尾崎 豊 | Ozaki Yutaka
盜んだバイクで走り出す行く先も解らぬまま훔친 오토바이로 달리기 시작한다 아무 갈 곳도 모른 채
- 15の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 참조.
1 개요
80년대 일본 청춘 문화의 상징
일본의 레전드 싱어송라이터
전설적인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한국에서는 포지션이 리메이크한 I Love you 등 발라드 곡의 원곡자로 유명하지만, 자국에서는 록큰롤 전반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으며 명곡도 많은지라 실질적으로도 전설이었다.
고등학교 중퇴라는 반항적인 이미지와 록음악이라는 장르로 주로 젊은 연령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다가,현지 나이로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의문사했다는 것 때문에 한국에서는 김현식 혹은 김광석과 비교된다. 직접적으로는 사노 모토하루의 적자라 할만하며 잭슨 브라운, 브루스 스프링스틴, 빌리 조엘, 하마다 쇼고, 이노우에 요스이, 아나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의 국민적 인기를 누린 드라마 북쪽 고향에서에서는, 주인공 쿠로이타 준이 첫사랑과 함께 좋아했던 가수로 나온다. 각본가는 오자키 유타카의 곡이 나오는 장면을 쓰기 전, 주연배우인 요시오카 히데타카에게 그저 젊은층이 좋아하는 유행가를 조사해오라고 시켰었는데, 요시오카는 바로 오자키 유타카를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한다.
2 생애
학생 시절에는 성적이 우수하여 명문고인 아오야마 학원에 합격함과 동시에 육상자위대소년공과학교에 20대 1의 경쟁률로 합격. 그러나 머리를 짧게 깎아야하는 교칙 때문에 아오야마 학원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흡연으로 정학, 밤 중에 시부야에서 친구들과 술마시다 대학생들과 한판 붙어 경찰이 출동하는 등의 말썽을 일으켜 무기한 정학을 받는 반항아적인 성향이 있었다. 이것이 첫번째 앨범을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후에 결국 출석일수까지 모잘라서 완전 퇴학당했지만.(...) 사실 퇴학이 아니라 본인이 자퇴한 것이다. 오자키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유급당하더라도 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그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그에게 졸업할 때까지 매일 반성일기를 쓰라고 강요했고, 이에 격분해 선생님과 말다툼을 한 뒤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1983년 17세의 나이로 데뷔한 데뷔곡 〈열다섯의 밤(15の夜)〉은 그가 중학교 시절에 가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곡으로 친구가 두발검사에 걸린 것이 동기였다고 한다.[1] 데뷔 이래 사춘기의 10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사 + 락음악이라는 장르 + 곱상한 외모 +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가수로 데뷔한 이력 등으로 오자키의 팬을 자처하는 10대들이 계속 늘어나고 언론으로부터 '10대들의 대변자'라는 명칭을 받게 되면서 오자키 유타카는 학교 폭력이 문제시되었던 80년대와 맞물려서 사회현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특히 1984년에 발표한 2집에 수록된《졸업》이라는 노래가 히트하면서 가사 내용을 그대로 따라해서 학교 창문을 박살내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오자키에게 자랑하는 편지를 보내는 학생들까지 나타나자 이 노래는 일본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참고로 해당 노래의 가사를 찾아서 보면 알겠지만 학교 창문이나 깨고 다니라고 만든 곡이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편협한 생각을 했던 지난날의 자신에 대해 고백하고 10대들이 객기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선생이나 어른들도 자신들[2]처럼 좀 더 행복한 삶을 꿈꾸기 위해 힘든 세상에서 '졸업'하기를 바라면서 세상과 싸워나가는 약자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며, 어른들을 상대로하는 어설픈 싸움을 멈추지 않는 한 진정한 졸업을 할 수 없다는 내용에 가깝기 때문에 오자키 본인도 이 노래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에 대해 매우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I Love You와 졸업의 히트로 확실하게 뜨는데는 성공했지만 '불량한 10대들의 대변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오자키와 그 이미지를 계속 유지시키려는 소속사와의 마찰로 방황을 많이 하여 각성제 및 마약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고,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당시 인기 여배우였던 사이토 유키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재기해서 새 앨범인 5집을 더블 앨범으로 발표하고 전국투어까지 성공적으로 치뤘고 6집의 녹음도 완료했다. 그러나 6집 녹음을 끝마친지 일주일 후인 1992년 4월 25일 만 26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활동 당시에는 반항적인 이미지를 배경으로 한 절대적 인기때문에 중고교에서 터부시되어왔으나 그가 죽고 난 후에 곡들이 재평가되어 〈열다섯의 밤(15の夜)〉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사진과 함께 실리게 되었다. 교과서의 설명에는 '1980년대에 활약하여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작사 작곡에 몰두하여 라이브에서 자신의 곡을 전심전력을 다해서 노래한~' 등의 글이 실려있다. 실제로 라이브 때 오자키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듯이 절규하듯이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중간중간에 독백을 자주 넣곤 했다.
