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보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1

王甫
(? ~ 222)

자는 국산(國山)으로 그의 전기는 정사 삼국지 촉서 양희전에 기재되어 있는 계한보찬전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익주 광한군 처현 사람으로 원래는 유장(劉璋) 휘하의 서좌였다. 풍모가 늠름하고 인물 평가와 정치 수완이 뛰어났다. 유비가 촉을 평정하자 면죽현령이 되었다. 곧 형주로 가서 의조종사로 관우 휘하에서 일했다. 221년에 이릉대전에 참가했지만 222년 6월에 촉군이 자귀에서 육손에게 대패했을 때 전사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장의 부하였다는 언급이 없으며 관우를 보좌하는 수군사마로 등장한다.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번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형주 수비를 위해서 봉화대 설치와 형주 통치 대행으로 반준 대신 조루를 기용하라고 조언하는 역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관우는 봉화대 설치만 받아들이지만 그가 번성에만 온 힘을 쏟는 사이 여몽의 계략으로 봉화대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결국 형주가 여몽에게 떨어진다.

이 때 믿었던 반준이 항복하자 관우는 왕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며, 위군과 오군에게 쫓기고 익주와 상용에서 구원군이 오지 않자 맥성에서 버티던 관우가 북문의 포위를 뚫고 익주로 가려고 했다. 왕보는 좁은 길에 오군이 매복하고 있을 거라면서 큰 길로 가라고 제안하지만 오히려 관우는 매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보와 주창을 맥성에 남긴 다음에 큰 길로 가다가 결국 붙잡혀 죽었다.

왕보는 왠지 마음이 불안했고 주창은 흉몽을 꿔서 불안했는데, 결국 오군이 관우와 관평의 목을 맥성 앞에 내걸자 왕보는 낙담해 성벽 아래로 스스로 떨어져 자결했고 주창은 자기 목을 칼로 찔러 자결한다.

왕보의 아들 왕우는 부친의 풍모가 있고 관직은 상서우선랑까지 올랐으며, 그의 사촌형으로는 왕사가 있다.

1.1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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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지/정/매가 모두 70대인 그저그런 문관으로 등장해 활용도는 애매.

삼국지 3에서의 능력치는 육전 74/수전 70/무력 63/지력 73/정치 68/매력 83로 어디하나 크게 빠지는 것이 없는 만능형의 장수이나 안타깝게도 무력과 지력이 7씩 부족하여 장군,군사둘다 되지 못하는 불쌍한 장수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59/36/76/77의 그저그런 문관이지만 교사를 가지고 있는 거 하나는 좋은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2/43/78/75/73에 특기는 농업, 고무 2개. 그냥 농업셔틀로 쓰면 되는데 수명이 짧은게 흠이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62/41/79/78/73으로, 무력이 2 떨어진 것에 비해 나머지 능력치는 소폭 상승했다. 드디어 통솔이 60대로 올랐으나, 실제로 전장에서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무력이..... 특기는 잉여인 매복#s-3이기 때문에 pk에서 내정형 스킬로 바꿔주자.

삼국지 12에서는 62/41/79/78의 무난한 문관 스탯으로 나왔으며, 특기로 경작을 가지고 있어서 군량 생산용으로 쓸만하다. 전법은 총맹사(궁군병격)이며, 다른 궁병과 조합하면 좋은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막상 자신의 통/무는......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요화와 같이 레벨40 전차로 등장한다. 맥성에서 관우가 죽으면 그대로 바이바이. 그리고 관우가 살았어도 이후 별동대를 파견하지 않으면 왕보는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역시 맥전투에서 레벨1 물자대 우군으로 등장하여 보통 가장 먼저 사망한다. 전차대인 주연한테 맞으면 한방...안습. 사망 시 대사가 좀 찡하다. "관우님, 저승에서 기다리겠습니다만, 그 날이 먼 훗날이길...!"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가상모드의 맥성 구원전에서 맥성을 지키는 우군 보병으로 등장. 이때의 왕보는 이 게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사랑받는 우군이라고 봐도 된다. 조조전 특성상 우군은 거의 경험치만 빨아먹는 애물단지 취급받기 십상이지만, 이 전투의 왕보는 온갖 다굴에도 굴하지 않고 맥성을 꿋꿋이 지켜주니 지켜보는 입장에서 참으로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로어셰크로 나온다.

2 후한환관

王甫,
(? ~ 179)

후한 영제 때의 환관.

왕보와 조절이 두태후(두묘)를 섬기면서 아첨을 일삼자 168년, 태후의 아버지 대장군 두무진번은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번갈아 태후에게 환관들을 제거할 것을 청했으나. 태후가 계속 망설였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결국 시일이 지체되어 이들의 계획이 환관 측에 알려지자 선수를 쳐 두무 일파를 공격하기로 했다.

조절이 변란이 일어났다 해 영제를 피신시킨 사이 왕보는 칼을 빼들고 관리들을 위협하면서 스스로 황문령이 되고 두태후를 위협하여 인수를 빼앗은 다음 환관들을 저지하기 위해 궁궐로 들어온 진번을 죽였다. 이후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두무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자 사기가 떨어진 두무의 군사들은 왕보에게 항복했으며, 왕보는 도망치는 두무와 두소 형제를 잡아 죽였고 영제는 왕보를 중상시로 승진시켰다.

171년에 영제가 남궁으로 쫓겨나 있던 두태후를 뵈러 왔을 때 두태후를 섬기던 환관 동맹이 두태후를 위해 아뢰어 태후에게 보내는 물품을 늘리게 했다. 이것을 안 왕보와 조절은 동맹이 영제의 생모 동태후를 비방했다고 모함하여 죽게 했다.

왕보와 조절의 권세가 커지자 태위 단경은 스스로 환관들에게 아첨했고 왕보의 양자 왕길은 백성들을 함부로 죽였으며, 이에 사예교위 양구는 환관들을 제거하려 했다. 179년에 왕보가 문생에게 경조 경내에서 관청의 재물 7천여 만 전을 독점해 매매하게 했는데, 양표가 왕보의 부정을 적발해 양구에게 알려주자 양구는 왕보가 집에서 쉬는 것을 틈타 궁궐에 가서 왕보 일당의 죄악을 고하고 이들을 붙잡아 하옥시킨 후 모진 고문을 해서 죽였다.

조정에서는 왕보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들을 귀양 보냈으며, 왕보의 시체를 절단하고 거리에 전시했다.

3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2

王普
(? ~ ?)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에 유장이 그에게 복종하려 했지만 사자로 갔던 장송이 조조에게 원한을 품고 헐뜯으면서 동맹이 무산되었는데, 적벽대전 이후 조조의 세력이 밀려나자 유장이 반 독립 상태가 되고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격파하자 유장의 세력에 위협이 느껴졌고 장송, 법정유비를 지원군으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장송이 유비와 내통한 것이 드러나면서 유비, 유장이 싸움을 벌이게 된 끝에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왕보는 하후찬 밑에서 광한군의 주부로 있었으며, 하후찬이 진밀을 초빙하려고 할 때 진밀이 질병을 핑계로 집에 누워 움직이지 않으면서 하후찬, 고박과 함께 진복의 집을 방문했지만 하후찬이 진밀의 문답에 반나절이 지나도 대답하지 못하면서 진밀을 초빙하는 것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