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1 일본의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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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오카다 유키코(岡田有希子)
본명사토 가요(佐藤 佳代)
출생1967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 시[1]
사망1986년 4월 8일(18세)
소속사선뮤직
소속레코드사캐년 레코드(현재 포니캐년)
신체155cm, 45kg, O형, 시력 0.1(양쪽 다)
쓰리 사이즈84cm - 58cm - 84cm
직업가수, 배우, 아이돌, 대변인
학력호리코시 고등학교
데뷔1984년 싱글 퍼스트 데이트
가족2녀중 막내
활동 시기1984년~1986년

1.1 생애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던 라이징 아이돌 스타 중 한 명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 그 꽃을 다 못피우고 말았다.

80년대에 이름을 알렸던 일본아이돌 중 한 명이자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죽어서 비운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2] 2년밖에 활동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든가 등등의 이유로 사후에도 활동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아무튼 팬이 생겼다.

소속사는 선뮤직으로 마츠다 세이코의 직속 후배. 깨끗하고 청순한 모범생 이미지로 활동하며 크게 성공했다. 사망으로 끝난 활동 기간이 총 2년 정도이고, 많은 소녀 아이돌 스타들이 활동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데뷔 초부터 큰 인기를 모은 그녀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그저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업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았던 평범한 소녀였다. 그러나 가수가 되기 위해 일본 테레비의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3]에 출전하기로 하는데, 부모님은 결사반대하던 끝에 겨우 3가지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전부 해내면 출전을 허락하기로 한다.

그 조건이란
1. 교내 테스트로 학년 1등급을 딸 것
2. 중부지역 통일모의고사에서 상위 5명 안에 들 것
3. 나고야 시립 고요고등학교에 합격할 것(유키코의 고향에서 높은 학군의 학교였다. 그러나 한 학기만 다니고 연예 활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해 호리코시 고교로 전학했다.)

호리코시 고등학교 재학 시절 찍은 모습. 가운데가 유키코 본인이며 그녀가 속한 반에는 미나미노 요코, 혼다 미나코, 나가야마 요코, 이시노 요코 등 이미 아이돌로 데뷔한 학우들이 많았다.

세 가지 모두 대단한 조건하지만 특히 두 번째는…… 어떤 의미로 엄친딸(외모-몸매-학업성적 모두)이었다. 부모님으로서는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걸면 딸이 하다가 지쳐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유키코는 독하게도 세 가지 조건을 전부 해내고, 프로그램에 출전하여 당당히 우승, 선 뮤직의 후쿠다 전무의 눈에 띄어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때 '스타탄생'에서 부른 노래가 나카모리 아키나슬로우 모션.

1983년 '스타 탄생'의 데뷔 전 모습.(52초부터) 참고로 이 영상에서 함께 인터뷰하는 여성들은 모두 아이돌 데뷔가 결정된 사람들이지만 유키코를 제외하면 모두 묻혔다.(..)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어서 다이어트의 긴장을 늦출 새가 조금도 없었고, 빠듯한 스케줄의 연속으로 하루에 3~4시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했다. 고된 연예인 생활을 계속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면성실 한 타입인데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기 싫어했고, 완벽주의 성향도 있어서 또래의 아이돌들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붙이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1984년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로 데뷔, 그 해 신인상을 수상했고 노래와 연기 모두 좋은 반응을 얻으며 2년간 활동했다. 데뷔 2년째가 되는 1986년엔 '입술 NETWORK(くちびる NETWORK)'로 첫 오리콘 1위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마츠다 세이코가 작사해준 노래이다. 유키코는 데뷔 당시부터 소속사의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의 뒤를 이을 포스트 세이코'라는 선뮤직의 기대를 받으며 활동했었다.

그런데...

1.2 죽음

-맨처음 나오는 광고의 번호가 444-4444라 무섭다

(자살 바로 직후의 영상으로 천이 덮힌 오카다 유키코의 실루엣이 버젓히 나올 정도이다. 이 당시의 일본은 옐로저널리즘이 극에 다다른 상태였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방송을 위해 안달나 있었기때문에 방송의 리포터인 나시모토 마사루(梨元勝, 2010년 사망)[4]무식무리한 취재가 현재의 일본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고있다.)

