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혁명

revolución Mexicana

멕시코 혁명은 1910년 멕시코에서 장기집권하던 포르피리오 디아스 친미 정부에 대항하여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무장 투쟁이다.

1 배경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60년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워[1] 이를 격퇴시킨 영웅 중 한 명이었지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인 1876년부터 1911년까지를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고 한다.[2]

디아스 대통령은 산업을 진흥하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였다. 도로, 댐, 철도와 같은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덕분에 멕시코의 경제는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은 대장원을 소유한 하센다도스(hacendados)와 같은 부유층 뿐이었고, 도시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디아스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루랄레스(Rurales)라고 하는 경찰병력을 동원하거나 선거를 조작하는등 독재정치를 펼쳐나갔다.

때문에 디아스의 인기는 점점 떨어져갔다. 디아스의 폭정에 반대하던 마곤 형제[3]는 1900년 반-디아스 신문인 <갱생>(Regeneración)을 펴냈다. 그러나 탄압이 심해져 1905년 미국으로 옮겨야 했다. 또한 마곤 형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디아스가 권력을 잡고 있던 자유당(Partido Liberal)에서 갈라져 1905년 멕시코 자유당(Partido Liberal de México)을 조직하였다.

노동자와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노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1906년, 미국 자본 소유이던 멕시코 북부 카나네아(Cananea) 구리 광산에서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임금 차별을 이유로 파업이 발발했는데, 디아스를 뒤에 업은 사측의 강경진압으로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항구도시 베라크루스#s-2에서는 군인들이 파업중이던 노동자를 총으로 쏘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디아스는 1900년에 이미 칠순을 넘겼고 때문에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거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0년의 대선이 다가오면서 출마를 선언하였고, 윌리엄 태프트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까지 했다.

이 때 디아스의 대항마로 북부 지주 출신의 젊은 지식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등장한다. 마데로는 디아스 재선 반대 운동을 펼쳤다. 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진행되는 것을 본 디아스는 마데로를 감옥에 가둬버린다. 마데로는 감옥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디아스는 자신이 압도적 득표로 재선되었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부정선거였다.

마침 텍사스로 몸을 피한 마데로와 몇몇 지지자들은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을 발표하여 봉기를 호소하였고, 이에 따라 마데로 지지자들은 북부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로서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2 1차전 : 반(反) 디아스 전쟁

멕시코 각지의 수많은 세력들이 '디아스 타도'라는 목표를 가지고 마데로를 중심으로 규합하였다. 그러나 흙수저부터 금수저까지 그 성격이 다양했다. 이는 디아스를 몰아낸 이후 또 싸움이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 파스쿠알 오로스코(Pascual Orozco Vazquez) : 치와와 주를 기반으로 한 혁명가. 그의 집안은 금광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파스쿠알은 마곤 형제들의 영향을 받아 혁명의 때를 기다리며 미국에서 무기를 수입해오고 있었다.
  • 아브라암 곤살레스(Abraham González) : 치와와 주의 가장 부유한 집안 출신인 정치가로, 치와와의 마데로 지지자의 리더였다. 판초 비야가 혁명군에 가담하도록 설득하였다.
  •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 : 본래 농장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혁명 전에는 산적이었다. 멕시코 혁명에서 쌓은 명성을 통해 북부 농민들의 리더가 된다.
  • 마곤 형제 : 미하일 바쿠닌, 피에프 조세프 프루동, 크로포트킨 등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자 형제. 멕시코 원주민 혈통이다.
  • 에밀리아노 사파타 : 남부 모렐로스 주를 중심으로 활약한 혁명가. 농민들을 대변하였으며 대농장주들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 코아우일라 주의 중상류층 집안 출신.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미국의 힘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 구스타보 마데로(Gustavo Adolfo Madero)를 미국에 보내 로비활동을 펼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찰스 란넷 플린트[4][5] 등의 재벌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멕시코 혁명가들에게 법을 덜 불리하게 적용되도록 영향을 끼쳤다.

