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

(미륵사지에서 넘어옴)
유네스코 세계유산
width=100%이름백제역사유적지구영어Baekje Historic Areas
국가 위치대한민국 전라북도

등재유형문화유산등재연도2015년
등재기준(ii)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중국일본의 고대 왕국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교류를 통해 이룩된 백제의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iii)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볼 수 있는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 건축학적 특징과 석탑 등은 백제 왕국의 고유한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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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미륵사지 전경

彌勒寺
益山彌勒寺址

1 개요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 백제 무왕이 638년 창건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동 설화와 관련되어 여러 이견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백제의 절로는 최대 규모이다. 여러모로 신라황룡사와 쌍벽을 이루며, 고구려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절이다. 또한 가장 거대한 백제 석탑이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커다란 절은 지금은 터만 남아 무너진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만 외로이 서 있다. 터인 익산미륵사지[1]대한민국 정부가 사적 제150호로 지정했다. 미륵사지 주변에는 무왕과 관련된 마룡지왕궁리 유적 등이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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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백제역사유적지구란 이름으로, 공주시, 부여군 지역의 백제유적들과 함께 지정되었다.

2 창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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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복원 모형

현재는 서탑(西塔)만 현존하고 있다.

"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을 미륵사다."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하루는 왕[2]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다가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敬禮)하였다. 이를 보고 부인은 그 곳에 큰 절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 삼상(彌勒三象)과 회전(會殿), 탑(塔), 낭무(廊惫)를 각각 3곳에 세우고 액호(額號)를 미륵사(彌勒寺)라 하니, 진평왕은 백공(百工)을 보내서 도왔다.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중 끝 부분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와 관련된 설화가 2번 나온다. 하나는 법왕이 부여에 처음 짓기 시작해서 무왕이 마무리를 했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서동이 무왕이 되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아래에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왕흥사와 미륵사의 관계가 좀 헷갈리는 기록인데, 왕흥사는 실제로 부여군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흥사의 별명 역시 미륵사라고 한다면, 익산의 미륵사와 부여의 미륵사가 같이 존재했던 셈이 된다. 그러나 다른 책인 삼국사기에는 왕흥사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 있는데, 위덕왕이 600년에 왕흥사를 창건했다고 쓰여 있다.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


삼국사기》<벡제본기 권27 법왕〉

결과적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2007년에 발견된 왕흥사 사리함에는 왕흥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인 600년보다 23년 앞선 577년 창건되었다고 쓰여 있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왕흥사 사리함 음각문》

서기 577년은 무왕의 재위가 아니다. 뭔가 기록이 많이 틀어져 버린 것. 아무튼 부여의 왕흥사는 무왕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었다.

왕흥사 얘기를 놔두고 넘어가보면 아래의 기록은 익산의 미륵사를 잘 묘사하고 있다. 미륵 삼상은 미래불인 미륵이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에 입각한 것이며, 전, 탑, 낭무를 각각 3곳에 세우고 미륵사라고 하였다는 것은 기록과 실재 미륵사터의 흔적이 일치하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익산의 미륵사는 무왕의 절로 오랫동안 추정되어 왔다.

를 캐서 팔던 백제의 그지 깽깽이가 꾀를 잘 써서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한다는 충격적인 신분상승 스토리인 서동 설화가 어찌나 낭만적이던지 서동설화에 나오는 무왕(서동)이 설화의 끝부분에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 역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대리만족의 꿈이여..

2.1 서동 설화와 논란

<서동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서동 설화가 실제인지, 서동이 진짜 백제 무왕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백제 무왕이 서동이라는 것이 정설이었으며, 그에 따라 7세기에 미륵사가 창건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여러가지 새로운 정황이 나오면서 점점 서동이 실제 역사의 무왕이었을 것이란 설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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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중인 미륵사지 석탑의 기초. 가운데 있는 돌이 심초석(心礎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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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병과 금제사리봉안기

미륵사지 서탑(서쪽의 석탑)을 해체하던 중 2009년 1월에 심초석(心礎石. 탑의 중앙 기둥을 받치는 돌) 안에 보관되어 있던 사리병[3]과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금판에 음각하여 주칠(朱柒. 붉은 칠)한 유물로, 미륵사 창건에 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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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사리봉안기 원문>

金制舍利奉安記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遶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并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가만히 생각하건대, 法王(부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根機(근기)에 따라 感應(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舍利(사리)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五色으로 빛나는 舍利를 7번 요잡[4]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沙(宅)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善根(선근)을 資糧(자량)으로 하여 大王陛下(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蒼生(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王后(왕후)의 身心(신심)은 水鏡(수경)과 같아서 法界(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不滅(불멸)하시어 七世의 久遠(구원)까지도 함께 福利(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 김상현 동국대학교 교수.

