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삼국지)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王思

생몰년도 미상

제음 사람으로 서조영사를 지내면서 왕사는 정치에 관한 의견서를 갖추었다가 조조의 의견을 빠뜨리자 매우 노해 중형을 받을 위기에 처했는데, 왕사는 외출하던 중이라서 양습이 대신 가서 조조에게 대답했다.

결국 왕사는 자신을 대신해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듣고 황급히 돌아와서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인정했으며, 조조는 양습이 자기를 변호하지 않은 것과 왕사가 책임을 다하는 태도에 감탄하면서 아군 진영에 이렇게 의기가 넘치는 선비가 두 명이나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말했다.

양습과 함께 죄가 면해져서 둘은 자사로 임명되었는데, 왕사는 예주자사에 임명되었다. 후에는 상서복야가 되었다가 용종복야였던 필궤가 왕사의 후임으로 신비를 추천할 때 왕사는 정력적이고 부지런한 옛 관리지만 그의 충성심, 신의, 지략은 신의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손자는 폐하(조예)께서 그를 기용한 것은 그의 노력을 취하려고 한 것으로 허명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이 번거롭다고 여기는 효련문서에서 현인을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자 이로써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고 정시 연간[1]에는 대사농이 되었는데, 연로해서 눈이 어두웠고 성내면서 노하는 것에 절제가 없어 아래의 관리에게 시끄럽게 대하니 자연스럽게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성품은 믿음이 적어 한 관리가 자신의 아버지가 병에 심하게 걸리자 휴가를 청했지만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해 휴가를 주지 않았으며, 관리의 아버지가 다음날에 죽었지만 왕사는 한스러운 생각이 없었고 그의 각박함이 이와 같았다.

위지에 따르면 그는 업무를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 관리였지만 작은 일에 가혹할 정도로 추궁해 일을 대범하게 처리할 줄을 몰랐으며, 위략에는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파리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있을 때 파리가 날아와 붓끝에 앉았고 쫓아도 계속 날아왔는데, 서너 번씩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자리에 일어나 파리를 쫓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되돌아와 붓을 집어서 방바닥에 내던진 후에 짓밟아 부쉈으며, 이 일화를 왕사노승(王思怒蠅)이라고 부른다.

2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王士

생몰년도 미상

광한군 처현 사람으로 왕보의 사촌형이며, 자는 의강(義彊).

유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간 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부절의 장이 되었다가 아문장으로 승진했으며, 지방으로 나가 탕거태수가 되었다가 건위태수로 옮겼다.

제갈량이 남쪽 정벌에 나서자 익주태수로 전임되었는데, 남쪽으로 가기 전에 만족에게 살해되었다. 양희가 계한보신찬에서 공록과 함께 지기가 있고 용감하다고 평가했다.

유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으로 볼 때 형주에서 천거되어 형주 때부터 유비를 섬긴 것으로 보이며, 유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사촌동생과는 별개로 유장을 섬긴 것이 아니라 형주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삼국무쌍6에서는 진나라 스토리모드의 제2차 촉 격퇴전 전편에서 남안성 외부의 촉군, 강족의 군사들을 물리치면 남안성 서쪽에 있는 계곡에서 황월영과 함께 촉군의 원군으로 등장한다.

3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2

王嗣

생몰년도 미상

건위군 자중현 사람으로 자는 승종(承宗).

연희 연간(238 ~ 257년)에 공업, 덕행이 현저해 효렴에 추천되었으며, 점차 승진해 서안위독, 문산태수를 역임하고 안원장군을 겸임했다. 영 내의 강족, 호족들을 은애, 신의를 가지고 접했기 때문에 강족, 호족들이 모두 그에게 복종했다. 또 평소 난폭한 여러 부족들도 모두 복종했기에 당시 북방의 국경 지대는 안정되었다.

그 때문에 강유가 북벌을 할 때마다 강족이 말, 소, 양, 모직물 등을 제공했으며, 한층 더 곡물을 내서 자금의 도움으로 했기 때문에 강유는 그 자재를 기반으로 싸울 수 있었다. 진군장군으로 승진해 그대로 군 태수를 겸임했으며, 후에 강유의 북벌에 수행했을 때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이로 인해 수 개월 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이민족들이 수 천 명이 몰려 들어 눈물을 흘려 소리높여 울었으며, 왕사는 인정이 두텁고 진심있는 인품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았다. 강족들은 왕사의 자식, 손자들에 대해 육친과 같이 접하거나 의형제의 인연을 묶었으며, 그에게의 친분은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1. 240 ~ 24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