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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날리던 시절.
말년의 모습.[1]
대한민국 육군의 제1야전군사령관 | ||||
2대 송요찬 | → | 3대 유재흥 | → | 4대 김종오 |
대한민국 국군의 합동참모의장 | ||||
2대 정일권 | → | 3대 유재흥 | → | 4대 백선엽 |
4대 백선엽 | → | 권한대행 유재흥 | → | 5대 최영희 |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 ||||||
18대 정래혁 | → | 19대 유재흥 | → | 20대 서종철 |
목차
1 개요
劉載興 1921년 8월 3일 ~ 2011년 11월 26일
일본과 대한민국의 군인. 일본 나고야 출생. 고향은 나고야이지만 5살 때 귀국해서 줄곧 한국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창군기의 많은 동료들은 그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덕천 전투로 2군단을, 현리 전투에서 3군단을 전멸시킨 전설의 패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2 그의 아버지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일본군 대좌까지 올라갔던 유승렬의 아들이다. 이걸 보면 유승렬이 당대의 인재로 인정받기는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관비유학생이 된 것 부터가 대단하다. 대한제국은 국비 유학생을 의외로 많이 보냈는데 대부분이 일본이었다. 다만 국비로 보낸 유학생들의 상당수가 반고종으로 돌아선 것은 고종의 문제라고 해도, 이들의 대부분이 친일파로 돌아선 것은 이 시기 대한제국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가 되었다. 친일파로 가지 않은 케이스의 대부분은 또 중도 귀국해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의 국비유학생 제도는 그야말로 대실패작이었다.
하지만 관비유학생은 실패였지만 유승렬 자신이 능력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 능력을 친일에 써먹어서 그렇지...유승렬 역시 대한민국 건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였으며, 부자가 함께 한국군에서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장군 진급은 임관 시기 및 한국군 복무기간의 문제로 유재흥이 더 빨랐다.
유재흥은 1941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55기로 졸업, 1945년 종전 당시 대위까지 진급했다. 여담이지만 유승렬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들에게 꼬박꼬박 거수경례를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 없이 단 두 사람만 있을 때도 절대 경례를 빼먹지 않았으나 말만은 놓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공석에서는 경어를 썼다는 이야기인 듯. 이런 부자간의 전력때문에 당시 북한 선전물에는 부자가 쌍으로 친일모리배다, 조선말도 변변찮은 놈 운운하기도 했다.
3 6.25 전쟁 이전
비매품으로 나온 자서전에 의하면 우수한 성적으로 제국 육군대학을 지원했으나 종전으로 인해서 입학이 무산되었다는데 자기자랑인지. 실제 그 정도 실력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지로 대한제국 왕가가 아닌 일반인으로 육군대학을 나온 사람은 홍사익이 유일하다.
1945년 12월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교육기관인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입교, 다음해 1월에 졸업하면서 구 일본군의 계급을 인정받아 남조선 국방경비대 정위(대위)로 임관했다. 이 시기에 임관한 이들답게 유재흥의 진급은 매우 빨라, 1948년이 되면 이미 대령으로서 여단장과 사단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9년에 부친인 유승렬의 현역 대령 임관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어 동년 제주도전투지구 사령관으로 부임, 4.3 사건 후반기의 한국군 지휘를 총괄했다. 이 시점에서의 의혹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으나, 일단 4.3사건 후반기의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지휘책임은 있다. 물론 유재흥이 맡았을때는 4.3도 어느 정도 끝물이라서 유명한 학살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응준이 4.3 당시 비난을 받아야 할 일.
3.1 4.3 사건 사령관 시절
유재흥은 4.3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 사이에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미군 비밀문서 『4·3 종합보고서』[2]에서도 다음처럼 나온다.
반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요구했다.
4.3 보고서만 해도, 유재흥은 토벌대의 학살속에서 제주도민들을 구해낸 인물로 평가된다. [3]
이날 2연대가 작전을 벌인 후 이웃마을 봉개리에 주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살아 남은 주민들은 더 이상 마을 부근에 은신할 수 없었다. 이후 주민들은 더욱 깊은 산속으로 은신해 들어갔다.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온 것은 1949년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사이였다.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내려왔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하산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이젠 막 죽이진 않는다더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유재흥 대령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이른바 ‘선무공작’을 펼 때이다. 앞서 하산한 사람이 산으로 올라와 이런 사실을 알려주자 비로소 내려온 것이다. 이는 앞서 벌어졌던 집단총살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가를 말해준다.