3 갑작스런 죽음과 논란
1992년 4월 25일 아침, 한 민가 앞에서 나체로 쓰러져있는 걸 동네 주민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 온 몸이 멍과 끔찍한 상처 투성이였지만 당시 그를 진찰했던 의사는 과음이라며 부인 시게미를 불러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날 숨이 끊겨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어 사망이 확인되었다. 오자키의 공식적인 사인은 폐수종[3]이지만 오자키가 전에 각성제를 복용했었다고는 하나 당시 그는 마약중독에서 완전히 치유된 후였고 사망 당시 폐수종의 전조 증상도 보이지 않았던데다가 민가 앞에서 발견된 모습이 아무리 봐도 집단으로 구타 당해서 쓰러진 모습이었기에, 각성제 중독으로 인한 병으로 죽었느냐 아니면 사이가 틀어진 연예 기획사의 사주로 야쿠자에게 맞아 죽었나 같은 논란이 아직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오자키 유타카는 죽기 직전 자신이 속해있었던 소속사 마더 앤터프라이즈에서 독립하여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 기존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순수한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로 활동을 재기해서 투어를 성공적으로 돌았고 민가 앞에서 발견되기 일주일 전 새 앨범 녹음까지 마친 상태였다. 또한 당시 오자키는 사이토 유키와의 불륜으로 부인이었던 시게미와 이혼 소송 중이었는데, 시게미가 오자키가 죽은 이후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해서 당시에 꽤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거기다 오자키는 그녀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동의도 하지 않고 연재 중인 소설에 폭로해서 시게미가 오자키를 직접적으로 비난한 상태였고 생전 오자키가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확인되는 사람도 4월 24일 밤 같이 술자리를 가진 전 소속사 대표 후쿠다와 전 부인 시게미였다. 몇몇 팬들은 아직도 '오자키는 후쿠다와 시게미(전 부인 이름)가 죽였다'라고 의심하는 판국.
하지만 그둘이 범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시게미는 비록 오자키와의 이혼 소송이 진행중이었고 오자키가 사망한 당일 1차 술자리에 일행과 같이 있긴 했지만 오자키가 직접 시게미에게 후쿠다 사장과 술 한잔 더 마실테니 먼저 돌아가라고 말한 장면이 음식점의 CCTV와 종업원들의 진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사망 원인을 폐수종으로 계속 주장하며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해서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던 시게미는 2007년 신문 인터뷰에서 '본인은 오자키가 민가 앞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지인들 중 가장 먼저 달려와서 자신이 살고있던 집에(당시 오자키와 시게미는 별거 중이었다.) 오자키를 데려간 사람이었으며 오자키는 자신에게 병원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기다린다며 병원에 절대 연락하지 말것을 당부했기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오자키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나서야 구급차를 불렀고 응급실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고 그대로 세상을 떴다.'는 증언을 했다.
전 소속사 대표인 후쿠다도 비록 유럽으로 음악 연수를 가고 싶어했던 오자키를 미국으로 보낸 다음 일부러 마약 중독에 빠트려서[4] 계속 반항적인 이미지의 오자키로 돈을 벌려 했고 [5] 오자키가 민가에서 발견되기 직전에 그와 마지막으로 같이 있던 유일한 사람이긴 했지만 새벽 2시쯤에 술에 만취한 후쿠다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다음 날 민가에서 나체로 발견될 때 까지 오자키의 행적은 지금도 미스테리에 쌓여있다. 오자키 사후, 연예계 일에서 은퇴한 후쿠다 사장은 오랜기간 침묵을 지키다가 2000년대 후반부터 오카다 유키코와 오자키 유타카에 관련된 일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가끔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4 여담
- '10대 3부작'이라 불리는 정규 1집, 2집, 3집은 세 장이 전부 다 버릴 곡 하나 없는 명반이다. 일본 팬들 사이에서는 오자키의 음악은 10대와 20대로 나뉜다는 말도 흔하게 오고갈 정도. 특히 1집 '17세의 지도'는 베스트 앨범보다 더 좋다는 평을 받는 마스터피스로, 일본 음악사로 놓고 봐고 중요한 앨범 중 하나이다.