북부 지역에서 메히칼리, 시우다드후아레스, 치와와 시 등이 혁명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남부에서는 사파타가 쿠아우틀라를 점령했다. 혁명군의 세력이 넓어질 수록 그 규모 또한 커졌다. 하지만 혁명군이 하나의 목표를 가진 건 아니었다. 마곤주의자드은 메히칼리티후아나를 포함하는 코뮌 자치정부를 세웠다. 이 자치정부는 디아스가 물러나 이후 마데로에 의해 진압된다.

"혁명을 진압합니다. 어? 진, 진압이 안돼. 진압시킬 수 없어, 안-돼!" 상태가 된 디아스는 결국 마데로와 협상을 벌였다. 1911년 5월 21일 맺어진 <시우다드후아레스 조약>(Treaty of Ciudad Juárez)에 따라 25일에 디아스는 사임하고 파리로 망명했다.[6] 디아스가 물러난 이후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루어 질 때까지 프란시스코 바라(Francisco León de la Barra)가 다섯 달 정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3 대통령 마데로

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마데로는 대통령직을 그다지 원활하게 수행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건 혁명 시작부터 보였던 조짐으로, 너무나 다양한 세력들이 그의 밑으로 모이다 보니 생긴 결과였다.

마데로는 멕시코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노조 설립 또한 허용하였다. 그런데 이를 통해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그를 지원했던 해외 재벌들이 타격을 입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사파타를 비롯한 농민층이 토지 개혁을 요구했으나, 마데로는 농지개혁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사실 마데로 및 여러 혁명 지도자들이 대지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사파타는 1911년 11월 25일, <아얄라 계획>(Plan of Ayala)을 발표하여 반-마데로 봉기를 일으켰다.

북부에서는 마데로부터 기대에 못미치는 보상을 받은 오로스코가 마데로를 적대하기 시작했고, 1912년 4월 3일, 마데로가 노동조건 개혁에 반대하자 이를 계기로 콜로라도스(Colorados, 붉은 깃발군)를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마데로는 디아스 휘하에 있었던 군대인 연방군을 동원했다.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연방군 장군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를 보냈고, 판초 비야도 종군했다. 우에르타는 비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였고, 말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비야를 잡아다 사형을 선고하였다. 비야는 겨우 미국으로 탈출했다. 우에르타는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거기에다가 디아스 휘하의 장군이었던 베르나르도 레예스(Bernardo Reyes), 디아스의 조카인 펠릭스 디아스(Félix Díaz)가 멕시코 시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913년 2월 9일부터 19일까지 이어졌는데, 이 시기를 비극의 열흘(La Decena Trágica)이라고 부른다. 마데로는 우에르타에게 진압을 명령했으나 이미 우에르타는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결국 마데로와 그의 측근들은 살해당하고 만다.

4 2차전 : 반(反) 우에르타 전쟁

우에르타를 물리치고 멕시코 시티에 입상한 판초 비야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찍은 영상. (0:53 경) 대통령궁에서 혁명 지도자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 (1:14 경)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장례식. 판초 비야가 울음을 터트린다.. (1:37 경) 멕시코 시티를 떠나는 혁명군의 모습.

5 3차전 : 농촌 vs. 도시

6 영향

멕시코의 민요로 잘 알려져 있는 라쿠카라차가 지금의 인지도를 얻은 계기이다.

추가바람
  1. 프랑스는 멕시코에 괴뢰정권을 세웠다. 이 때 황제가 되었던 사람이 막시밀리아노 1세
  2. 중간에 후안 멘데스가 두 달 대통령직에 있었으나 존재감은 없었고, 마누엘 곤잘레스가 1880~1884 동안 대통령이 되었으나 디아스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받아 실행하였다.
  3. 아나코-코뮤니스트인 리카르도 마곤(Ricardo Flores Magón), 엔리케 마곤(Enrique Flores Magón), 헤수스 마곤(Jesús Flores Magón)을 가리키며, 이들의 사상을 마곤주의(Magonismo)라고 부른다.
  4. Charles Ranlett Flint(1850~1934). 트러스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사업가. 그가 세운 CTR 지주회사는 후일 IBM으로 발전한다.
  5. 디아스를 지지하고 있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경쟁중이었다.
  6. 이 때, 디아스는 "마데로는 호랑이를 풀어놓아버렸다. 어디, 잘 길들이는지 한 번 지켜보자."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