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작전을 함병선 2연대장이 주도한 제1기(3월 2일~3월 마지막 주)와 유재흥 사령관이 비로소 제주에 도착해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한 제2기(3월 마지막 주~5월 15일)로 나눌 수 있다. 실제 상황에 들어가면 1기와 2기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유재흥이 오기 전만해도 4.3 사건 상황은 이랬다고 묘사된다.
사살‧포로자 숫자에 비해 노획한 무기가 너무 적다는 점은 함병선 연대장이 주도한 3월 한 달 동안의 이른바 ‘섬멸전’의 성격을 말해 준다. 사살‧포로자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숨어 지내던 비무장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작전은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한 미군 보고서(7)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는 1949년 3월말까지의 제주 상황에 대해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유재흥 장군이 온 뒤부터는 이렇게 된다.
3월 마지막 주에야 비로소 제주에 도착한 유재흥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은 선무공작을 실시하는 한편 지금까지 해안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산악지역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유재흥 사령관은 남아있는 무장대 체포와 특히 ‘2만 명 가량의 피난민’을 하산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지휘권을 잡은 즉시 유(재흥) 대령은 전임자 함병선의 가혹한 작전(이 작전은 신분이나 무기의 소지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것을 포함한다)을 바꾸어 즉각적으로 사면계획을 시작하였다. 가능한 한 포로들을 붙잡아서 유 대령 자신이 직접 심문하였다. 포로들은 양심의 가책을 나타냈으며 만일 그들이 게릴라 전투요원으로 가담한 자가 아니면 음식과 담배 등을 주어서 석방하였다. 현재까지 이러한 방법의 결과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석방된 포로들은 유 대령의 부대를 무기 은닉처로 안내할 것이며 그들의 동료들에게 항복하면 모두 사살 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유 대령은 자신의 사면계획 하에서 석방된 포로들마다 최소한 6명씩을 데리고 왔다고 추산하고 있다. (“Visit to the Island of Cheju,” May 18, 1949, RG 319: Records of the Army Staff, Entry 85: Army-Intelligence Document File, Box 3736. )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이같은 ‘귀순자’ 증가에 관해 4월 7일부터 13일까지 제주를 시찰하고 온 이윤영 사회부장관은 “요즘 귀순자가 늘어가고 있는데 내가 갔다온 1주일간만 하더라도 898명이나 귀순자가 있었고 4월 13일 현재 합계 3,500명이 돌아왔었다. 제주도 5개 수용소에 있는 자가 3,174명이 있다”고 말했다.(��東亞日報��, 1949년 4월 15일.) 귀순자는 점점 늘어 5월 11일 현재 6,000여 명에 달했다.(��朝鮮日報��, 1949년 5월 20일.)
유재흥이 재평가받는 경우 대부분은 4.3 사건에서 보여준 처신에 근거를 둔다.
4 6.25 전쟁에서
4.1 의정부 방어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돌연한 인사이동 과정에서 의정부 방면을 담당하는 7사단장이 되어 의정부 방어전에 참가했다. 문제는 해당 인사이동이 한국군 10대 의혹이라고 불리는 한국전쟁 당시의 열 가지 의문사항 중 하나로, 한국전쟁 개전 직전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갑자기 서로 자리를 바꿈으로서 현지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개전을 맞이했다는 의혹일 정도라서 유재흥도 그 피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정부 방어전의 패배 원인에서 당시 7사단장이었던 유재흥이 1차적인 책임이 있다. 후에 그가 몇 차례 겪음으로서 엔하위키에서 대한민국판 원균이나 한국의 하후무라는 평판을 듣게 된 계기인 유재흥이 전선 우익을 맡은 경우 전 전선이 유재흥 담당 방면을 시작으로 붕괴하는 현상은 이때 처음 발생했다. 덕분에 제1보병사단은 우측면에서 침투하는 T-34 전차를 막지 못해 임진강 주진지선에서 밀리게 된다. 참고로 해당 현상은 나름 유명해서 훗날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현리 전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유재흥 장군이 군단장일 때 발생한 청천강 전선 붕괴를 언급하며 이번에도 또 그랬다고 대놓고 섭섭해했다.
