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龍
1920년 ~ 1956년
1 소개
관동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정보 군인. 일본 관헌 소속으로 항일운동가들을 탄압하다가 광복 이후 출세해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악명높은 친일파 경찰 노덕술의 군인 버전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2 일생
2.1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으로 제기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과 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했다. 1941년 소련 국경 부근에서 첩보 부대원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이후 평생 동안 정보 공작, 고문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되었다.[1]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활동 중이던 중국공산당의 왕근례를 체포하여 비밀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창룡은 공로를 인정 받아 오장(伍長, 일본군의 하사계급)으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항일 비밀 조직을 적발, 소탕하였다.
2.2 미군정
8.15 광복 후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가, 친일 전력으로 인해 보안대와 소련군에 의해 두 번이나 죽을 뻔 하고 1946년 5월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도시전설에 의하면 이때 하도 얻어터져서 폐인이 된 모습으로 넘어와 미군 경비병들이 놀랐다고 한다.
2.3 대한민국
김창룡은 사병으로 입대하였으나 1948년 14연대 반란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숙군작업에서 그의 일본군 헌병 경험이라 쓰고 고문이라 읽는다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 진행한 숙군은 많은 무리가 따랐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용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군대 좌익 조직의 비밀 명단이 입수된 뒤에 암호를 풀어 해당자를 잡아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동명이인으로 엉뚱한 사람이 걸려 들어오는 예도 있었다. 또 한 명을 잡으면 "아는 놈 이름을 대라"고 때려가며 조사를 했는데 급한 김에 마구 불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한편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김창룡은 당시 창설 준비중인 공군요원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간부 거의 전원이나 다름없었다. 박원석 중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 역임)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金貞烈) 대령이 나서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정렬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독선적인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조선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이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백선엽)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민간인 학살에서도 김창룡은 항상 거론된다. 그는 CIC 특무대장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일으킨 원흉으로 수십만명의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작전권이 미국에게 예속된 육군 야전부대와는 달리 CIC는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고 활동하였으며 대부분 양민학살 사건에 관여하였다. 따라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비롯한 각종 양민학살 사건에 김창룡이 개입했다는건 너무도 당연하다.
무엇보다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될 때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장[2]을 맡고 있었는데, 체포된 안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보아준 사실이 있다. 심지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역시 김구 암살과 관련이 있던 채병덕, 장은산의 입을 막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만 김구 암살의 배후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밣혀지지 않았다. 김창룡 이외에도 채병덕, 장은산, 신성모 등 여러 인물들이 거론되며, 이들중 하나 혹은 다수가 모의했을 것이란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의 커다란 신임하에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이 되었고, 1953년에 준장, 1955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일본군 헌병 하사관에 불과했던 사람이 불과 10년만에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권력의 핵심에 서는 벼락출세를 한 것이다. 종전 뒤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제1공화국의 각종 공안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용공 사건, 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불순 분자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발췌개헌)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 (이전 버전에 쓴 김수임 체포사건은 김창룡과 무관하다. 그것은 오제도 검사의 특별수사본부에서 벌인 일)
단, 금정산 공비 사건은 빨치산 남도부(하준수)의 조병창 방화사건과 연계해서 진짜 빨치산의 소행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정확하게는 부산 조병창 방화와 동래에 놀러간 미군 고위 장교가 피살된 사건은 진짜로 있었으니까. 금정산 사건을 100% 조작이라고 하는 사람은 당시 이승만의 체포에서 벗어나 일본 밀항을 한 선우 종원 검사, 실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범석이다.
그 외에도 제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는데, 1953년 국제간첩 사건도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신익희와 야당을 친북용공세력으로 몰고 갔던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 1955년 6.25 전쟁 때 납북된 조소앙이 한국독립당 간부들에게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암살시도는 실재했다. 4.19 혁명 이후 나재하,민영수등은 이정권(이승만 정권)의 악정을 개선하고자,그런것일뿐 사리사욕으로 이승만을 죽이려 했던게 아니니 특사를 신청했다고... 그리고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죽었을때,나재하는 옛날의 내죄가 부끄럽다고 말했다.(초상이 났을때는 고인에 대해 긍정적인 말밖에 할수없다)
그러나 조소앙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전쟁 기간중에 납북된 조소앙은 북에선 아무런 권력이 없이 그저 대외홍보용 명예직 감투만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그나마도 말년에는 북한 정권과 마찰을 빚어서 단식투쟁 와중에 병사하고 만다. 암살 시도가 사실이였다고 해도 북의 조소앙이 지시했다는건,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런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 권력을 이용한 축재에도 능했는데, 방첩대를 이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걸로도 부족해 직접 밀주를 만들어 팔았으며 그 와중에 헌병들에게 검거된 방첩대원들을 빼내려 하다가 군부와 마찰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일을 자행하자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육군대령 허태영의 하수인 송용고 ·신초식 등에 의하여 1956년 암살당하였다. 그 후 허태영의 부인 황운하의 탄원으로 사건의 최고 배후자는 육군중장 강문봉이었음이 밝혀졌다. 사건 직후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다. 비밀호의 녹음
재판정에서 허태영,강문봉등 피고인들은 2차 대전 당시의 군벌등의 예를 들어 김창룡이야 말로 국군의 단결을 저해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놀랍게도김창룡과 허태영은 의외로 살아온 길이 비슷했다고 한다.
3 평가
여순반란에서 알 수 있듯이 숙군은 꼭 필요한 일이었으며 당시 정황상 어느정도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끝낼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다들 인정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 김창룡 개인의 권력욕이 개입해 억울한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했다는 점이다. 이점때문에 국군 원로들은 김창룡을 매우 싫어한다.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한데다 숙군 과정에서는 지나친 무리수로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어낸 탓에 평가가 아주 좋지 않다.
심지어 훗날 김창룡 아들이 육사에 지원했는데 생긴게 아버지를 쏙 빼닮아 숙군을 경험한 당시 육사 면접관들이 혼비백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연히 면접 탈락.
하지만 이승만 빠들은 이 사람도 찬양한다. 그의 무덤에 매해 꽃도 바치고 이승만 사랑모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김창룡을 욕하는 건 종북행위라고 병크발언도 한 바 있었다.
2011년에는 뉴라이트 성향의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기파랑' 출판사에서 그의 전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불쏘시개 추가
축구계 원로들중에도 이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들이 많다.[3] 네이트 김현회 칼럼에 축구대회에서 횡포를 부린 일화들이 소개된 바 있다. 참고#
죽고 나서 안양 관악산에 묻혔다가 1998년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이에 대해 찬반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그런데, 대전현충원 이장을 반대하는 일부 세력들은 김창룡을 '반공투사'라고 극찬하고 칭송하고 다니고 있다.
어디 모 싸이트 #에서는 위의 업적을 뭔가 화려하게 포장해서 선전하고 있다.
4 미디어에서
야인시대에서도 등장한다. 특히나 권총으로 김두한을 협박을 하다 김두한한테 굴욕을 당했다...
드라마 서울 1945에 등장하는 박창주는 이 인물에서 일부 설정을 따와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이인화의 불쏘시개 인간의 길에서는 악마사촌 고문 기술자로 나온다.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백범 역 전문 배우 이영후가 김창룡으로 나왔다. 박정희를 전화기로 전기고문하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된다. 이후 박정희가 중요한 순간마다 그 광경을 떠올리는 장면이 묘사된다.
선우휘의 추적의 피날레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악역 장군이 김창룡을 모델로 하고 있다. 대북 첩보를 자신의 권력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물인데. 이 인물도 출근하다가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