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지금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연구자의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을 그려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알베르트 슈바이처,1906년에 출판한 <예수의 생애 연구사: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 Von Reimarus zu Wrede) 중에서[1]
수천의 사람들의 수천가지 역사적 예수 확산성 밀리언예수?
1 개요
이 '역사적 예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교의 근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근간이 된 인물을 신성성을 배제하고 순수히 인물성으로서만 재구성하는 것으로, 예수의 실존여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실존에 대한 것이 궁금하다면 예수/역사 항목으로 이동할 것.
2 역사적 예수의 탄생 배경
때는 근대. 신은 죽었다.
기나긴 중세와 근세에서 빠져나온 근대인이 보기에,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하느님은 죽은 것 같았다. 종교의 사회 지배가 무너지면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하느님이 차지하던 영역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중세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던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속이나,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의 시공의 저편, 혹은 사후세계, 2000년 정도 기다렸는데 아직도 오지 않은 하르마게돈의 뒤의 시간으로 숨어버렸다. 첫 번째 밀레니엄은커녕 두 번째 밀레니엄의 세기말에도 세상은 안 망했고 휴거 따윈 없었다. 여전히 의외로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온 세상을 다스리던 때와 비교하자면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2000년 동안 여러 모로 관찰한 결과 기적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인간은 섹스 없이 태어날 수 없는 것 같고,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든가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는 이야기는 2000년 전 이래로 두 번 다시 듣지도 못했다. 망원경으로 하늘을 쳐다보니 천사나 천국은 있지 않았다. 질병은 바알세불의 부하들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작은 미생물들이 일으키는 것이었고, 정신병도 대체로 악마나 귀신의 빙의가 아니라 마음이나 뇌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 밖의 시시한 기적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고기 몇 마리와 떡 조금이 더 있은들 세상이 바뀔게 뭐가 있단 말인가? 물 위를 걷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까짓 무화과 나무가 말라비틀어 죽든지 말든지. 등등등.
일이 여기까지 오자 신학의 시녀로 취급되던 철학자들이 말했다. 하느님은 죽은 거 아니야? 엘리야가 나타나 "저 바알의 신도들에게 불벼락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피뢰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조차 막아버렸다. 문둥병에 걸렸던 욥은 의학의 발달로 그냥 치료받아서 나았다.
2000년의 세월을 흘러서, 예수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번에 못박힌 것은 2000년 동안 인간이 철저하게 노력해서 만들어낸 이성의 십자가다. 롱기누스는 의심의 창으로 옆구리를 푹푹푹 찔러댔다. 아주 오래전에 한 번 죽었을 때와 똑같이, 하느님=예수는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살아올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보기에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고 다시 살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때 예수의 제자들은 2000년 전보다는 훨씬 많았고, 그때 그 베드로처럼 3번이나 배신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정신을 다졌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기적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느님 같은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성"과 "기적"이라는 측면을 제거한, 역사적으로 실존한 예수 전기라는 장르가 탄생하였다. 문학적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란 이런 것을 말한다. 의외로 이런 것을 많은 사람들이 써먹었는데, 토머스 제퍼슨도 그 중 하나라 한다.
이런 유행 덕분에 아무튼 예수를 "사람들이 배울 만한 가르침을 남기고 간 휼륭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은 그런대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대충 "예수는 좋은 이야기나 가르침을 많이 남기고 갔고 그것은 충분히 가르침이 되고 따를 만한 것이며, 그가 비참하게 죽은 탓에 너무 충격받은 제자들이 부활했다든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망상을 널리 퍼트리기는 했는데 아무튼 그것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신경 끄자." 대충 이런 생각이다.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인이나 심지어 무신론자도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이미지 향상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을 깡그리 부정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전례 없이 과격한 이단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의 단성론이나 영지주의를 넘어 "무성론(無聖論)적 예수관"이라 할 수 있다.
즉 요약하면, 하느님과 기적이 무용시되어가는 때에, 예수의 행적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성인의 경지에 올라있기에, 신성 다 빼고 있던 그대로의 예수를 보자는 이야기 되겠다.