1986년 4월 8일, 정오를 넘긴 12시 20분경 갑자기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오카다 유키코가 18세의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녀는 지난달 막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성인이 되었고 직전 발매한 싱글 '입술 NETWORK(くちびる NETWORK)' 또한 커다란 인기를 얻으며 톱아이돌로 향하는 계단을 착실히 밟고있었던 촉망받는 아이돌이었다.

특히나 팬들에게 더욱 컸던 충격은 그녀가 맞이한 죽음이 다름 아닌 자살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낮에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시부야의 요츠야 소속사 건물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는 사실은 팬들은 물론이고 그 당시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자살 당시 건물 1층엔 점심 시간이라 사람이 가득찬 도시락 가게가 있었고 사망 당일 오전에 일으킨 가스중독 자살미수가 보도되어 기자들도 다수 진을 친 상태라 그녀의 자살을 눈 앞에서 목격한 이가 많았다. 이 내용은 그녀가 죽기 전 당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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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망 전날 스케쥴로 찍힌 모습. 사망 당시의 복장은 사진 속 복장 그대로였다고 한다.

1986년 4월 8일 오전 9시. 도쿄 미나토구의 미나미 아오야마 로터리 맨션.
6층의 거주자가 짙은 가스의 냄새를 맡았다.
통보를 받은 관리인은 가스의 누출이 어디인지 한 채씩 찾아 다녔고, 402호실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다.

초인종을 여러번 눌렀지만 반응이 없고 다급해진 관리인은 보조키로 문을 열었다.
이 방의 거주자는 사토 카요(오카다 유키코의 본명). 차주는 선 뮤직.
보통 맨션이었고 출입도 자유롭지만 떠오르는 아이돌 스타였던 그녀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관리인외에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관리인은 체인락 때문에 더 이상 열지 못하고 "사토씨 괜찮습니까?" 여러 번 외쳐 댔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전 10시 9분. 관리인의 연락을 받은 경시청이 아카사카 소방대원을 대동한 채 출동하고 소방대원이 체인락을 절단한 후에야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실내에는 강한 가스냄새가 진동했고, 한 가운데 한명의 소녀가 왼손에서 피를 흘린 채 울고 있었다.
왼손에는 커터 칼로 자른 듯한 5CM의 자상이 두 개나 있었고 주변엔 그녀가 흘린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에 급히 호송된 오카다.
곧 바로 왼손의 상처를 봉합수술로 치료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 의외로 침착한 그녀의 반응에 의사는 곧바로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다.

당시 휴가를 얻고 있던 오카다의 매니저 미조구치는 회사의 전무인 후쿠다와 또 다른 매니저 야마구치에게 알렸고. 두 사람은 11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 오카다와 대면했지만 그녀는 자살이유에 대해선 함구한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치과치료로 부재중인 소속사 사장 때문에 이후 처리과정을 고심하던 후쿠다는 병원에 계속 입원을 한다면 아이돌스타인 그녀의 상품성에 흠집이 날것을 우려. 택시를 잡아 소속사인 선 뮤직 빌딩으로 오카다를 데려온다. 
소속사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오카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그녀의 표정에 무언가를 눈치 챈 후쿠다 전무는 매니저인 야마구치와 사장비서에게 철통같은 감시를 지시하고. 여기서 오카다의 2차 자살시도가 무위로 끝나는 듯 했다.
"스트로베리 쥬스를 먹고 싶어요." 오카다의 부탁에 후쿠다가 사장비서에게 이를 부탁하고 감시인은 3명에서 2인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서 갑자기 전화를 해온 사장. 이미 자살미수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향후 대처를 의논하기 위해 후쿠다는 오카다의 옆을 떠나며 야마자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둘만 남게 된 오카다와 야마자키. 순간 생수를 엎지른 오카다.
"가만있어. 내가 티슈를 찾을 테니" 야마자키가 티슈를 찾는 일순간의 틈에 오카다 유키코가 없어진다.
"유키코가 없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야마자키가 옆방에서 사장과 전화통화를 하던 후쿠다 전무에게 달려가 외쳤고, 다급해진 두 사람은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바로 그때 휴가 중이던 오카다 유키코의 전담 매니저 미조구치가 택시를 타고 선뮤직 사옥에 도착했다. 12시 6분.