다만 고려할 점은 있는데, 기본적으로 당시 한국군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3개 연대 편성인 반면에 제7보병사단은 역시 개전 직전 내려진 명령에 따라 후방으로 배치된 1개 연대는 이미 모두 새로운 주둔지로 이동해서 유재흥의 손에서 벗어난 반면, 새로 올 연대는 아직 기존 주둔지에서 출발도 못해서 결국 개전 당시 2개 연대 편성이었던데다가 북한군의 105땅크여단 등의 주공축선 역시 7사단 방면이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6월 26일에 있었던 당시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의 무리한 반격명령을 받아 이를 수행해서 자신이 담당한 전선에서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채병덕이 투입한 포천 방면의 부대는 숫자가 적어서 의정부 근처의 축석령을 지키다가 일거에 돌파당하는 바람에 7사단의 퇴로가 차단돼서 사실상 붕괴한 것까지 감안한다면, 최소한 개전초기 그가 지휘한 7사단의 붕괴로 인한 전선붕괴는 그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4.2 포항-영천지구 전투
지연작전기간(1950.7~8월. 한강방어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철수 과정)에서 수 차례의 지연전투를 비교적 양호한 지휘 끝에 그럭저럭 제대로 치른 후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의 두 번째 군단인 제2군단 군단장이 되었고, 이후 포항-영천지구 전투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포항-영천지구 전투는 한국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약간씩의 이견이 존재하는데, 일단 국군의 선전으로 북한군이 사실상 적화통일의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견이 있다면 당시 한국군이 입은 상당한 손실과 더불어 부분적인 전술적 미스가 유재흥의 지휘책임이냐 아니냐 정도인데,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기는 하지만 일단 유재흥이 충분히 유능하다 할 수는 없었어도 일단 승리한 것도 있고 미스들조차 그의 지휘책임을 물을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4.3 모래성
1950년~1951년 동계전역과 1951년 춘계 공세에서 유재흥은 두 차례에 걸쳐 군단장으로서 적 주공을 우익에서 받고, 먼저 붕괴해 버림으로서 전 전선이 붕괴되는 상황의 주역으로서 등장했다. 두 번 모두 그 자리에 장기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본 참모부장/참모차장 등으로 발령을 받아 잠시 일선을 비웠거나 다른 부대의 지휘권을 맡았다가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원대복귀한 상황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적절한 수준으로 전장 상황을 파악할 충분한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는 견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정작 1950년 동계 후퇴전 직전의 백선엽 장군은 유재흥과 비슷한 경험(1사단장에서 2군단장으로 일시 자리를 옮겼다가 1사단으로 복귀)에서 "더 높은 곳에서 상황을 보고 왔기 때문에 심각성을 잘 알 수 있었고, 효과적으로 후퇴 지휘가 가능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물론 백선엽 장군이 워낙 명장이라 더 비교되는 감도 있지만.
어쨌든 1950년 청천강의 도미노 현상에서는 워낙 중국군에게 의표를 찔린데다 최고지휘부인 맥아더 GHQ의 실책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심각했기 때문에 유재흥의 지휘책임이 딱히 거론되지는 않았다. 이 역시 당시 미국에서 반전 여론이 매우 강하였으며 맥아더는 미국 대통령과의 심각한 불화가 있었고, 차후 공개 문서에서 미국이 이미 전역을 결정하고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 등 실패를 맥아더에게 떠넘기기 위한 묻어가기라고 보기에도 충분하다.
백선엽 대장은 1950년 청천강 패전 직전 그와의 만남에서 "전 지휘관은 원복하라"는 육군본부 명령을 "어, 다 토라카라 크래"라고 전했다고 기억했다. 어디서 많이 본 발음이다(...). 한경이라거나...
또한 1951년 현리 전투 패전은 한국군과 미군의 상호간 책임 전가와 더불어 한국군이 급속한 확장의 결과 정예화가 요원한 상태이며, 기본적으로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후진국 특유의 서툰 군대에 불과하다는 부끄러운 진실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유재흥 본인 또는 미군 둘 중 하나에게 모든 책임을 최대한 뒤집어 씌우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편이다.
물론 위의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개인의 책임이 면피가 안된다. 어쨌든 유재흥은 모든 책임을 1차적으로 져야할 3군단장이었으니까. 이 전투에서 유재흥은 충분히 능동적이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지휘를 하였다. 사실 현리 전투에서는 적전도주를 하지 않은 고급장교가 없고 초급 및 중견장교들이 계급장을 떼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산속으로 이리저리 튀어버린 사태였으므로 모든 걸 유재흥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겠으나, 이 혼란상에 유재흥이 아무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군단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소멸했는데 군단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누구에게 물으란 말인가? 백선엽 장군은 이에 대해 "어떠한 지휘관이라도 당시 중공군의 집중적 공세를 국군의 부족한 화력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평했다(월간조선 2010.06).
4.4 그 이후
현리 전투 패전 이후 유재흥은 육군참모부장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군단장으로 한 차례 전선으로 나와, 중부전선의 고지쟁탈전에서 평범한 군단장 수준의 지휘를 보여준 후 중앙부처로 돌아가서 후방에서 휴전을 맞았다.
