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정보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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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북파공작부대
국 군
정보사
육 군
HID
해 군
UDU
공 군
AISU
미 군
KLO
CIA
영도유격대
정보사
200px
國軍情報司令部
Defence Intelligence Command (DIC)

1 개요

대한민국 국군의 첩보 부대. 대한민국 국방부 직할부대인 국방정보본부 산하에 설치되어 있으며 그곳의 관리, 통제, 지휘를 받는다. 사령관은 소장[1] 이다.

2 업무

흔히들 정보사라고 하면 북파공작을 하는 부대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정보사에는 아래 777부대[2]가 담당하는 신호정보(통신정보)를 제외한 모든 출처의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부대들이 있다. 북파공작을 비롯 공작을 담당하는 부서와 부대는 정보사 예하부대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모든 정보사 부대원들이 무슨 특수부대원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자.

공식 입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파공작부대가 없다고 한다. 폐쇄적이고 비밀스럽다 보니 알려진 것이 적다.

중앙일보(2011)에 따르면 장교는 북한 땅에 들어갈 방법이 없으며 규정상 들어가는 것도 금지이다. 대신 정보사에서는 '북한인, 조선족, 중국인, 탈북자' 등을 협력자로 고용한다. 예를 들어 1997년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대포동 미사일기지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일반인의 상상대로라면 정보사 특수임무수행팀이 북한 군복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들어가 사진을 찍어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보사에서 보낸 간첩은 중국 선양이나 베이징 같은 곳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탈북한 북한군 출신을 고용해 카메라와 돈을 줘서 보낸다. 이들은 국경부터 미사일기지까지 길을 정확히 아는데다, 잡혀도 간첩의 얼굴 말고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찍어온 사진은 미국의 첩보위성으로도 정확히 판별되지 않는 자세한 설비를 판별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영변 핵시설이나 핵실험장에서 물, 흙 등의 시료를 채취해오는 것도 정보사 특수임무수행팀이 아닌 탈북자로 보아야 한다.

보안을 위해 현장에서는 보고문건을 작성할 수도 없다. '태풍이 왔다 / 배가 잘 들어왔고 물건을 잘 받았다' 같은 암호로 간단하게 보고하고, 정식 보고는 국내에 들어온 뒤에 하게 한다.

대북 공작요원으로 필드에서 뛰는 최고 직급은 중령이다. 보통 현장 팀장을 맡으며 '전무'라는 가짜 직급을 쓴다. 대령 이상은 현장에 나가지 않고 본부에서 지휘/감독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보사 공작부서 간부라 해도 대북 특수임무수행팀에서 훈련받는다. 이들은 중위 정도의 초급장교 시절에 대부분 선발되며, 6개월~1년간 집중교육을 받는다. 이후 대북 특수임무수행팀 팀장을 맡아 스쿠버다이빙, 공중강하, 육상침투 등의 특수훈련을 받는다. 중위 시절까지 소대장 정도의 경험밖에 없기 때문에 북한에 포로로 잡히더라도 군사기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이런 침투에는 어려움이 많다. 중앙일보(2011)에 보도된 'CKW 사건'에 따르면, 1998년 40대 초반의 정보사 중령이 북한에 7개월간 납치된 뒤 고문당하고 이중간첩으로 전향한 일이 있었다. 그는 단둥의 한국고려인삼공사 지사장으로 위장해 대북 공작망의 현지 책임자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위치가 노출되어 숙소에 외부인이 침입하고 피를 흘릴 정도의 격투를 벌여 납치 당한 것이다. 방첩기관에서 전향을 밝혀냈고 전역시키기는 했지만, 정보활동은 이런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납치가 흔한 일은 아니다. 중앙일보(2011)은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정 중령 외에 피랍된 장교는 없다고 보도했다. 조선족, 탈북자 중에는 일부가 잡혀서 납북되었다고 한다.