택시에서 내려 사옥으로 들어가려던 미조구치의 눈에 갑자기 검은 물체가 쿵하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직감으로 오카다 유키코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다가갔지만 사람으로 생각되는 물체는 이미 머리통이 터져 하얀 뇌수가 사방에 흔재. 식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만이 그 물체가 오카다 유키코였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그녀가 자살한 선뮤직 사옥은 요츠야 4가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오카다가 먹고 싶다던 스트로베리 쥬스를 배달하기 위해 온 웨이트리스는 사체를 보고 기겁. 구토를 해댄다.
"유키코 유키코!" 눈물을 쏟아내는 미조구치.

매니저로서 그녀의 참담한 사체만은 매스컴에 노출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조구치는 회사에 올라가 모포를 가져와서 조각나고 터진 머리와 뇌수를 주어 담으며 사체를 수습한다.(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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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당시의 요츠야 전경.

사고 직후 경찰이 달려와 시신을 수습했고 아이자와 사장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검증만 했을 뿐 시체를 해부하진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고향인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가 올라와 요츠야서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날은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연이어졌으며 유서에 대한 내용이 일부 노출되어 이 날 밤 오후 10시경 미네기시 토오루가 TBS의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심정은?
"솔직히, 엄청난 충격입니다"
-어떤 교제였었나?
"같이 일하며 여러가지로 귀여워했었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여워한 존재였습니다"
-유서에 당신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렇다고해도...같이 일하고 밥을 먹거나 그녀를 배웅한 것뿐이라..."
-사랑의 파국같은 것이 있었나?
"그녀는 의외로 섬세해서 밝은 면과 훅하고 깊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빠같은 존재였지만 그녀에겐 동생이 아니라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첫사랑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안한건가?
"나이도 다르고 그런 교제가 아니었다. 너무 호의를 드러내지 않게 주의하던 정도였습니다. 정말 저에 대한 일로 자살했는지 어떤지는 의문입니다."
-좋아한다고 고백받았습니까?
"구체적으론 아니었지만 추상적으로는..."
-어떻게 했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에겐 로맨틱한 면이 있었으니 발라드 시라도 써주었다면 좋았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책임은 느낍니다. 비난은 받을 생각이니 제 딸이 크면 사랑하는 것을 이해시켜주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발언이 뜬금없다..

시신은 이틀 뒤인 4월 10일 나카노의 호센지(宝仙寺)에서 회사장을 치뤘다. 친구이자 동세대 아이돌인 오기노메 요코, 미나미노 요코와 유키코에게 많은 작사를 해준 타케우치 마리야, 사쿠라다 준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타치 히로시 등 많은 연예계 관계자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죽음에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선배가수 마츠다 세이코,다케우치 마리아,재일 작곡가 강진화,코무로 테츠야, 사카모토 류이치외의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유골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에 돌아가 잠들었다.

1.2.1 죽음의 이유에 관한 많은 설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이유에 관해서는 35년이 지난 현재도 정확한 판명이 나지 않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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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禁じられたマリコ)'의 광고.

단지 표면적으로는 1985년 11월 초부터 86년 1월 말에 걸쳐 TBS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서 함께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6]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는데 그가 불륜을 저지르자 고민한 그녀가 자살을 택했다."는 소문이 죽음의 이유로 퍼져있다. 실제로 위에 적힌 것처럼 미네기시 토오루가 사건 당일 밤 급거 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발매의 주간지에서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사건이었다.」라는 발언이 게재되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오루는 당시 유키코와 20살 이상 나이차가 나는 어린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인터뷰의 내용으로만 보면 유키코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기때문에 그저 단순한 선후배의 호의를 보였던 것이고 유키코가 연심을 품었던 걸지도 모른다.

허나 인터넷의 발달 후, 배우 칸다 마사키가 개입되어 있다는 설이 흐르기 시작했다. 칸다 마사키와 오카다 유키코는 연인 관계였는데 갑자기 칸다 마사키가 마츠다 세이코와 결혼을 발표하자 충격에 빠진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을 결정했다는 설이다. 실제 마츠다 세이코의 스폰서는 이시하라 프로덕션의 사장 이시하라 유지로였는데 어차피 이시하라 유지로가 이시하라 군단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당시 최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세이코와 칸다 마사키를 결혼시켰다는 것. 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칸다 마사키와 실제 연인 관계였던 오카다 유키코가 급작스럽게 자살하는 바람에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이시하라 군단에서의 좋은 위치를 약속해주는 대신에 그녀의 일을 덮어쓰라는 조건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배우 타치 히로시가 여기에 관련 되어 있다는 설도 있는 등, 여러 추측이 무성하지만 현재는 '자신과 연인 관계였던 칸다 마사키가 마츠다 세이코와 결혼한 것으로 인한 상실감 때문'이라는 추측이 지배적. 하지만 칸다 마사키와 마츠다 세이코의 약혼식에 소속사 후배로써 한껏 밝은 얼굴로 축하를 해주는 오카다 유키코의 영상이 지금도 남아있기도 하고, 이곳에 거론된 연예인들에 대한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라 정확한 죽음의 이유가 되진 않는다.

