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설화를 바탕으로 한 SBS 사극은 서동요(드라마) 참조 |
薯童謠
목차
1 개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향가의 하나이다. 민간 설화가 향가로 승격된 예 중 하나이다.
훗날 백제 무왕(武王)이 되는 서동(薯童)이라는 인물이 신라 경주에 가서 꾀를 내어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우연하게 얻은 금으로 사찰을 창건한다는 이야기가 서동 설화이며, 이 서동 설화에 등장하는 노래가 <서동요>다.
이 서동요의 내용은, 한 마디로 선화공주가 방문을 열어놓으면 밤마다 맛동이 와서 자고 간다는 내용. 잘 해석해 보면 의외로 야한 내용이다. 제3행에 '서동방을' 이라는 아직까지 확실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글자가 있는데 여기서의 '방'이 사실 卵이 훼손된 것, 그러니까 알 → 남자의 두 알(...) → 남성 성기란 설이 있다고 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서동과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그렇고 그런 것을 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한국사 최초로 기록된 스캔들 찌라시
2 서동 설화
백제인인 가난한 서동은 마를 캐면서 살았기에 맛동이라고 불리었는데, 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이 불순한 노래(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스캔들급 루머를 퍼트린다. 루머를 들은 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쫒아낸다. 선화공주는 쫒겨나올 때 가져온 금을 떼어서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고, 이를 안 서동은 마를 캘 때 나온 금이 산더미만큼 있다고 하고는 왕에게 인증까지 했다. 결국 서동은 자신이 퍼뜨린 소문대로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및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말통(末通)대왕"이란 명칭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바로 "薯童"을 훈독한 "맛둥" 정도의 어휘를 적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적절한 바이럴 마케팅과 언론플레이로 결혼에 성공한 능력자
이 설화가 어째 지금은 러브스토리로 미화되지만, 타국의 공주를 모해할 목적으로 노래를 지어서 퍼트린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현대 기준에서 봐도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을 충족한다. 이후 서동은 어찌어찌 해서 금도 얻고 인심도 얻어 백제의 왕이 되고, 결국 선화공주와 함께 유명한 백제 사찰인 미륵사[1]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설화의 전문이다. 21세기에 재현되었다 카더라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와 서동 설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가치와는 별개로 내용 자체가 그지 깽깽이가 적국의 미소녀 공주를 후려서 왕이 되어 알콩달콩 살았다는 그야말로 로망과 판타지의 결정체이니만큼, 천년도 넘는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중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향가이다.
여기까지는 참 쉬운데 이 뒤부터가 난관이다...
3 풀리지 않은 문제
3.1 서동요의 해석 문제
서동요 내용 자체는 4구체로, 현존하는 모든 향가 중에사 제일 짧은데, 특히 마지막 구의 해석을 두고 두 학설이 첨예히 대립하고 있다. 여기서는 양주동과 김완진 두 사람의 설에 기초하여 원문을 제시한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夘乙抱遣去如 | 善化公主니믄 ᄂᆞᆷ 그ᅀᅳ지 얼어 두고, 맛둥바ᄋᆞᆯ 바ᄆᆡ 몰 안고 가다 선화공주님은 남 그으기 얼어두고[2]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 善化公主니믄 ᄂᆞᆷ 그ᅀᅳᆨ 어러 두고 薯童 방ᄋᆞᆯ 바매 알ᄒᆞᆯ 안고 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
(본 문장은 본고딕(Source Han Sans, Noto Sans CJK) 체나 함초롬체 LVT(아래아 한글 항목 참고), 혹은 네이버 나눔바른고딕 옛한글 서체(나눔글꼴 항목 참고)가 설치돼 있으면 제대로 보인다.)
- 夘乙의 해석
오구라 신페이와 양주동 이래로 "卯乙"로 보아 "몰-"(몰래)로 이해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김완진처럼 卵의 오자로 보아 "알을-"로 이해하는 방식이 있고, 뒹굴-로 해석하는 방식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일치된 견해가 없다.