또, 북한에 한국인을 침투시킬 경우 체격 차이도 크고 북한 내에는 외국인도 드물어서 들키기 쉽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에는 한국에서는 더 이상 정보사 특수임무수행팀을 북한 내에 직접 보내지 않는다. 괜히 체포되어 기밀이라도 유출하다간 큰일나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 이외의 외국에는 정보사 팀을 보낸다. 시사인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 당시 자이툰 부대가 파견되기 전 정보사 팀이 선발대로 들어갔다. 특히 북한과 전쟁이 난다면 아마 자신들 나름대로의 계획에 의해 북한 땅에서 작전을 벌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집한 각종 정보 중 일부는 SI로 분류되어 가공된 후 일선 군부대에 정보공유의 일환으로 제공된다.

예하에 수송부대가 존재한다. 운전병 지원하면 로또확률로 서울의 빌딩숲을 보며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 물론, 로또.[3]

그 외에 언론으로 알려진 소소한 임무로는, 지상군 페스티벌과 같은 안보 관련 행사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남파공작원 및 간첩 등으로부터 노획한 침투장비 전시도 담당하고 있다. 언론보도1 언론보도2 일단은 정보사에서 일하시는 분들 정도로만 이해해두자.[4]

3 역사

국군정보사령부 변천사
1940년 ~ 1950년1950년 ~ 1960년1960년 ~ 1970년
군정청 국방 총사령부 정보과(1946년 1월)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1948년 8월)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대(1948년 11월)
육군 정보국 정보대(1과)육군 정보대
Military Intelligence Group
육군 정보국 공작과(2과)(1950년 7월)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첩보분견대본부 독립(1951년 3월)
육군 첩보대(1961년 7월)
Army Intelligence Unit
해군 작전국 정보과(1948년 9월)해군 정보부대 (1954년)
Navy Intelligence Unit
공군 20특무전대
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
1970년 ~ 1990년1990년 ~ 현재
육군 정보사령부(1972년 2월)
Army Intelligence Command
  국군 정보사령부
  (해군 첩보부대, 공군 20특무전대 통합)
  Defence Intelligence Command
해군 첩보부대(1971년 5월)
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 20특무전대
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
위국헌신 군인본분

육군의 정보 부대는 처음 1946년 1월에 군정청 국방 총사령부 정보과로 발족하여, 1946년 8월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을 거치고, 같은 해 11월 말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이것이 입수 정보를 분석 판단하는 정보대인 1과로 불렸고, 후에 육군 정보대(MIG)가 된다. 1950년 7월에 육군본부 정보국 내에 공작과가 만들어져 주로 첩보를 담당하는 2과(영문약자가 HID였다.)로 불리다가, 1951년 3월 독립된 첩보부대가 되었다. 첩보분견대본부(HID)는 1961년 육군 첩보대(AIU)로 개칭하고, 1972년 정보대(MIG)와 첩보대(HID)를 통합해 육군정보사령부(AIC)가 되었다.

해군의 정보 부대는 1948년 9월 해군 작전국 내 정보과로 발족하였으며, 1955년부터 자체적으로 UDU요원을 선발했다. 1970년 이전까지 NIU내 해상정찰대의 UDT요원 들을 해군첩보 수중파괴단(UDU)라 불렀고, UDT부대에서 북파공작원을 직접 양성후 해군 정보부대(NIU)에 전속 하였다. 1971년 5월 5일 해군첩보부대령에 의해 UDT교관단으로 구성된 해군 첩보부대 교육대가 설치 되면서 공식적으로 UDU라고 칭하였다. UDU 기수는 UDT기수를 그대로 이어받아 UDU 1기가 아닌 UDU 17기로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군은 1954년 9월 美 극동공군이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서 美 6006부대가 사라지게 되자, 20특무전대가 6006부대의 임무를 떠맡았다. 일명 실미도 부대라 불리는 684부대가 바로 20특무전대 소속이다. 그 후 1990년 육·해·공군 정보부대를 통합해, 기존에 있던 육군의 HID, 해군의 UDU, 공군의 AISU국군정보사령부가 되었다. 방첩부대였던 제3과는 현재 국군기무사령부가 되었다.