소속사 선뮤직의 사장이자 현재는 고인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밝힌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키코는 데뷔 전 저의 자택에서 합숙을 했었지만 데뷔하고 나서 인기가 오르기 시작해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3일이 지나 유키코가 살고있던 방에 노리삐(사카이 노리코, 같은 선뮤직의 후배 아이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살하기 3일전 저희 집에 유키코가 식사를 하러 왔을 때 일입니다.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여 '앞으로 네가 우리 회사를 책임질테니까 열심히 해야된다'고 말하자 '저같은 건 더이상 안되는걸요. 더 괜찮은 애(=사카이 노리코)가 있잖아요.'라고 어두운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일, 제가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니 사무실 빌딩 아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습니다. 유키코가 투신 자살을 했던 겁니다. 절 기다리던 사이 아침에 있었던 자살 소동에 대해 제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옥상으로 올라고 뛰어내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하나의 일기풍 노트가 발견되어 그것을 읽고나니 자살의 진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상대 남성의 이름(미네기시 토오루)은 물론 그녀가 그 남성을 떠올리고 그것에 기뻐하는 모습들이 적혀있었습니다. 한편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풀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한 괴로움이 극명하게 쓰여져있었습니다."

"유키코는 미네기시씨에게 사랑을 품고 플라토닉을 사랑을 계속 이어오다 자살한 겁니다"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은 미네기시 토오루가 원인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밝혔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은 사무실에 오카다의 사진을 걸어놓고 휴대전화의 배경이나 수첩에도 오카다 유키코의 사진을 갖고 있으며 선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며 오카다 유키코를 아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사장이 이 방송에서 함께 다뤄진 마츠다 세이코와 칸다 마사키 커플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내용의 메세지를 전했기 때문에 오카다 유키코와 그들이 관련이 되어졌다는 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1.3 그녀의 사후

그녀의 사후는 여러모로 안습 그 자체다. 당시 죽은 사람의 시체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잡지에 싣거나 아스팔트에 뇌수와 피가 흥건한 광경을 화면에 그대로 내보내는 등의 미디어의 보도 태도[7]가 매우 지탄을 받았다. 기자 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가는 엽기적인 행인도 있었고 나중엔 가져간 살점을 먹었다는 흉흉한 소문도.

또한 그녀를 따라 30여명 가량의 팬들도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 연달아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은 60여명의 청소년들이 집단 자살을 했으며 1986년 한 해에 783명의 소녀들이 자살을 하는 등 자살률 증가 근 50%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이라고 한다.

오카다의 시체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가 몇 년 후에 죽었다느니, 나카모리 아키나의 심야 라이브 영상에 유령이 찍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MBC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2002년 12월 1일)하였으며 여기서는 '진실'로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위의 이야기들은 거짓이다. 사진기자는 죽지 않았으며 유령의 경우 실제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방청객이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저 소문을 유키코가 들었다간 저승에서 펄펄 뛸 소리다.

그리고 아까도 전술했지만 그녀의 소속사 사장 아이자와 사장은 그녀의 일기장을 갖고 있고, 심지어는 분홍 종이의 그녀의 '유서'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걸 가지고 대중들이랑 계속 보여줄까 말까 밀당을 했으며, 결국엔 단 한번도 그 내용을 공개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는 가족들도 이 내용들을 모른다고 한다. 만약 그 유서의 내용이 아이자와 사장에 대해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거라면 사장이라는 인간은 천하의 개쌍놈이고, 결국 이 인간의 그 밀당때문에 고인에 관한 사실이 아닐, 수많은 루머들이 탄생한거나 마찬가지다. 아이자와 사장은 2013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그녀의 자살 원인은 밝혀질 가능성이 이제 없다고 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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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유키코의 죽음 직후 발매 예정이던 싱글은 발매 중지가 되었으며 방송하고 있던 TBS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도 방송 중지가 된 이후부터 그녀의 존재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방송계에서 터부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들을 자주 다루는 일본의 방송계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얘기가 나오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97년경 방송된 오카다 유키코 특집 방송 이후로는 근래에 그녀의 모습이 방송계에 비춰지는 일이 없었다. 사건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며,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것이 이유인 듯 하다.