- 抱遣去如의 해석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동을) 안고 (그걸 하러) 궁궐에 간다"고 해석하지만, 일각에서는 "(검열삭제)를 하며 (검열삭제)한다" 해석하기도 한다. 또 위에 나온 卵乙 및 房과 연관지어 (검열삭제)로도 연관짓기도 한다. 어찌 됐든 불순한 건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스캔들을 증거잡기 쉬운 여자의 가택에서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억지스럽긴 하다
3.2 서동의 정체에 대한 문제
삼국유사에 따라서 서동이 무왕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세부적인 역사적 정황과 맞지 않는 점이 많아서 서동 설화가 진짜 있었던 일인지, 진짜라면 서동이 진짜 백제 무왕이였는지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일연은 "고본에는 백제 무강왕(武康王)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백제에는 무강왕이라는 왕이 없다"고 언급하면서 무왕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여기 무왕이라는 것이 단순한 일연의 추측인지, 일연이 참고한 여러 자료 중에서 무강왕이라는 기록과 무왕이라는 기록이 모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과연 일연이 올바르게 추정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선 무왕이 살았던 시기는 신라와 백제가 한참 격전을 벌이던 시기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의 떨거지가 신라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한편으론 성왕이 한강유역 뺏긴 직후 왕녀를 진흥왕의 소비로 보냈다는 기록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면서 나온 사리함의 기록에는 미륵사를 중건한 왕비가 백제 관료의 딸로 보이는 기록이 적혀 있어서 설화에 나오는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말과는 맞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과연 무왕이 진짜 서동인지, 혹은 서동 설화 자체가 거짓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조동일 등 일부 인문학자들은 아예 선화공주가 후에 추가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3]에는 익산군에 있는 오래된 무덤인 쌍 고분(雙陵條)에 대해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보 되는 곳에 있는데,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의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능이라 하였다. 그런데 속칭 말통대왕(末通大王)능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은 즉 서동이 변한것이라 한다" 고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다. 후조선은 마한이다. 마한을 '후조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차지했을 때 준왕이 한반도로 와서 마한을 세웠다는 설 때문이다. 문제는 이 기록 때문에 무강왕과 서동 그리고 무왕의 관계가 뒤섞였다는 것이다.자료
또, 일본의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로 천도하고 새로이 제석정사(帝釋精舍)라는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광왕이 대체 누구인지, 백제의 무왕인지, 마한의 무강왕인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혹은 무강왕이 사실은 백제의 무왕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참고로 이 쪽은 이쪽 나름대로 익산에서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왕궁리 유적)이 발견되면서 "백제가 과연 익산에 천도했느냐, 했다면 누가 했느냐" 등의 문제로 번져서 골치아픈 상황기사 하여간 이 무강왕의 존재로 인해 서동요의 작자인 서동의 정체와 백제 무왕, 그리고 마한 혹은 백제의 무강왕이 얽히게 되었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설이 분분하게 되어서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다. 거기다가 일반인 입장에서는 환빠마저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라 아무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애매한 상황이다.
하여간 아직 확답이 없다. 대표적인 학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3.2.1 백제 무왕설
삼국유사 이후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설이다. 서동은 곧 백제 무왕이며, 왕비는 진평왕의 3녀 선화공주라는 것. 일단 1차 사료인 삼국유사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강력한 설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서동 설화 외에도 미륵사 창건 설화와 관련된 무왕의 기록 하나 더 존재한다.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을 미륵사다. 이 때문에 쉽게 서동이 백제 무왕이 아니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2009년 1월 19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및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에는 미륵사가 무왕의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쓰여있었다. 반면 문제가 된 것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 왕비가 미륵사의 건립을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 이는 미륵사를 창건한 왕의 왕비가 백제 귀족의 딸이라는 말이기에 이 학설의 힘이 빠지게 되었다. 설화에는 선화공주가 신라 왕의 딸이기 때문. 또한 앞서 말했듯이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험악했기에 결혼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한편으론 성왕이 한강유역 뺏긴 직후 왕녀를 진흥왕의 소비로 보냈다는 기록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서동 설화 자체가 거짓이거나, 서동이 무왕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커졌다. 서동 설화가 거짓이었다고 하면 간단한 문제겠지만, 워낙 인기있는 설화고, 삼국유사에 나온 기록 때문에 서동요 역시 아주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불국사의 창건 설화처럼 전부 사실은 아니래도, 완전한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 그래서 현재는 보완차원에서 무왕의 왕비가 여러명이었거나, 기록에 나온 사택 왕비는 선화공주의 사망 뒤에 들인 후처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덕일 교수는 당시 공주라는 칭호가 왕의 딸에게만 쓸 수 있는 용어는 아니었기 때문에 선화공주의 아버지가 진평왕이 아닌 익산지역 토호였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3.2.2 마한의 무강왕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후조선(後朝鮮)의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능"이라는 기록을 바탕으로로 서동이 기원전 마한의 왕이었던 무강왕(武康王)이라는 마한왕설이 나왔다.