이 유물로 인해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시대인 己亥年(기해년:638년)에 창건되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왕흥사와 달리 이 쪽은 무왕의 재위와 일치한다. 게다가 법왕의 재위기간이 599년부터 600년이기 때문에 무왕이 대략 35년 이상 공사를 해서 638년에 세워졌다고 하면 말이 된다! 즉 삼국유사에 있는 부여 왕흥사와 얽힌 기록은 잘못 섞이긴 했어도 익산 미륵사의 역사와 관계가 있는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익산 미륵사에 얽힌 기록이 문제가 된다. 일단 창건은 무왕이 한 것은 확실하지만 공사의 시작은 법왕이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되었다. 물론 법왕의 재위가 워낙 짧았기에 사실상 무왕의 의도대로 공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크니 큰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왕후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이유는 왕후의 요청에 의한 것인데, 사리함 유물에 의하면 이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씨가 된다. 사택씨적덕은 백제의 귀족가문인 대성8족 중 사택씨 가문의 인물로 후기 백제에서 왕후를 배출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정도 대형 사찰을 지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권력과 재산이 뒤따라야 하니. 결국 왕후는 백제의 인물이기 때문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왕후는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설화와는 맞지 않아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거짓일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다. 새로운 미스테리가 생겼다.

서동 설화가 단순한 픽션이었다고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불국사 창건 설화처럼 허구 속에 진실이 섞여 있는 것이 설화이기도 하고, 워낙 인기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다른 쪽으로 해석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무왕의 왕후가 2명 이상이 있었는데, 사택왕후는 선화공주가 일찍 죽고 새로 들어온 후처"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또는, 당시 왕의 결혼이란 곧 정치적 활동이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여러 왕후를 두었다고 보더라도 크게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국내 안정을 위해 호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동시에 이웃 국가의 왕족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 역시 당대 기준으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결국, 서동이 무왕이었다고 가정할 때 무왕의 왕후는 신라의 선화공주이거나, 호족인 사택 집안의 딸 둘 중 하나여야 하고,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보는 것은 현대적인 결혼관을 바탕으로 당시 왕의 결혼을 이해하려 드는 오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해당 발굴 결과 당시 미륵사의 구조가 (서동 설화를 소개한)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하고, 건설 시기도 무왕 연간임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무왕 및 서동, 선화공주 관련 설화의 신빙성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보는 관점도 있는 터라 더욱 그렇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 또는 가정해 보자면...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짓기 시작한 사찰이 백제 내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사택비의 공적으로 둔갑했다거나, 삼국 통일로 신라의 정통성이 확립된 시기의 인물인 일연이 사택비의 공적을 선화 공주의 공적으로 흡수했을 수도 있고... 여하간,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사택비가 무왕의 왕후면 선화공주는 왕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

다만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이 서동 설화의 신빙성을 높여주었다는데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연 및 해당 내용을 전한 사람들이 미륵사에 대한 정보를 오로지 서동 설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면 서동 설화 전체의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일연의 시대까지도 미륵사는 멀쩡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륵사의 창건자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엉터리라도 미륵사의 구조에 대한 서술은 당시에 현존한 미륵사의 형태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서동의 정체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다시 뜨고 있다. 아예 서동이 무왕이 아닌 5세기의 인물인 동성왕(479~501) 등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제기되고있다.

2016년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의 쌍릉 대왕묘 출토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발굴한지 99년만에 재조사해보니 20대-40대 사이 여성의 치아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확인되어 무왕 시기에 신라 왕실 여인이 백제로 시집온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3 가람 규모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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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가람배치도.

가람 배치와 면적에서 크고 아름다운 규모를 자랑한다. 가람은 사찰, 사찰 건축물이 배치된 형식. 탑이 1개가 있고 금당이 1개가 있으면 1탑 1금당식이라고 한다.