결론은, 유키코는 죽어서도 영원히 고통받는, 그야말로 비운의 인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정도면 그녀가 하늘에 제대로 올라갔을지 조차도 의문이다.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그녀의 어머니는 오카다의 일기와 메모, 그림 및 사진 등을 엮어서 '오카다 유키코 - 사랑을 주세요'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도서는 현재 절판되었으나 일본 아마존닷컴 등지에서는 구할 수 있다. 오카다 유키코씨에게 관심이 있다면 한번 사보는 것도 괜찮을 듯. 참고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하나 더 얘기하면 유키코씨의 아버지는 그녀 사후 주식에 투자했다 잘못되어서 그녀의 유품까지 모두 버려야 했고, 화병으로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생전 그녀의 연고지였던 이치노미야 시에는 그녀의 언니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8] 사실이라면 그저 안습이자 흠좀무이며 지못미.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날이 사와지리 에리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해서, 한때 사와지리는 '오카다 유키코의 환생'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오카다 유키코의 매니저이자 데뷔 이전부터 그녀를 지켜봐왔고 죽음의 모습까지 눈 앞에서 목격한 미조구치 노부로는 오카다 유키코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반짝 반짝한 눈을 빛내며 인사하는 유키코를 보며 이 아이는 되겠구나, 하고 저는 직감했습니다. 긴 시간 매니저를 하고있으면 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스타가 될 지 아닐지를. 그녀의 눈은 제가 담당했던 적이 있는 마츠다 세이코의 반짝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다른 아이들의 5배 이상을 노력하며 열심히 해왔습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이코처럼 무리를 하지않고도 그 자질이 빛나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노력에 노력을 더해 빛을 내는 타입이며 세이코가 천재형이라고 하면, 유키코는 노력형이라고 하는 편이 좋았을지 모릅니다. 유키코는 지는 걸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집중력은 놀랄 만큼 굉장했습니다. 드라마 대본을 읽기 시작하면 그것에 몰두해 몇번을 불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아이였기때문에 매니저인 저로써는 전혀 관리할 필요가 없는 편한 아이였습니다."

유키코의 시신을 수습했었던 미조구치 매니저는 유키코의 사후 후배 아이돌인 사카이 노리코의 매니저를 담당하다가 2002년 7월 8일, 유키코가 생전 마지막으로 들렸던 선뮤직 사무실 5층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앓고있던 지병을 괴로워하여 목을 메어 54세의 나이로 자살하였다.

1986년 5월 오카다 유키코의 팬클럽이 해산했고 마지막 팬클럽 전보에는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남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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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사랑받은 오카다 유키코는 먼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여러분에겐 정말 면목이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고싶은 기분으로 가득차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카다 유키코는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 덕에 아주 행복한 탈렌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응원 덕에 마침내 여기까지 와 준 오카다 유키코는 이제부터 여러분과 함께 걸음을 같이 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후 오카다 유키코의 시간은 멈춰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주신 정말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응원은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분의 응원이 오카다 유키코를 향한 더할나위 없는 공양이 될 것이라 믿고있습니다.
앞으로도 오카다 유키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영원해 살아 갈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2년간의 응원,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치프 매니저 미조구치 노부로.

미조구치 매니저의 바램대로 그녀가 사망한 시부야 요츠야 교차로 앞에는 매년 4월 8일마다 팬들이 꽃과 그녀의 사진, 앨범등을 가지고 나와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또한 나고야에 잠든 그녀의 묘에는 35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마를 날이 없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1.4 음악

1.4.1 발매된 싱글 목록

No앨범명발매일최고 순위비고
1퍼스트 데이트1984년 4월 21일20위데뷔곡/글리코 카페테리 cm송
2리틀 프린세스1984년 7월 18일14위
3-Dreaming Girl-사랑,처음 뵙겠습니다1984년 9월 21일7위글리코 세실 초콜릿 cm송
4둘만의 세레모니1985년 1월 16일4위도시바・렛츠채팅cm송
5Summer Beach1985년 4월 17일5위글리코 카페테리 cm송
6슬픈 예감1985년 7월 17일7위
7Love Fair1985년 10월 5일5위글리코 세실 초콜릿 cm송
8입술 Network1986년 1월 29일1위가네보 화장품 86봄의 이미지송
9Believe In You(2003 String version)2002년 12월 4일63위기존의 원곡을 리믹스하여 재발매
 꽃의 이미지1986년 5월 14일
1999년 3월 17일

