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width=100%이름백제역사유적지구영어Baekje Historic Areas
국가 위치대한민국 전라북도
등재유형문화유산등재연도2015년
등재기준(ii)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고대 왕국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교류를 통해 이룩된 백제의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iii)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볼 수 있는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 건축학적 특징과 석탑 등은 백제 왕국의 고유한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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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익산 미륵사지에서 가까운 왕궁리에 있는 궁궐/사찰터. 백제시대의 궁궐로 사용되었으나, 후대에 사찰로 변했다가 폐허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발굴이 한참 진행되는 도중이라 여러 가지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곳이지만, 근처의 미륵사와 제석사지, 익산토성 등으로 봐서 무왕의 왕궁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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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국보 제289호[1] 인 왕궁리 5층 석탑만이 남아있는 상태며, 근처에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있다.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국보 123호이다.

2 무왕의 수도?

일단 정황상 백제 무왕의 수도로 추정된다. 다만, 서동 설화로 인해 서동과 무왕의 관계가 시끌벅적 하고, 일본의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로 천도하고 새로이 제석정사(帝釋精舍)라는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무광왕이 무왕인지, 지모밀지가 왕궁리인지, 제석정사는 미륵사가 맞는지 등에 대해 확실한 답이 없는 상태. 더 자세한 것은 서동 설화 항목 참고. 한편 반대로 나당 전쟁 당시 무왕 추종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모아다가 이곳에 세웠던 괴뢰 국가 보덕국의 왕궁이라는 학설도 있다.

이하 내용은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百濟武廣王 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백제 무광왕께서 지모밀지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셨다.
以貞觀十三年歲次 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 帝釋精舍 佛堂 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燒盡
정관 13년(639년) 기해 겨울 11월, 하늘에서 크게 천둥과 함께 비가 내려 드디어 재해가 있었는데, 제석정사와 불당 칠급부도와 회랑과 승방이 일거에 모두 불타버렸다.
塔下礎石中 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 睬水精甁 又以銅作紙 寫金剛波若經 貯以木漆函
탑 아래의 초석 안에는 여러 칠보가 있고 또한 불사리와 채색한 수정병, 또 동으로 만든 판에 사경한 금강파야경과 그것을 담은 목칠함이 있었다.
發礎石開視 悉皆燒盡 唯佛舍利甁 與波若經漆函 如
초석을 들추어 열어 보니, 모두 다 불타 없어지고, 오직 불사리병과 금강파야경의 목칠함만이 옛날과 같이 있었다.

水精甁 內外徹見 盖亦不動 而舍利悉無 不知所出
수정병은 안과 밖이 환히 보이고 뚜껑은 역시 움직이지 않았으나, 사리는 모두 없어졌고 어디로 나갔는지 알지 못했다.

將甁以歸大王 大王請法師發卽懺悔 開甁視之 佛舍利六箇 俱在處內甁
그리하여 사리병을 대왕에게 가지고 오니, 대왕께서는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서, 병을 열어 안을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自外視之 六箇悉見 於是 大王及諸宮人 倍加敬信 發卽供養 更造寺貯焉
병 밖에서도 그것을 보니 6개 사리가 모두 보이므로, 이에 대왕 및 여러 궁인들은 삼가 믿는 마음을 더욱 더하였고, 공양을 올리며 다시 절을 지어 그 속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3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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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

남북 500m, 동서 250m의 벽을 가진 직사각형의 궁성으로, 경사면을 이용하여 4단으로 석축기단을 세워 평탄하게 만든 궁궐 터다. 북서쪽 가까운 곳에 미륵사지가 있으며, 주변에 미륵산성을 포함해서 10여개의 성이 있었던 것을 보아 왕궁리에 있는 궁궐을 내성삼아 보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의 가운데에는 정면 32m 측면 16m 규모의 정전 건물이 있었다. 이 곳에서는 궁궐 건물지와 목탑터 그리고 그 뒤에 위치한 대형 정원 등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각종 금세공품과 함께 이곳이 백제의 수도임을 증명하는 ‘수부’라는 기록이 적힌 기와 등 3,0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특이한 것은 궁궐 안에서 각종 금, 금동 제품, 유리제품을 만들던 공방 시설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레바퀴 등도 확인이 되었는데, 이 시기의 백제 궁궐은 일종의 생산/상업 기지로써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있었겠지만 발굴이 드물게 되던 공중 화장실 유적도 나왔다.관련 기사글

그러나 이곳은 의자왕 시대에 와서 궁궐을 허물고 사찰이 된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 시기의 기와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인 5층 석탑은 목탑이 있던 자리 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의 양식을 본따 만든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목탑에 봉안되어 있던 사리함을 석탑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목탑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만한 자료가 없다. 아무래도 궁궐이 사찰로 변하면서 세워진 것 같지만...

최근까지 발굴은 진행 중이다. 궁의 외벽과 후원을 발굴 중이며 전체적인 윤곽이 거의 드러났다. 위에서 논란이 되는 시기와 용도는 백제세계유산센터에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있으니 참조.
홈페이지

최근의 발굴성과를 종합하면 이렇다.
1. 백제의 왕궁터이며 주변의 미륵사지, 익산토성 등을 보았을 때 임시로 머문 별궁이다. 즉, 왕성(수도)의 기능을 하기엔 방어력이 (거의)전혀 없는 점과 주변에 왕실에 물자를 공급할 대규모 도시가 없다는 점. 참고로 왕성 내에는 경작지가 없다.
2. 익산과 유래가 깊은 무왕시기에 축조되었는데 미륵사지가 왕실사찰급인 것을 고려하면 더욱 설득력이 있다.
3. 백제멸망 후 신라시대에 사찰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의자왕이 선왕인 무왕이 사용하던 별궁을 사찰로 개조한다는 건 불효에 가까운것이다. 다만, 관세음응험기에서는 최초부터 사찰이라고 하였으니 이를 반영한 절충안은 왕궁 내 왕의 개인사찰이 있었을 것.
4. 원래 목탑이 있었던 자리에서 고려~조선초까지 추측가능한 기와 명문이 발굴되어 꾸준히 보수, 개축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상부을와(上部乙瓦), 관궁사(官宮寺), 왕궁사(王宮寺) 등의 문구는 왕궁보다는 사찰로서 존속시기가 오래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관, 왕이라는 접두어는 초기 이곳의 기능이 왕궁(관청)이었음을 반증하는 것.
5. 기존의 마한 왕궁터설은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원래 구릉지역을 토목공사로 밀어버리고 지은 것을 볼 때 백제정도의 국가가 아니면 어렵다. 풍납토성의 판축기법, 미륵사지의 늪지대 매립을 보면 알 수 있다.

  1. 보물44호 였지만 1997년에 국보289호 승격됐다. 따라서 보물 44호는 영구결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