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전투


영천전투 전적비

이 문서에서는 영천지구 전투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혹은 연계적으로 일어난 보현산지구 전투 및 신녕지구 전투를 함께 서술하고 있다. 흔히 영천 전투라 하는 영천지구 전투를 볼려면 3.4 각주로 이동 부탁. 나중에 필요할시 따로 분리해주길 바람.

1 개요

1950년 8월 7일부터 9월 13일까지 영천 일대에서 영천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던 북한군 2군단과 이에맞서 국군 8사단7사단 6사단이 벌인 전투로 북한군을 격퇴시키며 영천을 수성하는데 성공한 전투이다.

2 전투전야

북한군은 8월의 대공세가 다부동 전투등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15사단을 영천으로 투입하여 영천을 함락하고 대구로 향하려 하였다. 만약 영천이 함락당한후 대구로 진격한다면 다부동일대의 1사단미군이 포위당할수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양측의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게 되었다.

3 전투

3.1 보현산지구 전투

청송 현동면까지 내려온 북한군 제766부대의 남은 병력이 아군의 경비망을 피해 보현산 북쪽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후방으로의 침투를 노리고 다음 공격을 위해 증원부대를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북한군 제 12사단의 일부 병력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입암을 지나 내려와 보현산지구의 766부대와 만나는데 성공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8월 7일 이들은 병력을 집결시켜 보현산 주변의 국군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하였으나 국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그러자 이후 양방은 소규모 교전을 계속하다가 8월 15일 이후 적 제15사단이 이곳에 투입되자 아군은 매우 불리해졌으며 이에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저지하려 하였으나 다음날 돌파당하고 말았으며 이에 국군은 분산철수한다.

3.2 신녕지구 전투

8월초 포항지구로 침투하던 북한군은 의성 지역에서 입은 병력 손실로 인하여 신녕지역으로 진출했다. 이 신녕지구는 국군 6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북한군은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으나 6사단의 분전으로 되려 큰 피해만 입었고 대구진출을 포기하게되었다. 이에 6사단은 9월 반격을 가하여 9월 4일 제 19연대의 1대대가 화산동 일대에서 적 전차 8대를 파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3.3 신녕 화산지구 전투

9월 4일 북한군은 신녕지구에서는 패배했지만 보현산 지구에서 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영천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 8사단이 대구를 우회공격하기위해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신녕으로 진출하자 국군은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포병을 이용하여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9월 7일 조림산과 운산동에서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공격했으나 이를 미리 간파한 국군은 포병의 집중화력으로 섬멸했는데 이에는 유재흥 준장이 각 연대에게 되도록 많은 예비대를 남겨두도록 한 것이 컸다.

이날 측면의 6사닥 7연대또한 2개 대대병력의 공격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취뤘으나 7연대는 진지를 약간 뒤로 후퇴해 매복했다 미 공군 지원 사격과 포병의 지원을 등에업고 공격하여 적에게 큰타격을 입혔다. 이후 8일부터 15일까지 크고 작은전투가 일어났지만 국군은 적을 모두 격퇴해냈고 이에 북한군 8사단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으며 국군은 북진반격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3.4 영천지구 전투

1950년 9월 5일 비가내리는 가운데 북한군 15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국군 2군단 8사단 정면돌파를 시도하였고 이에 국군은 기습공격으로 인하여 돌파당해버렸다. 이에 사태가 심각해지자 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영천 북쪽에 21연대와 6사단의 16연대를 배치해 적의 후속부대와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했고 아화리와 유상리 일대를 방어하고있던 북한군 1사단 16연대와 11연대를 공격했다. 한편 포항 전투에 참여했던 10연대도 긴급히 원대에 복귀하여 교전을 치루었다. 이에 북한군과 국군의 영천을 둘러싼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국군은 열흘동안의 공방전 끝에 9월 13일 영천을 탈환하였으며 전투 이전의 낙동강 방어선을 회복하였다. 한편 영천에서 후퇴하던 적은 퇴로가 국군에 의하여 막혀버렸고 북한군은 포위당하여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다.

4 피해상황

이전투에서 북한군은 3500 여명의 전사자와 210명의 포로가 발생하였고 전차 8대 각종대포 30여문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5 의의

만약 이 전투에서 패배했더라면 다부동지역의 국군과 미군이 포위되고 낙동강방어선이 붕괴돌수도 있었다. 이는 곧 국군이 패배한다는 것이므로 이를 저지해낸것은 당연히 매우 의미가 깊다. 또한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변하게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북한군 15사단에게 핵펀치를 날렸음과 함께 국군에게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