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근 테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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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를 당한 후 병원에 입원 중인 오홍근 기자의 모습.

1988년 8월 6일 일어난 기자에 대한 테러사건.

오홍근은 당시 중앙일보의 자매지였던 중앙경제신문의 사회부장을 맡고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고 노태우가 직선제 선거에서 당선된 가운데 5공 청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높아져 가던 상황에서 오홍근은 중앙일보의 월간지인 월간중앙 4월호부터 "오홍근이 본 세상" 이라는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오홍근은 군사정권하에서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를 비판했는데 이것이 군부쪽 사람들을 화가 나게 만들었고 이미 4월 말부터 오홍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8월호에서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 라는 칼럼을 게재하자 신문사로 항의 편지가 오는가 하면 오홍근의 집에까지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8월 6일, 트레이닝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이 오홍근을 공격했고 자칫 오홍근은 죽을 위기였으나 마침 출근하던 아파트 경비원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경찰은 경비원의 증언으로 포니 차량이 용의자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차량 번호를 조회한 결과 포니 차량이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이라는 걸 밝혀냈다. 이로 인해 오홍근을 테러한 사람들이 군인들일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정보사는 '우리가 그런 차 가지고 있는 건 맞는데 운행한 적은 없어' 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럼 너네 차 탈취당했거나 아니면 귀신이 타고 다녔다는 소리겠네

수사가 답보에 빠진 가운데 8월 23일, 익명의 제보자가 중앙일보에 "정보사 소속 부대원 4명의 사건 당일 행적이 불분명하다" 라며 4명의 신원을 제보했다. 이 제보내용이 알려지면서 결국 제보자가 제보한 부대원 4명이 오홍근을 테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들이 오홍근의 칼럼에 불만을 품고 그를 혼내주겠다는 생각으로 저지른 테러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체포된 4명 외에도 현장에 4명이 더 있었다는 점, 장성급 현역들이 개입되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평화민주당이 앞장서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여론까지 악화되자 결국 국방부는 정보사 예하부대장인 모 준장이 자신의 부하인 모 소령에게 지시했고 이 소령은 자신의 부하 네 명을 행동대원으로 삼아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밝히게 된다. 그리고 당시 국군정보사령부 사령관 육군소장 이진백 장군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도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로 인해 예편 조치되었다. 지 형과 나란히 똥별형제 인증.

군인이 민간인을 테러한 초유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군법재판은 준장과 소령에게 집행유예, 행동대원 중 계급이 가장 높은 대위에게는 선고유예라는 터무니 없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죄질로 봐서는 엄중 처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범행 동기가 개인에 사리사욕이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군을 아끼는 충정에서 비롯됐고 피해자의 피해 정도가 가볍기 때문에 이를 참작해 집행유예와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다" 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사실 김창룡암살한 허태영도 그런 말을 했지만 사형되었다. 물론 허태영은 암살, 그러니까 살인을 했지만... 그럼 두 명이 칼부림한 건 살인행위가 아니라 퍼포먼스란 말인가

터무니 없는 판결에 여론이 반발했지만 이후 고등군법회의는 아예 준장과 소령에게도 선고유예 판결을 내려버렸다. 더 기가 막힌 건 이렇게 판결 받은 인물들의 상당수가 다시 정보사로 복귀했다는 사실.

오늘날에도 사건의 전모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육군 정보사령부가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의혹이 있지만 추측으로만 남는 상황. 언론의 자유를 테러로 억누르려 한 초유의 사건으로 오늘날에도 언론계에서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