4 부대 위치와 이전

사진 출처 : 한국경제(2013)

정보 관련 부대의 위치라서 기밀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도권 언론의 신문기사로 공공연히 나오는 상황이라 기밀이 아니다.[5] 게다가 현재는 정보사가 경기도로 이전하였기에 옛 부지 위치 자체는 이제 기밀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정보사 외에도 국가정보원 역시 본청의 위치는 공개되어 있다. 물론 출입 통제는 한다. 실제로 정보사령부 예하부대가 위치한 곳을 가보면 서울 남산타워, 부산 서면 등 기가 막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머지 대도시에 있는 건물들도 다 하나같이 돋는 위치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신병위로휴가를 갔다온 정보사령부 병사들이 길을 몰라 택시를 타고난뒤 대법원근처라고 하고 우물쭈물하면 택시기사가 '정보사령부요?'하면서 태워준 일도 허다하다고한다.

이게 잘 알려진 이유는 부대가 위치한 곳이 도시 한가운데라 지역발전에 장애가 되고, 한강 이남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로 하나를 떡하니 막아 도로가 끊겨 있고, 여기에 가로막힌 서초구 주민들이 강남구로 가려면 길을 빙 돌아가야 하는 때문에 부대 이전이 만년 떡밥이라 그렇다. 경기도 안양 수방사 제1113공병단 인근이전한다는 데가 겨우 안양이냐?으로 사령부를 이전하는 것이 확정되자, 2014년에 서울시의회에서 정보사 부지에 터널을 뚫는 공사를 승인했고, 2019년 2월 개통 예정이다.

처음 정보사가 위치할 때는 허허벌판이었지만 1970년대에 개발이 진행되면서 시가지 한가운데가 되어 버렸다(공공기관이나 시설 같은 곳 중 이런 곳 허다하다). 거기다 1992년 이 부지에 대한 초대형 사기사건이 터졌고, 정치권이 개입되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상당히 큰 정치스캔들로 퍼졌다. 결국 배후는 없는 걸로 마무리됐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 국민에게 정보사 위치가 알려졌다… 이미 기밀이 아니잖아 이전 안 하냐

4.1 안양이전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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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장을 목적으로 서울내에서 은밀하게 부대를 건설했는데, 막상 20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니 방배동과 서초동을 잇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막아버린 셈.

현재는 출입금지로 막아두고 정보사부지 바로 뒤편 내방역 1,8번출구로 나오는 '방배e편한세상'[6] 사이에 장재터널을 뜷을 계획이다.

걸어서 몇분만 가면 서초역이 나오는 기가 막힌 위치로 인해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서울 시민에게는 선망의 부대였다. 외박을 갈 때 강남구, 삼성동, 잠실(롯데월드)로도 나가기 좋기 때문. 다만, 다른 부대와 달리 부대생활 하면서 서초동 시가지가 그대로 보이면서도 휴가때 빼고는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우울감에 시달리기 딱 좋았다. 그리고 다른 부대와 달리 면회 금지였다.

창설당시 평당 800원이었던 부지가 이젠 3000만 원으로 점프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대 이전이 만년 떡밥이었기 때문에 (특히 내무)시설 개선 투자가 미흡했다. 윗선에서도 "어차피 옮길건데 뭐" 라고 생각했던듯하다. 다만 이전되는 안양에는 (내무시설을 포함하여) 확실히 좋은 시설로 짓겠다고 약속했었다고 한다.

4.2 안양이전 後

만안구 박달동으로 이전했다.

대략적인 위치는 안양시 내의 수방사 직할 제1113공병단 근처에 있다. 수방사 전역 위키러들은 안양 유격장 맞은편이라고 하면 알 듯.

개발이슈 등으로 부대의 상세한 위치가 공개되어버린 서초동 시절과 달리 지금은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에 있다는 정도 까지만 언론에 공개된다.

