절반 수준으로까지 올라갔다. 만약에 멕시코가 1982년 금융위기를 겪지 않고 이전의 성장세를 미약하게나마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면 미국이 멕시코를 좀체 무시할수없을것이라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현재의 미국인들이 캐나다를 마냥 무시하지 않은것도 캐나다가 인구수는 적지만 복지혜택은 미국보다 더 좋고 결코 못살지 않기 때문이라는걸 생각해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