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포르의 사자
이름 | 에티엔느 마틀레르 (Étienne Mattler) |
생년월일 | 1905년 12월 25일 |
사망년월일 | 1986년 3월 23일 |
국적 | 프랑스 |
출신지 | 벨포르 |
포지션 | 풀백 |
신체조건 | 180cm / 82kg |
등번호 | -[1] |
소속팀 | US 벨포르(1921-1927) 트르와 AC(1927-1929) FC 소쇼-몽벨리아르(1929-1946) |
국가대표 | 46경기 / 0골(1930-1940) |
감독 | FC 소쇼-몽벨리아르(1944-1946) |
1 생애
1.1 선수 생활
마틀레르는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10대 초반에는 사이클 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형의 권고로 고향 축구팀인 유니옹 스포르티브 벨포르에 들어갔다. 이때가 마틀레르의 나이 16세 때였다. 1927년 이후에는 프랑스 동부의 트르와 AC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소쇼에서 활약하였다. 소쇼에서는 주로 레프트 풀백으로 활약하였고 소쇼에서 주장을 맡았다. 소쇼에서 앙드레 아베글렁, 로제르 쿠르투아, 브리튼 윌리엄스 등과 활약하며 소쇼를 프로화 시절 초기의 강팀으로 만들었다.
1.2 국가대표
2차 대전 이전 프랑스 대표팀의 최다 출장 기록은 그의 차지였다. 3번의 월드컵에 모두 참여하면서 46회의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4회는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1.3 은퇴 이후
은퇴 직전에는 소쇼에서 잠시 선수 겸 감독을 맡기도 했다. 고향팀 벨포르에서도 일했으며 축구계를 떠난 이후에는 Tabac라는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식품 회사의 대표로 일하기도 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마틀레르는 신체적으로 강하고 운동 능력이 뛰어났으며 용감한 수비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투쟁심으로도 유명했는데 턱뼈 골절[2], 인대 파열[3] 등의 부상을 입고도 경기를 끝까지 마쳤다. 상대가 파시스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또한 소쇼가 현재까지 프랑스 리그에서 우승한 적이 2차례에 불과한데 모두 마틀레르가 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소쇼 팬들에게는 당연히 역대 최고의 주장이다.
3 뒷이야기
- 그의 신체 조건과 용기는 정비례했다. 1938년 나폴리에서 열렸던 이탈리아와의 A매치 이후 연회가 있었다. 대놓고 무솔리니를 찬양하고 인종 차별의 구호가 나오는 상황. 여기에서 마틀레르는 대표팀의 새내기였던 흑인 선수 라르비 벤바렉을 공개적으로 감쌌다. 이 행동으로 당시 프랑스 대통령 알베르 르브렁에게 큰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레지스탕스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44년 2월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탈옥하였고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계속 싸웠다.
4 수상
4.1 클럽
- 디비지옹 1 우승 2회: 1934-35, 1937-38(이상 FC 소쇼-몽벨리아르)
- 디비지옹 1 준우승 1회: 1936-37(FC 소쇼-몽벨리아르)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회: 1937(FC 소쇼-몽벨리아르)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1933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시합
- ↑ 1937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시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