3 근래의 역사적 예수 논란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으로 말미암아 촉발된 '나자렛 예수의 역사성' 논쟁이 1950년대에 그야말로 폭풍우 같은 논전으로 발전했다. 불트만은 종교에서 역사성을 완전히 잘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오히려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신화적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을 더럽히고 있다고 비난했다.
중요한 점은 20세기 들어 가열된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화적인 예수의 모습을 걷어내고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았던 예수라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조명해보고자 하는 방법론이며, 예수의 실존 유무를 가리는 연구가 아니다.
근래에 이르러 1985년에 로버트 펑크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이 주축이 된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가 발족되어 예수의 실제 발언을 가리는 등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 받았지만, 그 일원의 대부분이 미국 서부의 신학자이며 연구 방법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0년 봄에 쓰여진 신학자 스콧 맥나이트의 기고문을 보면 현재 역사적 예수 연구의 위상에 대해 알 수 있다. 맥나이트의 기고문에서는 1980년대에 열린 역사적 예수 연구 세미나의 인원이 500명이 넘었었지만, 최근에 열린 역사적 예수 연구 세미나의 인원이 그 25분의 1인 20명밖에 되지 않아 사실상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끝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 역사적 예수 연구의 1세대인 슈바이처의 '학자들은 스스로 재구성한 예수를 믿는다' 결론이 다시 나온 셈이다.
크로산은 이미 현대 신학계에서는 그때의 예수, 지금 우리의 예수로 구분하여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현대 신학계의 사고방식이다.
사실 이제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라는 표현보다는 순수한 예수(Pure Jesus) 혹은 본연의 예수(Natural Jesus)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본문의 중간쯤에서 이야기했듯이 이제 신학자들이 찾는 '역사적 예수'는 장애물이나 벽으로 대표되는 '역사학적 예수'의 속성을 버리고, 세상의 때와 오물이 묻지 않은 순수한 성직자(당시에는 랍비)로서의 예수를 찾는 것이니 말이다.
현대 신학계의 예수의 메시아 인식에 대한 글은 다음을 참고하라.
우선 유대인들의 메시아 상(像)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자기 메시아성(性)을 직접적으로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수반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메시아였다. 메시아로서 예수가 걸어간 길을 아무리 설명해 준다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단지 간접적으로 그런 메시아의 징표들을 보여주고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메시아성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었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져야할 마지막 순간에도 가능한 대로 그 잔을 받지 않기를 바랐으며,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왜 나를 버리시는가!" 라고 외치셨다는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을 미루어보면 그런 개연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여긴 게 틀림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을 뿐인데, 초기 기독교는 그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를동일시 하게 되었다. 선포의 대상이 선포하는 자와 일치를 이룬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메시아 인식이 불분명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인식이 기계적 차원에서 증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변호사나 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따는 것처럼 예수에게 메시아 자격이 그런 방식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메시아 인식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면서 마귀에게 시험받던 그 시기에 메시아 인식이 이루어졌을까? 아니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였을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그런 인식이 완전하지 못했지만 부활 사건으로인해서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일까? 우리는 그것의 세밀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 예수가 바로 메시아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믿을 뿐이며, 따라서 그가 이 세상 끝날 다시 오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기다릴뿐이다. -정용섭[2], <세상은 마술이다> 中- |
4 관련 도서
1990년대에 간간히 소개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활발히 번역서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슬람 입장에서 《젤롯》이란 작품도 있다. 국내 도서로는 좌파칼럼니스트이자 어린이잡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인 김규항이 이념적인 입장에서 다룬 의 《예수전》이 있다.
이렇게 소개가 많이 되어 아무 인터넷 서점에서 '역사적 예수'를 키워드로 하면 수많은 책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당연히 성경, 특히 신약의 앞의 3개의 공관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다루는 부분이므로 잘 알고 있어야 논지를 따라갈 수 있다.
예수에 대해 가장 상세하고 디테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은 역시 성경이므로, 역사적, 본문비평학적으로 성경의 작성, 구성, 전승, 수정을 연구하는 것도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데 필요하며, 본문비평학과 '역사적 예수'는 상당한 관련이 있다.
소설로는 신이된 남자 라는 소설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