가운데 9층 정도의 목탑이 존재하고 동서에 각각 목탑보다 약간 작은 9층 석탑들이 위치한 구조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석탑은 원래 7층으로 추정되었으나 근처 동탑지에서 새로운 파편[5]이 발견되어 9층으로 확정되었다. 목탑의 경우에는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으나, 비율 등으로 봐서 석탑과 같은 9층으로 추측하고 있다. 양쪽의 쌍 석탑보다 층이 낮은 것은 좀 이상하기때문이다. 목탑의 높이는 약 60m 정도로 추정되어 상당히 크고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관련 기록이나 석축 등이 제대로 남지 않아서 많은 것은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홀로 남은 석탑으로 유명하니...세월이 무상하다.

이 석탑은 한반도에 석탑이 들어와 만들어진 초기의 것으로 추측되며, 목탑의 형태를 직설적으로 모방한 것으로 보여 과도기적인 원초적 형태로 평가되는 편이 일반적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무언가가 생기면 이미 기존에 존재하는 다른 재료의 무엇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파르테논 신전처럼 초기에 세워진 석조 건축물은 목조 건축의 구조를 장식으로 따라한 모습이 보인다. 이 미륵사지 석탑 이후에 세워진 한국의 석탑들은 계속 크기가 작아지며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게 된다. 백제에 남아 있는 다른 하나의 석탑인 정림사지 석탑이 훨씬 작고, 신라의 감은사석탑불국사 석탑으로 작아지는 등 시간이 지날 수록 표현이 간결해지고 크기는 점점 작아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미륵사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의 조영 시기가 불확실한 면이 있고 백제 석탑은 이 두 개만 남아있어 진짜 원초적인 형태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 탑의 북편에 금당[6]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 서쪽은 서원, 중앙은 중원이라는 개념의 삼원식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삼원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절이 3개가 모여있는듯 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는 미륵하생경을 기반으로 한 미륵신앙으로 인한 것인데,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3회 설법을 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가람이다. 그 동안 백제의 가람은 그동안 1탑 1금당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전형적이라고 생각되어 왔었다. 그러나 미륵사로 인해 새로운 형식의 가람이 발견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미륵사지 가람배치를 보면, 북서 방향에 중원을 배치하여 남에서부터 중문, 좌우로 복도의 성격을 띤 남회랑·목탑·금당이 배치되어 있고, 주위는 동회랑·서회랑·북회랑으로 둘러져 있다고 한다.

또한 각 금당에는 지하구조가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고, 미륵신앙에 따라 미륵이 하늘(1층)에서 지상(지하)내려오기를 기원하는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목탑에 관해서는 신라 황룡사와 비견될만하다. 황룡사가 미륵사보다는 먼저 창건되었지만, 정작 얼굴마담인 황룡사 9층 목탑은 미륵사 창건 이후에 완성되었기에 미륵사가 창건할 때 목탑을 세웠다면, 미륵사 목탑이 더 먼저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백제의 아비지가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설을 도왔다는 기록을 보면 정황상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미륵사지 목탑은 황룡사 목탑의 프로토타입일 수가 있다는 것. 백제 장인들은 신라, 일본까지 건너가서 건축물을 만들 정도로 훌륭한 기술을 가졌기때문인데 일단은 미륵사 창건 당시에 신라에서도 인력이 파견되었다는 설화의 내용도 있으니 추측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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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목탑 모형과 복원안은 장경호의 안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장경호 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근처의 석탑에 맞춰 9층으로 상정하고 있다. 황룡사 목탑과는 달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데, 이는 관련된 기록이 없을 뿐더러 백제의 영향을 받은 호류지의 목탑과 건축이 내부에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는 구조라는 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탑 중심에는 커다란 심주에 의해 탑 아래부터 꼭대기까지 연결된 연속된 구조를 가지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다. 대신 각 층의 비율은 근처의 석탑처럼 줄어드는 비율이 급격한 것으로 설계하였다. 이 점은 보다 일본식 목탑에 가깝게 재현된 백제문화단지능사 5층 목탑과는 구별되는 점이다. 능사의 경우에는 바닥이 3x3칸으로 일본식 목탑과 동일하지만, 미륵사 목탑은 5x5칸으로 다르다.