이에 따르면 같은 기록의 "백제의 무왕"이라는 언급이나 미륵사와 연결된 것은 후대의 이야기와 섞인 것으로, 원래 서동의 설화는 마한의 이야기며 무강왕은 마한의 왕(혹은 마한에 속한 한 소국의 왕)이라는 것이다. (신영명이 주장했는데, 그가 최초인지는 확인바람). 즉 이 설을 따르면 이국의 공주와 결혼한 것은 마한의 무강왕이며, 백제 무왕은 무왕대로 백제의 미륵사를 세웠다는 것. 그것을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다가 마한의 무강왕이 백제의 왕인 줄 알고 백제의 왕 중 이름이 가장 비슷한 무왕으로 끼워 맞췄다는 추측이다. 이 경우에는 미륵사탑의 기록에도 맞고, 서동 설화 역시 무리없게 된다. 오직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잘못 추정한 것이 된다.
이 학설은 서동 설화의 내용 자체도 근거로 한다. 서동 설화를 보면 서동은 사람들의 인망을 얻어 왕이 되었다고 하고 있을 뿐 당시 서동이 살던 지역의 국가나 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어서 건국신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무왕의 시대인 7세기는 '왕가와의 혈연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설화적 인물이 왕이 되기에는 시대가 너무 늦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하지만 1916년에 벌어진 발굴 결과 쌍릉 양식이 판석제 돌방무덤이며, 7세기의 백제의 무덤양식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와서 무덤 주인이 마한의 왕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어졌다. 이 점이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한 관세음응험기의 '무광왕'은 왜 백제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가란 의문이 남는다.
아무튼 이 쌍릉은 사비시대의 능산리고분의 양식과 일치하게 되어 그 주인이 백제 무왕의 무덤일 것이란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쌍릉은 미륵사지의 멀지 않은 정 남쪽에 있으며, 쌍릉의 동쪽에는 왕궁리 유적이 매우 가깝다. 지리적으로 봐도 백제랑 연관성이 많다.
3.2.3 백제 동성왕설
사학자 이병도가 제기하였다. 그는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4] 등이 서동(薯童)의 우리말 음인 맛둥과 비슷함을 발견했다. 여지승람의 기록에서도 말통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역시 동성왕의 여러 이름들과 그 발음형태가 상당히 유사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신라와 국혼한 사실이 있음을 연결지었다. 일반적으로 이병도가 발음의 유사성만 들이밀은 학설은 후대에 대부분 부정당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 학설만은 의외로 신빙성이 높다. 이병도가 언급한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 사이의 결혼 동맹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제의 왕이 신라 귀족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정식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유일한 경우가 동성왕이다. 이는 아래의 마나노장자설과도 잘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추측은 앞서 말한 무강왕의 무덤과 맞지 않는데, 5세기의 인물인 동성왕은 7세기 이후의 양식인 고분보다 이른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설명하기가 애매해진다. 이 경우에는 왜 설화에 미륵사를 창건한 이야기가 나왔는가를 설명하기가 힘들다.
3.2.4 일본의 마나노장자 설
공교롭게도, 일본 분고오노시에는 마나노(眞名野)장자(長者) 설화(일본어로는 真名野長者伝説)라는 서동 설화와 아주 흡사한 전설이 있다.
미에 마을에 가난한 스미야키코고로라는 청년이 살았다. 어릴 때 숯만 구워 생활했기 때문에 스미야키(숯이라는 뜻)코고로라 불렸다. 당시 수도에는 다마쓰라는 매우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는데 공주는 꿈에서 숯을 굽는 남자가 자기 남편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난한 스미야키코고로를 찾아가 같이 살게 됐다. 다마쓰 공주는 모후가 준 금을 보여주자 스미야키코고로는 `어릴 때 숯 굽던 곳에 이 같은 금이 얼마든지 있다'며 둘이 금을 캐어 하루아침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후 스미야키코고로는 마나노 장자로 불리게 됐다. 마나노 장자는 불심이 매우 깊어 당나라 천태산으로 황금 3,000냥을 보냈다. 이에 당나라는 백제국에 사는 연성법사에게 명하여 미에 마을에 불상을 보냈으며, 마나 노 장자는 그 불상을 맞아 큰 절을 세웠다. 그 절이 미에 마을에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연성사'다.