5 전쟁 이후
1957년에 현재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하는 연합참모총장이 되었고, 1959년 제1군사령관이 되었다가 1960년 4.19 혁명을 전후하여 있었던 한국군 고위 장교단의 무더기 퇴임 때 중장으로 퇴역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퇴역한 백선엽 장군과 마찬가지로 거의 10년 동안 외국 대사직을 전전하다가 1970년 대통령 특별안보보좌관직을 시작으로 정부 중앙에 복귀, 1971년 국방장관이 되었다. 이후 공직에서는 은퇴하고 공기업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91년 성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6 그에 대한 평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업적을 평가하자면, 전반적으로 볼 때 상대와 병력이 유사한 경우에는 잘 싸운 편이었으나 주로 그가 있었던 곳이 주공을 받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할 때 실력은 평균보다 좀 더 나은 정도이나 운이 더럽게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그의 악명높은 패배 모두가 "대놓고 약한 애를 갑옷 입은 애가 흠씬 두들겨 팬" 싸움이 아니면 "대놓고 약한 애를 아주 큰 애가 단체로 몰려와서 흠씬 두들겨 팬" 싸움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다만 그나마 피할 수 있었을 상황을 피하지 못한 경우가 비교적 자주 보인다는 점도 고려는 해야 한다.
개전 초 의정부 전선의 경우 7사단 구역은 적의 주공 방향으로 전력이 집중(북한군이 보유한 242대의 전차 중 93대, 포병 화력의 1/3, 최정예 2개 보병사단이 이쪽으로 투입)되었는데 7사단은 앞서 말한 상부의 어이없는 조치로 인해 사실상 개전 당시 2개 연대 체제인데다가 개전 직전 내려진 비상경계령 해제로 인해 다수의 장병이 외박과 외출을 나가 다수의 사고자로 인해 불과 4,500명의 병력밖에 없었고, 당연히 짓밟혔다. 그리고 영천 전투에서는 자신의 부대가 주공을 받을 것 같자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연대씩 차출하여 편입시켜 결과적으로 적의 주공을 막아냈다. 당시 영천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영천이 함락되면 대구든 경주든 곧장 함락 위기에 처하고, 동서전선이 양단될 수 있었으며, 보급로가 차단될 수 있는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었기에 그의 판단은 적절하다고 보인다.
과거에 친일 행적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활동한 업적이 있더라도 어두운 과거까지 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한국 밀리터리 분야 중 한국전쟁 부분에선 채병덕, 신성모와 함께 가장 많이 까이는 인물. 하지만 4.3 사건 연구자들에겐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을 막아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리 전투 보고 욕했다가 4.3 사건 때 보여준 모습으로 다시 봤다는 의견이 많다.[4] 사실 인터넷에서 까이는 것도 실제 잘못보다 부풀려져서 알려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현대판 원균으로 비유되기도... 그러나 능력이 부족했을 지언정 4.3 사건에서 처신을 잘 해 주민 피해를 줄였을 뿐더러 적어도 적전도주는 하지 않았는데 원균에 비유되는건 유재흥 입장에서 억울할지도 모른다.[5]
제민일보도 유재흥 장군을 양심적이라 평가했다. 부연대장 출신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증언에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으나 김정무 군수참모와 유재흥 장군은 솔직한 증언을 했다고 한다. 더욱이 제민일보가 강조한 것은 표현인데, 유재흥 장군은 산으로 피난간 사람들을 '피난민'이라 칭했다. 군 지휘관 출신의 입에선 듣기 힘든 표현이다.[6] 그만큼 4.3 사건의 초토화작전이 미쳐돌아갔다는 뜻이며, 유재흥 장군은 당시 제주도의 군 지휘관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양심을 보였다는 것이다(유재흥의 재능은 정규전보단 비정규전에 있었다고 생각해봐야 할 듯).
현리 전투 중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과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 출처가 불명확하다는 점에 유의.
밴 플리트: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모르면 군생활 끝나냐?"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시오!"
7 기타
2009년 5월 22일 사진. 창군동우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윗줄 : 황헌친(육군준장 예편 전 1군사령부 참모장), 김병휘(육군소장 예편 전 논산훈련소장), 정진완(육군소장 예편), 박춘택 재향군인회 부회장, 노창현 재향군인회장.
아랫줄 : 김계원(육군대장 예편 전 대통령 비서실장)[7], 백선엽(육군대장 예편), 유재흥(육군중장 예편 전 국방부 장관), 강영훈(육군중장 예편 전 국무총리), 김종면(예 육군중장 예편 전 특무부대장)
여담으로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