4 백제 이후의 미륵사

창건 이후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성덕왕목탑이 벼락에 맞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한다. 미륵사지에는 당간지주가 남아있는데, 통일신라의 기법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때도 절은 꾸준하게 유지되었을 것이다.

922년, 고려승려 혜거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는 기록이 혜거국사 비문에 나타나있다. 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의 기록이 있다. 기와의 연도는 그 해에 새 기와로 보수했다는 흔적이다.

이후 조선 1407년(태종 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을 정할 때 다른 사찰들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이 때까지만 해도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인 16세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양곡집에 미륵사지 석탑이 나타나고 있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 최대'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문구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지어진 와유록에 미륵사의 폐허를 보며 쓸쓸한 감정에 잠기는 사설 시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중에 망했어요 신세를 면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절이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분위기를 생각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유생들의 고의적인 테러로 망했을 수도 있다.

이 와유록에는 17세기 이전에 벼락에 의해 석탑이 무너졌다는 기록도 있으나, 기록과는 달리 석탑의 구조를 살펴본 결과 석탑의 1층 부분에서 발생한 구조의 변화로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설이 나왔다.

5 현재

절터에는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당간지주가 있으며,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5.1 동탑

미륵사지 동탑이야말로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최악의 사례로 기록될 겁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유홍준, 2004년 미륵사지석탑(서탑) 해체 조사보고회에서

미륵사지 동탑은 1991년 공사를 시작하여 93년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당시 거의 모든 문화재위원들이 고증이 불가하다며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졸속으로 복원되어 버렸다. 고대의 석조물은 돌을 정으로 일일히 쪼아 만든 거친 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원시에 하얀 화강암을 기계로 깎는 바람에 기존의 석탑과 부조화가 심하고, 표면 질감이 너무 매끈하여 상당히 부담스러운 건축물이 되었다. 이를 두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허망과 허상의 복원탑'이라 하였다.

5.2 서탑

대한민국의 국보
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12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익산 미륵사지 석탑
한자益山 彌勒寺址 石塔
영어-
분류번호국보 11호
소재지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분류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시설1기
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백제, 6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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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6층 부분까지만 남게 되었고, 1915년에는 벼락에 맞아 또 다시 파괴되었다.(…) 이걸 일본인들이 시멘트로 보수하면서 사진과 같은 충격과 공포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무대포식 콘크리트 보수를 무작정 깔 수가 없는 것이, 1915년 경에 찍힌 사진을 보면… 그래도 보수는 제대로 안했으니 까고 싶은 위키러 들은 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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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버릴 것 같다......

위 사진보다 더 충격과 공포의 사진을 보고 싶다면 링크. 돌더미가 되어버린 석탑.(뒷면의 모습이다.)

서탑을 해체 복원하던 도중 확인한 결과, 이 시기의 서탑은 측면에 보강한 석축에 간신히 기대고 있던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고 한다. 미륵사지 박물관 큐레이터의 해설에 따르면, 이렇게 튼튼했던 탑은 아마도 도굴로 인해 반쯤 무너졌을 것이라 한다. 아쉬운 일이다. 어쨌든 말 그대로 '붕괴 일보 직전'이어서 그대로 놔두면 수십년 내에 붕괴가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일제강점기콘크리트가 최첨단 건축자재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아야 하고, 엄밀하게 말하면 복원이 아니라 임시로 보존 조치를 한 것이다. 콜로세움을 무너지지 않게 콘크리트로 가벽을 만든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일본이 한국의 문화재를 순수하게 사랑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겠지만, 식민지였다고 성의없이 콘크리트 떡칠을 했다고 하기는 힘들다.[7]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욱 흉물스러워졌고, 향후 붕괴될 우려가 있어 국가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4월 해체보수정비를 결정하였다. 전라북도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를 위한 준비부터 석탑해체보수정비를 위한 가설덧집 공사 등의 공정을 완료하였고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본격적인 해체보수정비를 추진하였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보수정비사업은 1998년에 시작하여 2007년에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동양 최대의 석탑이며 국보 제 11호인 점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해체하였고 백제 창건 당시 건축기술을 조사하기 위한 학술연구를 병행하면서 당초 계획보다 늦어져, 국가문화재위원회는 7년 늘어난 2014년까지 해체보수정비사업을 완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웃지 못할 일은 공사가 계속 늦어지니까 검찰에서 미륵사 보수팀이 예산을 횡령했다고 의심해서 수사한 것.#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었고 단지 복원 작업에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린 탓이었다. 일제가 들이부은 185톤의 콘크리트를 치과용 드릴로 일일이 갈아냈다고 한다.