- 라이브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실력 기복이 상당히 심하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곡을 불러도 어떤 영상은 무리없이 소화해내는데 어떤 영상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좀 심하게 못 부르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가혹한 라이브 스케줄과 잦은 흡연 및 음주로 3집을 녹음할 무렵에는 이미 성대에 무리가왔고 오자키가 마약에 빠지기 시작한 이후 진행된 거의 모든 라이브는 엉망 그 자체였다고 한다. 라이브에서 노래를 하는 도중에 정신나간 사람마냥 한참을 멍떼리고 있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으니.
- 사망 이후 오자키 유타카의 곡에 대한 판권은 소니뮤직으로 옮겨갔는데 그야말로 우려먹기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
오자키를 두번죽이는 소니뮤직참고로 일본은 한국과 달리 기획사와 음반사가 다르다. 소속사는 가수의 매니지먼트를, 음반사는 앨범의 제작 및 판매를 전담한다. 위키에 쓰여져있던 것과는 달리 오자키와 소니 뮤직과의 사이는 좋았다. 죽기 일주일 전 녹음한 새 앨범도 소니 뮤직 산하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 2003년 TBS의 유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학교에 가자(学校へ行こう)의 코너였던 B-Rap High School[6]에서 그의 이름을 패러디한 오자키 마메(尾崎 豆)(...)라는 남성 참가자가 있었다. 오자키 유타카의 한자 이름에서 豊(유타카)[7]의 윗부분인 曲자를 빼버려 豆(마메)[8]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네이밍 센스로는 연식글로브와 필적할 정도의 수준으로, 오자키 유타카의 이름을 패러디 한 만큼 노래도 그의 명곡들을 골라 자신의 작은키 때문에 겪는 에피소드들을 셀프디스 형식으로 코믹하게 개사하여 표현했고, 음성변조를 한 거 같은 특이한 목소리까지 웃음 포인트가 되는 바람에 연식 글로브의 명맥을 잇는 인기 참가자로서 상당히 인기를 얻으며 리퀘스트 어워드에서 연식글로브를 비롯한 쟁쟁한 참가자들 중에 우승을 차지 할 정도였다.
물론 오자키 유타카 팬들은 고인드립이라고 싫어했을듯(...)
- 오자키가 1989년에 낳은 아들 오자키 히로야는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았는지 음악 활동을 하고있다. 2004년 15세 때 아버지의 유작이자 데뷔작인 〈열다섯의 밤〉을 불렀다.
- ↑ 저 일화와 관련되서 왠지 중2병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일본에서 15세는 일반적으로 학업을 이수했다면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며 4월 이후 출생자라 해도 중3이다.
- ↑ 일반적으로는 졸업을 언급할 나이 대의 청소년
- ↑ 폐포 속에 많은 점액이 축적되어 팽창하는 질환. 주로 마약중독이나 폐가 약할때, 또는 천식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이나 심부전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질병이다.
- ↑ 오자키와 소속사의 갈등이 최대치로 치닫은 시기의 앨범인 4집 <가로수>와 독립 후 발표한 엘범인 5집 <탄생>에 실린 곡들의 가사, 오자키 생전의 발언 등에서 오자키는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후쿠다 사장과 관련된 갱들에게 반강제로 각종 마약을 접하며 마약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 ↑ 오자키는 복귀 후 인터뷰에서 마더 앤터프라이즈 시절 자신의 모습을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단 <노예>라고 표현하고 후쿠다 사장을 속을 알 수 없고 가장 싫은 사람으로 언급하면서 마더 엔터프라이즈를 가열차게 비난했다.
- ↑ 연식글로브가 출연했던 그 코너다.
- ↑ 우리나라에서는 풍년 풍으로 유명한 한자다. 참고로 삼풍백화점에도 들어가는 한자다(...)
- ↑ 우리나라에서는 '콩 두'로 불리는 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