畢軌
(?~249)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자는 소선(昭先).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는 자례(子禮)아다.
동평 출신으로 어렸을 때 재능이 있어 명성이 있었으며, 조예가 태자로 있을 때 문학중에 재직했다. 황초 말[1]에 장사로 임명되고 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황문랑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공주와 결혼해 유복하게 지냈다.
용종복야로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왕사가 아닌 신비를 기용할 것을 권한다.
상서복야 왕사는 정력적이고 부지런한 옛날 관리이지만 그의 충성심과 신의 및 지략은 신비만 못합니다. 신비가 왕사를 대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는 병주자사로 승진했으나 교만하고 강맹했으며, 이 때 그는 견초와 이민족에 대해서 함께 토의해 견초가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했지만 시행하기 전에 견초가 병사했다. 233년 6월에 견초가 걱정한 바에 따라 가비능과 보도근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필궤는 안으로는 보도근, 밖으로는 가비능을 무찌르지만 조예는 이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생각해 필궤에게 경계를 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필궤는 소상과 동필을 파견한 뒤였으며, 조예의 예측대로 소상과 동필은 가비능의 아들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보도근의 부락은 모조리 반기를 들어 국경 부근을 약탈하니 진랑이 와서야 이 사태는 진압되었다.
이 일에 대해 장제가 표를 올려 말하길
필궤가 이전에 패한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니 이를 책망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이후로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무릇 사람의 재능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으니 모두가 강성할 수는 없습니다. 필궤는 문장이 아름답고 스스로를 미기라 여깁니다. 이제 병주를 잃으면 다른 주로 벌충할 수 없는 것이니 필괘를 내직으로 옮겨 현직에 임명한다면 그의 덕을 훼손하지도 않고 국사의 측면에서 볼 때도 실로 좋은 일입니다. 이는 안위에 관련된 중요한 일이니 오직 성은으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 조예가 사치스러운 행동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안, 정밀, 이승 등과 어울려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니 태자 시절부터 조예와 친분이 있는 그였지만 필궤 또한 이들과 함께 모두 조예에게 쫓겨났으며, 조방이 제위에 올라 조상이 권력을 잡자 그는 중호군에 임명되었고 시중상서로 전임되었다가 사예교위로 승진한다.
왜곡된 상주를 통해 노육의 관직을 박탈시키고 정밀과 함께 사마의를 조심하라고 상언했으며, 평소 조상과 친했기에 매번 조상에게 건의할 때마다 여러 번 그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249년에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 일파는 제압되고 하안, 이승, 정밀, 등양, 필궤와 함께 삼족이 멸해졌다.
세어에 따르면 병주자사로 있을 때 옛 한의 장군 도요장군 범명우의 노예인 350살짜리 선비족 노비를 본국에다가 보냈다고 한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지 9 일러스트 |
삼국지 9에 등장해 지력 72 정치 63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기사, 혼란, 덫을 가지고 있다. 무력은 36이라 기사의 위력은 기대하지 말고 얌전히 혼란을 들자.
삼국전투기에서는 조상 일파가 전멸할 때 사망한다. 다만 조상 멤버들 중 유일하게 등장은 없고, 언급만 된다.- ↑ 220 ~ 226년이다.