탑을 원래대로 9층까지 복원하는지, 이전에 남아있던 6층까지 복원하는지도 논란이 되었다. 일단 6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또다시 딜레마가 생겼다. 허물어진 부분을 새로 복원해 대칭형의 6층탑을 만들지, 아니면 1915년 콘크리트 보존 처리 이전의 허물어진 상태를 살려 비대칭으로 복원할지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은 허물어진 모습의 부분 복원으로 결정되었다.# #

앞서 말한대로 2009년에는 미륵사지 서탑 안에서 사리병과 금판 모양의 봉안 기록이 발견되었다.[8] 사리병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다. 주경미 부경대 연구교수는 "항아리나 무늬 양식 등에서 6세기 중엽의 부여 왕흥사지 사리병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중국 수나라에서 유행했던 사리함 문양 제작 기술까지 독창적으로 응용했다"며 "백제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이라고 말했다.

한편 익산시에서는 오래 전부터 미륵사탑뿐만 아니라 미륵사 전체를 복원(중건)하려는 시도를 해왔는데, 2010년 이후로는 미륵사 복원과 관련한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고, 최근의 고도보존육성사업 내용에는 '미륵사지 정비'로 나온 것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미륵사 복원의 꿈은 접은 듯 하다.# 다만 이후에도 복원될 가능성은 있다. 황룡사 복원돼서 호평받으면 경쟁심에서 어떻게든 하겠지

백제의 궁궐(?) 형식인 백제문화단지가 조성/복원 돼서 이에 라이벌 의식을 느낀(...) 경상북도, 경주시 측에서 신라의 궁궐이었던 경주 월성 복원을 추진중이다. 그런데 사실 경주의 신라왕경 복원 프로젝트는 방폐장 유치 보상금 3천억원이 있었으니 가능한 사업이다. 당장 단기(?) 프로젝트인 월정교 복원이 235억, 경주읍성 복원이 600억원 규모의 사업이고, 황룡사 복원이 2,900억원, 월성 복원사업은 무려 9,450억(!)이라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방폐장 보상금 3천억으로 우선 월정교나 황룡사같은 중단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라벌 전체의 복원을 중앙정부에 제시했으니 먹히는 것이다. 역시 최소 천 억 단위의 예산이 들어갈 미륵사 복원을 이런 밑바탕이 없이 추진한다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익산도 뭐 하나 유치해야

2014년 11월 29일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 특별전으로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사리장엄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영기, 금동제사리외호, 금동제사리내호 등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보고싶은 사람은 꼭 가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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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6일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 착수식'이 거행되었다. 그동안 바닥을 다지고 1층부의 조립을 마쳤으며 해체과정에서 발견한 사리의 재봉안도 이뤄졌다고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해체 때 나온 기존의 부재 1500톤을 그대로 사용할 계획으로 보수 규모의 62%에 해당하며 나머지 38%의 부재는 인근 익산시에서 가져온 화강암을 사용하며, 2017년 7월 완공 예정이라고 한다.

6 대중문화 속의 미륵사

  1. 益山彌勒寺址. 익산에 있는 미륵사의 터
  2. 삼국유사에는 무왕이라 쓰여 있다.
  3. 부처의 유해에서 나온 돌인 사리 등을 담았다는 용기
  4.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
  5. 노반: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의 한 부분
  6. 부처상이 모셔진 건물
  7. 이 당시 일본자신들의 문화재에도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사카 성나고야 성 복원에도 썼으며, 심지어 메이지 덴노 무덤에도 콘크리트로 봉분을 만들어 씌울 정도였다. 그냥 당시에 쓸 수 있는 재료 중엔 콘크리트가 최선이었다.
  8. 이 기록에 등장한 좌평 사택적덕과 사택비는 드라마 계백에 등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