이 설화에 나오는 마나노 장자가 서동이라면, 아무래도 7세기의 인물인 백제 무왕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마나노장자 설화는 6세기 경에 나왔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백제에서 전해져 왔다고 가정했을 경우 백제의 서동 설화보다 연대상 앞선 것이 되기 때문. 이 때문에 서동 설화가 마나노 장자와 동일한 이야기임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 5세기의 인물인 동성왕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위의 이병도가 주장한 동성왕설에 비추어본다면 나름대로 잘 맞물려진다. 무령왕과 마찬가지로 동성왕 역시 일본 출생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고려하면 두 설화간의 연결고리는 충분하다. 다만 이 경우에는 동성왕설과 같은 약점을 가지게 된다.
기존 학설에 이러한 내용을 추가하여 2011년 12월 15일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하였다. 여러가지 학설이 실린 기사
3.2.5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설
김서현의 처인 만명부인이 바로 신라의 공주이며, 김서현은 가야의 왕족이라는 것을 감안해 보면 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자세한 사정은 만명부인 또는 김서현 항목을 참고.
3.2.6 백제 무령왕설
사재동이 주장하였다. 무강왕의 康자가 무녕왕의 寧자와 의미가 통하는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한 무왕의 시기는 백제 국력이 좋지 못한 시기라 미륵사 수준의 큰 절을 창건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 요지.여기
3.2.7 원효설
김선기의 학설로, 서동이 실제로는 신라 승려 원효라는 것이다. 물론 위의 그 어떠한 학설보다도 신빙성이 낮다. 근거라고 해야 실제로 신라 공주와 엮인다는 것과, 원효의 출가전 이름인 설서당의 서당과 서동의 유사성 정도다.
3.3 익산 미륵사지 석탑 금판 사리봉안기 해석 문제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금제사리기(金製舍利器)와 함께 발견된 한 장의 금판에 담긴 내용 때문에 서동 설화의 진위 자체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석탑을 만들고 부처님 사리를 모신 경위를 금판에 새겨놓은 사리봉안기(奉安記)가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고관의 딸이라고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가로 15.5㎝,세로 10.5㎝ 크기의 금판 양면에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글자마다 붉은 색을 칠한 사리봉안기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 99자를,뒷면에는 11행 94글자를 새겼는데, 미륵사와 석탑을 언제 누가 세웠는지 밝혀놓았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번역한 바에 따르면 봉안기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좋은 인연(善因)을 심어…깨끗한 재산을 희사하여 절을 세우시고,기해년 정월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륵사 석탑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기간인 639년이며, 무왕의 왕후는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을 지낸 사택의 딸이고, 미륵사는 좌평의 딸인 왕후가 재물을 보시하고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좌평 벼슬을 지낸 '사택'은 백제의 8대 성씨 가운데 하나로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때 이를 지지했던 핵심 귀족"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봉안기의 기록만으로 두 사람의 로맨스를 허구로 단정짓기엔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사리봉안기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백제 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 이를 토대로 가람(절)을 세운 일, 639년 정월에 사리를 석탑에 안치한 일 3가지다. 이것만으로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고 미륵사의 창건 시기도 639년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석탑에 사리를 봉안한 시점과 사찰의 창건 시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무왕의 재위기간이 워낙 길어서 왕후가 여러명일 수도 있다는 것.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으나 수십년이 걸리는 탓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타계한 뒤 다른 왕후가 서탑을 세웠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번에 사리기와 봉안기가 발견된 석탑은 서탑인데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후대 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대 왕후인 선화공주가 세웠을 수도 있다.
4 밝혀졌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왕의 비 중 신라의 왕족 여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등장했다 라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익산지역 쌍릉의 발굴 결과, 무왕과 같은 묻힌 왕비가 무왕보다 먼저 죽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경우 사택 왕후의 경우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왕보다 늦게 죽었으므로 사택적덕의 딸이 아닌 무왕의 첫째 비가 존재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관련기사 1, 2. 이는 무왕의 다른 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기 때문에 이걸로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무왕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못 된다. 선화공주가 익산 성주의 딸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역시 선화공주는 신라왕의 딸일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대체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2016년 쌍릉 출토 유물 재조사 결과 20대-40대 사이 여인의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나오는 바람에 신라 공주까진 아니어도 신라 왕족 여인이 이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다.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