마지막 싱글인 '꽃의 이미지(花のイマージュ)'는 사망 직전 녹음한 싱글이며 발매일인 5월 14일 컴백할 예정이었지만 그녀의 자살로 발매가 물거품이 되어버린 비운의 곡이다. 그래서 팬들에겐 '환상의 곡'으로 불려져있었다. 이 곡은 1999년 3월 17일 발매된 오카다 유키코의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13년만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1.4.2 오리지널 앨범 목록

No앨범명발매일최고 순위비고
1신데렐라1984년 9월 5일7위CD는 12월 21일 발매
2FAIRY1985년 3월 21일2위
3시월의 인어1985년 9월 18일4위
4비너스 탄생1986년 3월 21일4위

1.4.3 베스트 앨범

오카다 유키코/베스트 앨범 항목 참조.

1.5 생전의 영상


그녀의 대표곡인 입술 Network. 가사는 항목을 참조. 참고로 2분 33초 이후에는 몰래카메라(...)가 있다.



글리코 세실 초코렛 광고

1.6 관련 링크(팬 사이트)

혐오스러운 사진(자살 직후라든가...) 관련한 사이트는 올리지 말 것.[9]

2 일본의 배우

참고로 한자는 岡田由子로 조금 다르다. 1에 의해 거의 존재가 묻혀버렸다.(...) 얼마나 심하게 묻혀버렸냐면 이 사람의 한자 이름으로 구글링을 해보면 "이것을 찾으셨나요?"에 1의 이름이 뜨거나 1의 이름으로 수정된 검색결과가 나오기까지 한다. 거기에 2의 이름으로 검색했는데도 1의 사진이 더 많이 나오는 건 기본. 거기에다 생년까지 1967년으로 같다. 다만 이 사람은 당연히 본명이고 현재까지도 살아있다는 것 정도...
프로필 사진 제외하고는 사진은 별로 없지만 존재는 한다.
kanjyuku-ph02.jpg
참고로 가운데다.

나이에 걸맞게 배우 생활을 꽤 오랫동안 해왔지만 일본 내에서 주목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찌보면 이 분도 비운의 여인...
  1. 성장은 같은 아이치현 나고야 시에서 했다고 한다.
  2. 그러나 동시기에 더 안습한 아이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엔도 야스코. 그녀는 스케반 데카 출연으로 인지도를 쌓으며 음반 데뷔를 앞두고 있었으나 소속사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질 것을 강요. 계속되는 마찰로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0일 뒤 대형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로 그녀의 죽음은 완벽히 묻히게 된다.
  3. 모리 마사코를 시작으로, 야마구치 모모에나카모리 아키나도 이 프로그램 출신이다. 유키코가 이 프로그램 최후의 우승자(스타 탄생 후반기의 합격자일 뿐 마지막 합격자는 아니다.)였고, 이후 스타 탄생은 종영된다.
  4. 참고로 은혼에서 이 자의 모습이 패러디된 적이 있다. 긴토키를 무리하게 취재하려하자 긴토키가 '얼굴의 사마귀를 뜯어버린다, 나시모토!'라고 말했다.(...)
  5. 그러나 10년 후 한국의 서지원도 같은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것과는 달리 활동에 대한 압박감과 소속사의 횡포가 원인이었다.
  6. 당시 42세로 유부남이었다. 2008년 폐암으로 사망.
  7. 전술했지만 특종에 매달려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기자의 자질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추태를 보여줬다. 시신의 수습이나 병원으로의 연락도 주변의 기자나 행인이 아니라 매니저가 했을 지경.
  8. 오카다 생전에 작업을 같이했던 작곡가 강진화나 다케우치 마리아같은 경우는 이것이 거짓일 것이라고 얘기하였으나,몇년 전에 다시 이야기 한 바에 따르면 기억이 오래되서 사실여부를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었다.
  9.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서는 이 문서에서 자살 직후 사진을 올리고 지우고 수정전쟁이 난 적이 있었다. 착한 위키러들은 제발 올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