5 지원 및 선발

특수정보부사관 문서 참조

사병은 각 출신 군대와 병과마다 다르다. 거기다가 예하부대가 주력이 해군인지 공군인지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전투와 관련된 병과는 뽑지않는다. (ex: 육군 소총수, 공군 방공포)

특이점은 육군만 선발되는데에 제한이 많다는것. 아마 병과가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기군단에서 얼마만큼 잘하냐에따라 자대가 결정되는 해, 공군에 반해 육군은 자대배치가 100% 랜덤이라는 점과 동시에 육군훈련소를 수료한 병사들만 정보사령부에 갈 수 있다. 한 연대에서 정보사령부로 가는 육군은 많아야 3명정도, 한달마다 입대하는 해, 공군에 반해 1주마다 들어오는 육군이 약 500 ~ 2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진짜 적은 수다.

해군같은 경우에는 특이하게 6개월간 배를 타야하는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 단 기본적으로 육상근무라 다른곳으로 2차전입을 신청할 수 없는게 단점. 물론 육상근무라 2차전입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공군도 들어오긴 하지만 대체적인 필요병과(행정, 수송, 통신, 전산)은 육, 해군이 대부분이라 헌병이 많이 가게 된다. 일단 세 군 중 가장 긴 시간동안 부대내부의 치안을 유지하기에 딱 좋은 수단이기때문(......) 일말인데 300일이 깨진 육군과, 상병 2호봉인데도 300일이 안깨진 공군이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해병대도 있기는 하나 그 수가 매우 적다. 전체인원의 1%가 안 될 정도.

6 흑역사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고 노태우가 직선제 선거에서 당선된 가운데, 5공 청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높아져 가던 상황이었다. 1988년 오홍근은 중앙일보의 월간지인 월간중앙 4월호부터 "오홍근이 본 세상" 이라는 칼럼을 게재하면서 군사정권하에서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를 비판하자, 신문사로 항의 편지가 오거나 오홍근의 집에까지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8월 6일, 트레이닝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정보사 요원)이 오홍근을 공격했고 자칫 오홍근은 죽을 위기였으나 마침 출근하던 아파트 경비원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정보사 요원을 막은 경비는 대체...

7 출신 인물

 성 명 비 고
김종대 로드 FC 소속 종합격투기 선수, HID 출신
김태현 SBS 공채 7기 코미디언, 정보사 화물 차량 운전병 출신
남보원 개그맨 북파공작원 출신
기 타 영화 아저씨의 주인공인 차태식이 국군정보사령부 해군(UDU) 소속이다.

8 관련 문서

  1. 재미있게도 정보사와 777사령부는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당시 정보사, 777사령부, 기무사의 사령관이 중장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 모두 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다. 하지만 편제는 그대로 두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 기무사는 1년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2. 이집트의 특수부대인 제777부대와는 전혀 다른 부대다.
  3. 육군 기준으로 기술하면, 육군훈련소에 한달에 뽑히는 육군훈련병이 500 ~ 3000명이라고 가정하고 이중 모집운전병이면 기본적으로 경쟁률을 뜷고올라왔겠지만 징집운전병이라면 근 250~1500의 경쟁률을 뚫어야하고 이 중에서 또 정보사령부로 발령되는 운전병은 4~12명이다. 최대수치가 정해져있는건 정보사령부가 수용할수있는 전입육군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
  4. 정보사에서는 영화 아저씨의 흥행이후로 모집방법을 비공개로 전환할 정도로 기밀에 신경쓰는 부대다. 때문에 더 상세하게 여쭤본다면 저 쪽에서 먼저 유관기관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5. 기밀이라면 기자가 구속당하고 출판된 신문은 회수당했을 것이며 인터넷 상의 기사는 삭제당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은 기밀 노출을 철저히 막는다. 즉, 기밀이 아닌 것을 기밀로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설사 기밀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은 군사독재 국가가 아니라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기자와 언론사에게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있고 행정적으로 정보유출을 막는 요청을 할 수는 있지만, 간단하게 기자를 구속하고 신문을 강제로 회수하며 전방위적인 검열삭제를 할 권한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6. 1차-2차. 사실 방배동에만 이편한세상이 5개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